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후의 삶…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존재는 끝나지 않는다
삶 이후의 삶…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존재는 끝나지 않는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05.27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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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구성원의 극단적 선택은 우리 모두의 책임
신자유주의 세계체제가 인간의 수치심 강화시켜
극단적 죽음은 남은 자에게 깊은 상처 남겨
생이 연결돼 있다는 걸 안다면 함부로 삶을 훼손해선 안 돼

인간의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깊은 슬픔을 남긴다. 기자가 어린 시절이던 1970년대, 마을의 노인이 죽으면 꽃상여에 실려 장지로 떠났다. 먼 거리는 아니었다. 마을 뒷산의 선산에 묻는 것이었다.

화려한 꽃으로 단장한 상여 앞에는 선소리꾼이 먼저 창하고 상여꾼들이 후렴을 부르면서 간다. 추운 겨울이었다. 뒷산 가기 전 얕은 개울을 건너야 할 때, 망자의 가족은 상여를 더듬으며 곡했다. 가지 마시오. 그 떠남에 대한 슬픔과 애도는 비가(悲歌)가 된다.

그 떠남 안에는 육체의 이별이지만 망자와의 기억은 그대로 남는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인간은 제사를 지낸다.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했다. 이 세상에 뭔가를 남겨두고 가는 것에 대한 인간적 저항이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하나의 세계만으로 구성돼 있을까. 혹 이 삶 이후의 어떤 삶 또한 존재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생의 끝이 다른 생의 시작이 되고 이 생의 시작이 다른 생의 끝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 세계에 변하지 않은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모든 이는 떠난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떠난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아닐까. 죽음이 유희가 되고 축제가 되는 것은 망자의 죽음이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으로 연결될 거라는 걸 믿는 이들의 소망 아니었을까.

죽는다는 것, 그것도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인간의 정신에 상처를 남긴다. 프로이트는 이 애도의 시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떠난 이가 에고에 들어와 고통을 주는데 우울증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사는 만큼 제대로 죽는 법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때 진심으로 애도한 이후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슬픔이 망극해 지나치면 그것만큼 아픈 것도 없으리라.

그런데 이 같은 자연 수명이 다해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과 달리 또 하나의 죽음의 방식이 있다. 바로 자살이다. 언론 용어로 ‘극단적 선택’이다. 인간은 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끊임없는 해석을 낳았다. 그래서 동물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한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훼손하는 것. 어떤 정신과 전문의는 자살은 인간 실존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 죽음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십수 년째 1위다. 2017년에 동유럽 리투아니아가 자살률 1위를 기록한 것 빼고 우리나라는 줄곧 1위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2018년 통계청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자 수는 1만3천670명이었다.

OECD가 발표한 2019년 건강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 당 한국은 25.6명으로 자살수가 가장 많았다. 이어 미국 13.9명, 캐나다 11.8명, 영국 7.3명이었다. OECD 국가 평균은 7.3명이었다. 왜 이럴까?

기선완 가톨릭관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살은 여러 사회 문제의 최종 결과일 뿐”이라며 “자살 문제가 뿌리 뽑히지 못하는 이유는 자살과 관련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라고 분석한 바 있다.

(c)sisajournal.com
(c)sisajournal.com

기 교수는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에서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확실히 한국은 지난 100년 동안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를 압축적으로 달성한 사회다. 이 급격한 속도에서 밀려난 이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빠른 경제적 발전이 무조건 선(善)일 수 없는 이유다.

기 교수는 “자살은 한 개인의 정신건강 만의 문제가 아니”라며 “자살을 부른 사회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미치광이가 있다. 그는 대낮에 횃불을 들고 다니며 신을 찾는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그러자 미치광이는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신은 죽었다. 누가? 우리 모두가 그를 죽인 것이다. 신들도 썩는다. 교회에서 썩고 있는 신의 시체가 느껴지지 않는가. 저 교회가 신의 무덤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미치광이는 신을 죽인 인간의 패륜에 문제를 제기한다. 마찬가지다. 사회적 모순으로 인간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그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왜 관계없는 사람의 극단적 죽음에까지 우리가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타자에 의지해 살아가는 약한 존재자들이며 삶의 모든 곳에서 타자의 ‘있음’에 의해 우리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인간이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 우리는 적어도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충분히 애도됐을 때 우리는 존재를 떠나보내고 더 나은 삶과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할 수 있다. 기 교수가 말한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오늘(27일) 신문에 두 명의 20대의 죽음이 실렸다. 서울 중구의 LG빌딩 17층에 이 회사 직원인 A(26·여)가 투신해 숨졌다. 그녀는 우울증과 거식증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날에는 소방관 B(29) 씨가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에는 ‘일이 힘들다’는 괴로움이 토로돼 있었다.

우리는 이들의 죽음에 뭔가 책임은 없을까. 인간의 존엄이 존중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의 폭압적 경쟁 앞에서 서로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가려 했던 우리의 문제는 없었던 것일까.

죽음은 분명 살아남은 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우리의 삶이 단독자로 형성되는 게 아니라 수많은 그물 같은 인드라망(因陀羅網·관계망)으로 구성돼 있기에 낯선 이의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애도해야 한다. 그것이 타자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예의다. 또 삶 이후의 삶이 존재한다면 지금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생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요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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