[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2) 거식증에 관한 낱낱하고 정확한 기록
[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2) 거식증에 관한 낱낱하고 정확한 기록
  • 박지니 작가
  • 승인 2024.02.08 2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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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못하는 여자들' 표지 © 도서출판 아몬드
'먹지 못하는 여자들' 표지 © 도서출판 아몬드

 

사람들의 주의는 대개 무엇이 거식증을 촉발했는지에 쏠린다. 자신을 굶기겠다는 이 결정이 너무 불가해하게 보이므로 당연히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데, 이를테면 시험에 대한 불안이나 눈치 없이 외모를 평가하는 말, 패션모델을 향한 동경처럼 정답인 듯 보이는 단순한 촉발 계기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딱 수수께끼가 풀린다. 이런 관점이 거식증을 그렇게 사소한 것으로 일축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원인과 계기가 전혀 다른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을 그저 기묘한 일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식증 환자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나 있을까? 정말로 그 지독한 피학성이 단순히 <보그>나 틱톡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여기는 건가?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 예의상 붙어있던 살들이 다 제거되고 남은, 분노와 비참과 공포라는 걸 정말로 보지 못하는 건가? 

해들리 프리먼, 『먹지 못하는 여자들』, 아몬드, 2024, pp. 46-47..

지난 1월 21일 일요일 오후, 미리 대관해 둔 강남역 근처의 조그만 공간에 우리는 모였다.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지금은 잊힌 섭식장애 전문 입원병동에 대해 그곳의 경험자들이 짧은 영상 기록을 만들어 보기로 한 때문이었다. 그 역시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학교에서 영상을 공부한 뒤 자기 경험을 주제로 한 실험적 단편을 DMZ영화제에서 공개하기도 한 양석영이 고맙게도 촬영을 맡아 주었다.

모두 네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계획이었지만 모인 것은 셋이었다. 미국에서 가족을 꾸리고 연구자로 지내고 있는 한 친구는 불가피하게 직접 영상을 찍어 보내주기로 했다.

국내, 아니, 서울에만 있다 사라진 섭식장애 전문 입원병동은 2000년대 초반 혹은 중반에 문을 열고 2010년대에는 전부 문을 닫았으므로, 목격자들은 그 시기에 십대나 이십대였던 세대로 국한된다. 1980년 1월생인 나 박지니는 2001년 11월 스물한 살 때 A병원에 입원했고, 1975년생인 이은아는 1990년대 중반부터 그때 처음 생긴 섭식장애 전문 클리닉에서 외래 치료를 받다 2003년 스물여덟 살에 B병원에 입원했다. 1993년생인 박채영은 고작 열다섯 살이던 2007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C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므로 2010년대 이후 섭식장애와 싸워야 했던 이들로서는 우리나라에 섭식장애 환자만 받는 입원병동이 있었다는 걸 알지 못할 확률이 높다.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출신으로 『또, 먹어버렸습니다』(다른, 2021)를 쓰고 섭식장애 전문 심리상담가로 활약 중인 김윤아 역시, 2022년 말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준비하며 필자가 처음 찾아가 만났을 때 ‘외국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평범한 가정집 같은 형태의 입원시설이 우리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얘기했을 정도였다.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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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식장애 입원병동의 정치적 구조

『먹지 못하는 여자들(Good Girls)』(아몬드, 2024)을 쓴 영국 저널리스트 해들리 프리먼(Hadley Freeman)은 1978년생으로, 자신이 십대 시절부터 수년에 걸쳐 입퇴원을 반복했던 90년대 당시 영국의 섭식장애 입원시설과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고 정확히 재현한다. 단명했던 국내 섭식장애 입원병동 역시 영국에서 수련 받고 돌아온 젊은 의사들이 대담하게 시도한 프로젝트들이었므로, ‘큰 틀’은 비슷하다 - 여기서 A병원 내 동료들이라면 크게 한번 웃을 것이다. 이건 우리들만 아는 말장난이다.

해들리 프리먼은 섭식장애 입원병동을 여학교 기숙사에 비유한다. 단지, 온 하루가 매 끼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무력한 간호사들은 어떻게든 - 즉, 각자의 지혜와 인생경험을 보루 삼아 자기 방식대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말 그대로 어떻게든 - 여자아이들이 하나도 예외 없이 받은 음식을 최대한 덜 남기고 다 먹고 소화시키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시점 병동의 분위기에 따라 크게 다르겠지만, 간식으로 나온 서로 다른 브랜드의 떠먹는 요거트 중에서 누가 영악하게 재빨리 손을 뻗어 10칼로리라도 낮은 브랜드를 차지할 것인가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 이건 내 경험이다. 당시 칼로리엔 잼병인데다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10칼로리 높은 요거트를 먹게 됐다는 예상치 못한 귀결에 죽을 것 같은 분노와 자기혐오를 느꼈다. - 극단적인 경우 해들리 프리먼이 묘사했듯 음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식탁에 흘리고 옷소매에 숨기고 그릇에 지저분하게 펼치고 발라 어떻게든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양을 줄이기 위해 악을 쓸 터였다.

그리고 해들리 프리먼은 이렇게 보고함으로써, 바로 동일한 것을 목격했던 한국의 독자에게 동지를 만난 환희를 선사했다.

당시의 대다수 섭식장애 병동과 마찬가지로 병원1의 시스템은 대단히 위계적인 동시에 우스울 정도로 가부장적이었다. 남자 전문의가 왕이었고, 전적으로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간호사들이 그에게 보고했으며, 우리, 그러니까 여자 환자들은 거물 남자와 그의 여자 부하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비천한 소작농들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 어리석은 여자애들에게 살아갈 방법을 말해주는 남자가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가 보기에 닥터 R은 병동에 와서 경쾌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다닐 때, 자기가 유난히 바쁜 일정에서 억지로 시간을 짜내 우리를 보러 왔으며, 그때까지 우리는 시들시들 활기를 잃어가며 자기가 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pp.119-120)

'삼키기 연습' 표지 © 글항아리
'삼키기 연습' 표지 © 글항아리

나는 내 책 『삼키기 연습』(글항아리, 2021)에 이렇게 썼다.

그리하여 목요일.

모두가 미리 와 있었다. 밤 근무로 눈이 부은 간호사 둘, 일찌감치 출근해서 교대 준비를 마친 간호사 둘, 가끔가다 볼 수 있던 여자 심리학자와 사회복지사까지 이리로 출근해 상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애들도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용한 것이, 마치 치과 로비에서 잇몸을 쨀 순서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일렬로 앉아 있는 사람들 같았다.

 

원장이 왔다. 그의 다소 가냘픈 체구를 감싼 어두운색 정장이 현관을 가린 벽 밖으로 빼꼼 보였다. 한 손으론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론 구두를 벗고 있으리라. 수간호사가 활짝 웃으며 그를 맞았다.

“아이고, 얼마나 좋으세요. 이렇게 예쁜 딸이 여럿 기다리고 있고.”

 

주름이 많고 양쪽 뺨이 옴폭하게 팬 원장의 얼굴이 처진 눈을 빛내면서 환하게 웃으며 등장했다. 주방 쪽에 몰려 있던 수많은 여자(간호사 넷과 심리학자, 사회복지사까지 여섯이나 되는)가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거실을 향해 한두 발자국씩 다가왔다. 텔레비전 앞을 가리고 선 원장을 보며 우리도 얼떨결에 다 같은 미소로 맞았지만, 곧 묽게 만든 물감으로 가득한 팔레트를 부주의하게 흔들었을 때처럼 우리 표정은 제각각으로 묘하게 흐트러졌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우리는 하려던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우리 뜻대로 이룰 수 있을까? (pp. 45-46)

책을 내고 처음 참여하게 된 온라인 북토크에서 진행자들은 내게 책에서 뽑아 읽고 싶은 구절을 고르게 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위의 구절을 낭독했다. 그러나 이 묘사를 내가 강조할 때 그에 대한 이해나 흥미를 보여준 이는 거의 없다 - 놀라운 일이지만, 한국의 대중서 문화에선 아직 그렇다. 다들 저 ‘오이 에피소드’ - 생오이를 고추장에 찍어 먹고 싶어 두려움 속에 오이를 먹고는 가죽만 남은 배가 오이 세 개 만큼 튀어나오자 울어버린 나를 어머니가 다독이는 장면 - 에만 반응을 보인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 책에 등장하는 간호사 역시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니.”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중요한 건 뭘까? 그가 의미한 게 ‘회복'이라면, 그 회복은 어떤 형태일 것이었으며 나는 - ‘나는’ 즉,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무관하게 나라는 개인, 문제아, 혼자는 - 어떤 식으로 거기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의 해들리 프리먼 © The Times
어린 시절의 해들리 프리먼 © The Times
해들리 프리먼의 가족 © The Times
해들리 프리먼의 가족 © The Times

‘회복'의 약속

‘회복'이라는 우리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병에서 나아지는 ‘회복(recovery)’이 있고, 부정의로 인한 피해를 복구한다는 뜻의 ‘회복(reparation)’이 있다. 그리고 섭식장애에 관해 매번 고루하게 얘기되는 것은 전자의 회복이다.

그러나,

섭식장애가 그토록 불균형한 비율로 여성에게 치우쳐 발생하는 이유를 고심할 때 사람들은 여성성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이어트 문화와 모델들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 이는 사람들이 ‘섭식’ 부분에 주의를 빼앗겨 ‘장애’라는 더 넓은 측면을 곧잘 망각하기 때문이다. 거식증 환자의 90퍼센트가 여성인 데는 문화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렇다. 여자들에게 말랐다는 건 언제나 인기 있는 특징이고, 이런 트렌드 자체가 여성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름은 여성의 식욕 결여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보는 사람들에게 그의 신체적 연약함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여성성에 관한 메시지를 받으면 역겹다는 듯 뱉어내고, 어떤 여자아이들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 삼키고 또 다른 아이들은 그 메시지 때문에 체한 듯 딸꾹질을 한다. 조그만 순응자였던 나로서는 내가 그 불합리한 개념들을 거부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고, 따라서 여자아이들이 어떠해야 한다는 기대 자체에 잘못된 구석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채 대신 내게 뭔가 잘못된 구석이 있다고 생갹해버렸다. (pp. 64-65)

15세기의 여성과 21세기의 여성을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그 옛날의 성인들을 현대의 거식증 환자들과 나란히 비교하거나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굶기는 현상이 수천 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같은 증후군에 시달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해도, 평소 항상 무력감을 느끼던 여자가 통제력을 쥘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임을 깨달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섭식 거부는 언제나, 무언가가 옳지 않다는 것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아주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p. 43)

거식증의 상당 부분은 환경에서 기인하며, 환경이란 문화를 뜻한다. 패션은 문화의 일부이자 문화를 반영하는 한 단면이며, 마른 몸을 향한 패션의 편향적인 집착은 여성의 극기와 완벽한 여성성의 연상 관계가 우리 문화에 얼마나 뿌리깊게 파고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거식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거식증이 자라날 부드럽고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는 건 사실이다. 극도로 깡마른 모델들이 대세가 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의 플래퍼, 1960년대 성혁명 당시 모델 트위기의 부상, 1990년대 포스트페미니즘 시기 케이트 모스의 등장까지 여자들이 표면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는 사회적 움직임과 여지없이 일치했다. 그건 전형적인 주고 뺏는 전술, 여자들에게 족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려주고자 하는 영악한 술책이다. (중략) 이런 반격이 패션계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더 폭넓은 사회적 풍조와 변화에서 오며, 패션은 그걸 포착하고 과장하고 영속화한다. 자기를 굶기는 것은 자신의 활동에 훼방을 놓는 일이며, 거식증은 어린아이가 10대 시절과 성인기의 자유를 경험하기 직전인 청소년기에 시작된다. (pp. 353-354)

우리는 해들리 프리먼도 정확히 기술한 이 얘기를 하고 또 해 왔다. 그렇게 수많은, 그 수가 폭증하는 여자아이들이, 그것도 점점 더 이른 나이에, 여자로서의 역할에 존재론적 공포와 무력감을 느낀다면, 그래서 자신의 몸 자체를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자기를 굶겨 죽이고 싶어 한다면, 현재 필요한 ‘회복’은 훨씬 광범하고 본질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오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의 에세이 「여자아이처럼 던지기(Throwing like a Girl: A Phenomenology of Feminine Body Comportment Motility and Spatiality)」, 그리고 재스비어 K. 푸아(Jasbir K. Puar)의 ‘불구화(maiming)’ 개념이다. 이어 여성 존재에 부과된 제한이 자본주의 역동과 어떤 연을 맺고 있는지 해부해 보고 싶다.

영화 '더 리더' 중 한 장면 © Stephen Daldry
영화 '더 리더' 중 한 장면 © Stephen Daldry

지난해 10월, 나는 여성주의상담심리학회의 초대로 섭식장애에 대해 당사자로서의 고민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내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한창 식사치료를 받고 있던 어느 날, 추석연휴가 지나고 식사치료 선생님은 대화 중 이런 말씀을 했다. “선생님도 명절을 보내고 나면 체중이 늘고 속이 더부룩해서 기분이 좋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괜찮아져.” 나는 이런 식으로 대꾸했다. “그럼 그렇게 과식과 불쾌를 오가는, 요즘 사람들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식의 불만스런 생활로 돌아가는 게 - 파계(破戒)하는 게 - 회복이고, 건강인 건가요?” 학회에 모인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의도한 게 전혀 아니었던 나는, “하지만 식사치료 선생님의 방식이 옳을 수도 있어요.”라고 곧바로 덧붙였다. 시궁창 같고 카오스 같지만, 어쨌든 거기서 번민하는 것이 하나의 정당한 선택지일 수도 있다. 혹은, 정희진 선생님이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 12월호의 한 코너에서 언급한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처럼, 만약 나치 강제수용소 교도관이었던 주인공 한나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을 방법을 아무리 상상해 봐도 자살 밖에 없는 것 같다면, 자유의 많은 부분이 제한된 구조에서 한 개인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악의 선택을 비난한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간호사들

간호사들은 우리를 관찰하고 먹이고 꾸짖고 구슬리고 위로했다. 병동이 왕국이고 의사들이 신이라면 간호사들은 여왕이었다 간호사들은 모두 복아일랜드 아니면 카리브제도 출신이었고, 나는 누가 언제 일하는지 파악하려고 금세 그들의 근무 일정을 다 외워버렸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했던 마리(벨파스트 출신)와 조슬린(트리니다드 출신)의 일정을 다 외웠는데, 그들은 엄격하면서도 친절했고 나를 이해하면서도 멍청하지 않아 좋았다. 그들은 확실히 닥터 R보다는 더 똑똑했고 남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알았다. 그들은 한 번도 음식을 숨긴다며 나를 부당하게 비난한 적이 없었지만, 내가 음식을 숨기려고 할 때마다 빠짐없이 알아채고 제지했다. (p.135)

내가 20여 년 전 섭식장애 입원병동에서 처음 크게 인식하게 된 것 중 하나는 무엇보다 ‘간호사'라는 기이한 직업이었다. 나는 이 얘기를 몇몇 북토크 자리에서 하기도 했는데, 대학상담센터에서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생을 첫 상담자로 만나고 몇 해 뒤에야 정신과의사를 만날 수 있었던 나로서는 소위 ‘바운더리(boundary)’라는 게 없는 듯한 간호사의 직무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입원병동에서 그린 그림 © 박지니
필자가 입원병동에서 그린 그림 © 박지니

정신보건이라는 영역에서 2등시민 취급을 받던 임상심리학자들은 거의 내담자가 홀대당하는 느낌을 받을 만큼 어떤 보이지 않는 ‘규정’ 앞에 경직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자기 병원이 자신이 세운 왕국 같은 정신과의원 원장들은 ‘내 판단과 행위에 앞선 규정은 없다'는 식으로 너무나 호기롭게 움직였던 한편, 간호사들은…… 우는 나를 달래고,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 어두운 침대 옆에서 내 손을 자기 두 손 안에 쥐고 마사지해 주는 기적적인 친절까지가…… 그 어떤 ‘바운더리'도 해치지 않는, 온전한 그들의 역할이었다. 21세기에. 믿을 수 있겠는가?

해들리 프리먼이 90년대 영국에서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게, 2001년 겨울 나와 함께 병동에 머물러준 간호사들 역시 가난하고 어려운 집안에서 자란 여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사연을 들었다. 내가 블라인드 끈에 목을 매 자살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 말이 자신에게 엄청난 타격이 되게 만든 과거사를 얘기해 준 여자도 있었다. 그들의 원장처럼 영국에서 수련 받고 온 이들도 아니었으며, 그러나 밥을 먹느니 죽기를 바라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어머니를 대신해 먹이려는 싸움을 이어가야 한 것은 오롯이 그들이었다.

이영호가 1999년 발표한 논문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입원 치료임상 실제」 역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간호사의 역할은 여러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간호사가 치료팀 중에서 환자와 가장 밀접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환자에 대한 지지, 교육, 감독 이외에도 아주 세밀한 것 하나 하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환자에 대한 모델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본 클리닉에서 치료자 지침서로 사용하고 있는 부록 2에서 보여 준 문제들이 임상 실제에 있어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이다. 실제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은 가는 환자에 따라, 치료 상황에 따라 다르므로 어떤 원칙보다는 이 장애와 환자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본 클리닉에서 그동안 경험을 토대로 위의 문제 이외에 감독하 식사를 실시하면서 흔히 부딪칠 수 있는 문제들로는 환자들이 감독하 식사를 자신이 가진 핵심병리 중 하나인 조절의 문제와 연결시켜 치료자들과 겨루는 경우, 감독하 식사를 운영하는 감독자간의 감독 원칙의 준수 및 조정의 문제, 감독자들이 문제상황을 의도적이지는 않으나 직접 조정하여 발생하는 문제 등이 있었고, 실제 감독하 식사를 시도하면서 감독자들의 식사습관이나 양상의 문제 등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를 치료진이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문제의 해결이 환자가 자신이 문제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남을 믿을 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서 치료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게 만드느냐에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치료진은 항상 일정하고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환자를 벌하지 않고 지지적으로 도와주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이 말은 즉, ‘회복(reparation)’적 재구성 경험 없이는 병의 ‘회복(recovery)’도 난망해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또 한편, 섭식장애 치료에서 핵심이며 가장 난해한 이 영역이 거의 온전히 저임금 2교대 간호사들에게 부담지워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 포스터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 포스터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현재를 만든 기제는 무엇인가? 현재를 고치기 - 회복시키기 - 위해서 바꿔야 하는 건 무엇인가?

궁금한 건 이것이다. 2000년도 의약분업 직후의 개원 붐이 그 무렵의 섭식장애 입원병동 개원과 관련이 있는가? 입원병동에서 정작 24시간 환자와 함께하는 사람은 섭식장애 치료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지 못한 2교대 간호사들이었는데, 그 같은 치료 시스템은 적절했나? 20년이 지난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 역시 그 어떤 치료행위는 물론 진단을 위한 간단한 지필검사도 보험 적용 밖에 있던 섭식장애에 대해 전액 개인부담의 입원시설을 낸 배경에는 어떤 경제적 셈이 있었을까? 어째서 그것이 합리적 사업모델로 받아들여졌을까? 그리고 현재는? 섭식장애의 심증적 유병률은 극악해진 현재, 왜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무엇이 우리를 내팽개쳐둬도 괜찮은 존재로 만든 걸까?

해들리 프리먼은 책에서 크리스토퍼 페어번의 강화인지행동치료(CBTE)에 대해 설명하며 ‘E(enhanced)’의 의미는 인지행동요법에 기반해 환자를 케어하되 ‘개인화(personalization)’에 힘을 싣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국내에는 섭식장애 치료를 위한 CBT를 실시할 수 있는 전문가가 몇이나 될는지도 의문이고, 과연 CBTE를 본질적으로 가능케 할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가능하기나 할지도 회의적이기만 할 뿐이다.

해들리 프리먼은 이렇게 질문하며 책을 맺었고, 나는 내가 하고 싶던 말을 바다 건너 누군가 똑같이 하고 있는 것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때로 병원의 단순함을 그리워하고, 병원에서 만난 여자들을, 특히 몇 달씩 내 곁에서 잠을 잤지만 나중에 신문 부고란에서 마주치게 된 이들을 자주 생각한다. 그들은 왜? 우리는 왜? 우리가 뭘 그렇게 나쁜 짓을 했기에? 그 추위와 막막함과 외로움, 팔딱대는 심장과 기진맥진함, 운동과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 아직도 매시간 불가사의하다. 거기서 해방되기는 했지만, 그 분열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의 한쪽 옆으로 살짝 비켜선 채, 내가 가진 삶을 바라보면서 가지지 못한 삶에 관해 생각할 것이다. (중략) 처음 병에 걸린 이후,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정확히 30년이다.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잔을 들었고,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먹었다. (p. 418)

* 이영호(1999).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입원 치료:임상 실제,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신경정신의학 제38권 제3호, 44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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