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1) 이상한 나라의 부적절한 앨리스
[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1) 이상한 나라의 부적절한 앨리스
  • 박지니 작가
  • 승인 2024.01.31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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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으로 가동되는 사회와 섭식장애라는 여성의 질환
(c) 잠수함토끼콜렉티브
(c)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사라 아메드가 그의 책 『행복의 약속』(후마니타스, 2021)에서 "행복은 무엇을 행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처럼,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수치심은 무엇을 행하는가?" 신입사원 시절, 나는 사무실 내 자리에서 멀쩡히 그냥 존재하는 법조차도 누구에게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상사가 뭔가 바짝 집중할 만한 과제를 던져주지 않으면, 그래서 내 효용을 그렇게 눈곱만큼이나마 실시간으로 입증할 수 있지 않으면, 나는 곧장 불안을 누르기 위해 머릿속에 울창해질 아무말과 이인증(離人症)으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정말로 무능력한 존재임을 역으로 입증해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내 약점을 첫눈에 알아본 광고주 회사의 총무부 여직원은 아침 9시 정각이 되면 득달같이 내 자리로 전화를 걸었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 죽음이라는 절차도 원치 않게 된 나는, 전화를 받지 않으면 더 큰 난관에 처할 거라는 공포에 겨우 수화기를 들 수 있었을 뿐, 쏘아붙이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어떻게 응답할지에 대한 똑똑한 전략따위는 생각할 힘이 없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전과 비교하면 놀랄만큼 차분하게 상대방의 억지를 들어주고 차분히 반박할 수 있게 되었고, 스스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의 만족감을 즐기게도 되었다. 상담치료 상황에서 수없이 들었던 말들 - 너는 결코 남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 누구나 부족한 면이 있다, 실수는 항상 벌어지는 평범한 일이다, 네가 상대방을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너를 그렇게 무심히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걱정을 하느라 네게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 을 이제는 완전히 이해하지만, 그건 내가 어느 순간 상담자의 말을 드디어 '믿기로' 결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좌표에서 내 존재의 위치가 좀 더 안전하고 안정적인 위치로 변화한 덕분에 내가 몸으로 경험하는 것들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수치심은 무엇을 행하는가? 그것은 나를 순응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 점이 훨씬 중요한데,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막았고 융통성 있게, 한껏 자유로이, 전략적으로 움직이질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므로, 내 수치심의 근거는 내게 있었고, 내가 처하는 모든 일은 내가 자처한, 합당한 귀결이 되었다.

여성이 생애 아주 일찍부터 내면화하는 뿌리 깊은 수치심은 여성에게 무엇을 행하는가? 얼마 전 나는 내 책 『삼키기 연습』(글항아리, 2021)과 몇 권의 다른 섭식장애 회고록을 읽고 그에 대해 블로그에 기록한 어느 대학생에게 말을 걸었고, 내 부탁으로 ‘얄량’님이 써서 보여준 글에 담긴 고백들은 지금 세대에게 갑자기 닥친 고질이 아님은 분명했다.

내 몸이 뚱뚱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비만도 과체중도 아닌 정확히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하지만 난 마르고 싶다. 마르기라도 하고 싶다.

얼마나 말라야 내 몸에 만족할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키빼몸(신장에서 체중을 뺀 값) 120일 때도 내 몸이 말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평범했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몸. ‘저 사람 정말 말랐다’ 하고 경악하게 되거나 ‘저 사람 정말 뚱뚱하다’ 생각하며 시선으로 그를 따라가게 되지는 않을 정도의 적당한 몸.

내 모든 불행이 마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 같다. 왕따를 당한 것도.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한 것도. 마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다.

체중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공부해야 하지만 체중은 하루 이틀 정도 굶고 나면 줄어든 숫자로 보답한다. 빠진 무게가 수분이든, 근육이든 중요하지 않다.

‘섭식장애’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글로 써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받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부적절함’이었다. 나는 아주 말라본 적도 없고, 배가 터지도록 폭식한 적도, 먹은 음식을 게워 낸 적도 없는데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섭식장애에 대해 말하나? 분명 나보다 더 ‘적절한’ 서술자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앞의 세 가지 경험은 있어야 섭식장애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살을 빼고 싶다. 성형도 하고 싶고 ‘적절한 몸’이 되고 싶다. 살을 아주 많이 빼서 아예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기도 하다. 이 세상에 속하기에 나는 ‘부적절’하므로.

(c) 잠수함토끼콜렉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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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량’은 고민의 답을 얻기 위해 책을 찾아 읽고, 자기 생각을 기록하고, 엄마와의 관계에 왜 항상 긴장이 팽배하는지 되짚고, 대학생활에 적응하는 동시에 아르바이트도 구하려 한다.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그는 자신이 어떤 기준에도 - 심지어 섭식장애라는 진단기준에도, 자기 고통의 진정성을 입증할 외양적 표식, 피골상접의 정도에서도 - ‘부적절’함을 느낀다. ‘수치심(shame)’과 ‘죄책감(guilt)’은 대표적인 두 가지 자의식적 감정(self-conscious emotions)이지만, 자신의 특정적, 일시적이며 통제가능한 - 다시 말해, 회복적 노력 역시 가능한 - 측면이 일으키는 감정이 죄책감이라면, 자신의 전반적, 고착적이며 통제불가능한 - 즉, 어쩌면 운명적인 - 측면이 일으키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그리고 ‘얄량’뿐만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거의 모든 여성이 전반적, 고착적이며 통제불가능한, 운명적인 자기 자신, 몸과 그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부적절감’을 느껴왔다.

대중서를 많이 쓴 일본 정신과의사 다카하시 가즈미는 ‘죽고 싶다’도 아닌 ‘사라지고 싶다’가 어린시절 학대받은 사람들의 특징적 호소라 주장하기도 했지만, 굳이 유년기 학대의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사회가 몰인정하는 불안한 존재라면 누구든 자기의 지금 있는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불리하게 느끼지 않을까.

여성 대 남성의 유병률 비율이 10:1에 이르는 섭식장애는 반박할 수 없는 사회적 질병이다. 게다가 채용사이트에 마케터 구인공고를 올리는 국내 업체들 대다수가 식품 아니면 미용 상품을 팔고 있으며, 식당에서 ‘먹방’ 퍼포먼스를 펼치며 음식을 많이 먹어 주는 것이 팬데믹 시기 지역경제를 돕기 위한 솔선수범으로 제시되고, ‘불쉿 잡(Bullshit job)’에 시달리다 퇴근한 MZ세대 주인공이 유행하는 자극적인 음식들을 폭식하며 스트레스를 날린다는 줄거리의 ‘애니 먹방’(애니메이션 먹방)이 구독자를 얻을 만큼 어떤 류의 음식이 값싼 입문용 마약처럼 통용되는, 묘한 식품업∙산업 복합체(Culinary-Industrial Complex)적인 한국사회에서 먹거나 먹지 못하는 것이 체제의 상처가 곪아 마침내 터져버리는 객체적 지점이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캐시 오닐은 『셰임 머신(The Shame Machine)』(흐름출판, 2023)이라는 책에서 사람을 끝내 고립시키고 마는 ‘수치심’이라는 이 감정이 제도적, 상업적 이윤 극대화에 어느 정도로 비교불가한 효능를 발휘하는지를 짚어낸다. GLP-1 비만치료제를 출시한 노보노디스크와 일라이릴리가 절대 ‘완치’란 있을 수 없는 다이어트시장에 강자로 출현하며 거대 다국적제약사들의 순위를 뒤집고, 소위 ‘외모 및 경기력 향상 약물(Appearance and Performance Enhancing Drug, APED)’이 성적∙인종적 소수자들에게서 더 높은 빈도로 남용된다는 통계 모두 이 거대한 수치심 기계의 성능을 증명한다.

(c) 잠수함토끼콜렉티브
(c)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지난해 비로소 첫 회를 개최한 한국의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 행사는 우연한 계기로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이 주축이 되어 기획, 진행하게 되었다. 올해도 오는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일주일에 걸쳐 진행될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인식적 정의(Epistemic Justice)’라는 본격적 화두를 주제로 내걸었다. 국내에는 거의 없다시피 한 치료기회를 넓히고 신체상(Body Image)을 긍정하는 훈련을 하는 것도 가치있지만, 그에 앞서 우리 모두가 빤히 직시해 온 구조적 문제를 먼저 의제화하기 위해서다.

*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인스타그램 계정(클릭하면 연결됩니다)을 참고하거나 이메일(클릭하면 연결됩니다)로 직접 문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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