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 이주현 “내게 인생 4기는 정신장애인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의 시기”
'삐삐언니' 이주현 “내게 인생 4기는 정신장애인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의 시기”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09.07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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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작가 이주현 인터뷰
조증일 때 울증이 온다는 걸 알기에 공포스러움 경험해
정신질환에는 잠이 중요…일정한 수면 패턴 유지해야
조울증은 평생 약 먹어야…증상 나타나면 주변에 적극 도움 요청해야
자기에게 맞는 의사를 찾는 데는 약간의 인내심 필요
모든 관계는 상처 남겨…상처인 걸 알아도 사랑해야
병을 극복했다기보다 운이 좋았고 사람들 도움 많이 받아
병식 아는 것만으로도 치료 단계에 들어선 것
정신질환자에 대한 혐오, 언론도 일정 책임 있어
치유는 단지 아프지 않다는 걸 넘어 잘 살고 있다는 느낌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인터뷰를 한 후 정리를 하면서 기자는 그가 쓴 책을 한 번 더 읽기 시작했다. ‘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라는 조울증에 대한 글이었다. 신문사 기자인 그는 삶의 어떤 부분에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의 청춘은 말 그대로 좋았다. 강원도 원주에서 교사인 부모님 밑에서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 없이 공부를 했고 1993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때까지는.

대학 2학년이던 1994년 그에게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이 찾아왔다. 일 년 후 복학. 그때까지 조울증이 뭔지 그는 몰랐다. 미숙한 청춘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사랑이 있었고 헤어짐이 있었다. 기억들은 청춘의 상흔처럼 다가왔다 멀어졌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모든 계층의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1997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했다. 선배들은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축복처럼 그를 환영했다. 수습과정을 거쳐 정식 기자가 된 후 그는 열정에 차 일에 몰두했다. 2001년 조증이 찾아왔다. 오랜 시간 일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자기 업무 외에도 터져나오는 아이디어에 온몸을 맡기며 일했다.

그러나 조증의 높이가 높을수록 울증은 더 깊게 패인다. 그는 울증으로 8개월간 휴직한 후 복귀했다. 그때도 선배들은 그를 옹호했고 배려했다. 그의 말대로 삶의 어떤 순간들은 그에게 “운이 좋았다.”

그리고 2006년 한 번의 조증이 큰 파도를 몰고 올라왔지만 병식(病識)이 생긴 후 그는 그 파도의 높이를 조절하면서 직장생활을 해나갔다. 그리고 지금도 ‘운이 좋게’ 좋은 정신과 주치의를 만나서 “돈을 내고 우는” 작업들을 해 나가고 있다.

2012년 스페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 거기서 그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1기(10대)는 온실 시기. 2기는 질풍노도와 헤맴의 시기. 3기는 조울과 친구 맺는 시기. 황금시대. 나는 지금 3기를 지나고 있다.”

4기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정신장애인과 세상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24년차 기자로서 그는 정신적 질환의 병리적 해석뿐만 아니라 법의 문제, 제도의 문제, 그리고 삶의 문제를 포섭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적인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정신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부모는 자식이 전문직은 언감생심이고 하다못해 자식이 일을 하면서 밥벌이라도 하길 고대한다. 부모가 죽은 후 남은 자식이 어떤 삶을 살까에 대한 불안에 생의 불면을 뒤척이게 된다. 일을 한다는 것. 노동이 인간성을 회복시킨다는 고전적 의미보다 노동이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늙어가는 평범한 생애주기를 모두 잃어버린 당사자들. 어떤 위로가 필요할까.

그래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어떻게 일을 하는지,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는지,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하는지 등 아주 작은 것들도 물어보고 싶었다.

이주현(46) 작가(한겨레신문 기자)를 만난 건 지난달 31일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주현 작가 (c)마인드포스트.
이주현 작가 (c)마인드포스트.

-원하지 않은 강제입원을 당할 경우 입원에 동의한 부모와 의사에게 증오심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님은 어땠습니까.

“정신질환의 가장 큰 어려움은 질병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질병인식불능증이죠. 병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주변의 반응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처음 폐쇄병동 입원했을 때 내가 반발해서 부모님이 병원에서 나오게 했는데 며칠 지내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졌어요.

그때 부모님이 말라리아 약이라고 하면서 수면제를 건네줬는데 그걸 먹고 잠이 드니까 병원으로 데리고 온 거예요. 병원에서 눈이 뜬 거죠. 석 달 입원해 지냈는데 질병 인식 불능 때문에 입원 자체가 나에게 맞지 않는 조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저에게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엄청 가졌죠.

<마인드포스트>를 보니까 강제입원에 대한 문제의식을 굉장히 갖고 있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저는 입원이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조증이 심한 상황에서 입원하지 않고 바깥에 있었다면 굉장히 많은 실수를 저질렀을 거 같아요.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제때 약을 먹지 않아 더 상태가 악화됐겠죠.”

-첫 입원 당시에 노트에 ‘나는 이제 부모님과 끝이다’라고 적었었는데 굉장히 분노했던 건가요.

“지금은 분노하지 않아요. 예전엔 물론 몹시 화가 났지만 그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론 부모님이 저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던 거 같아요. 아빠의 편지도 그 당시에 보기 싫었는데 안 버리고 간직하고 있었던 걸로 봐서 부모님이 저를 걱정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언니나 동생이 저를 염려해서 병원에 보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나를 미쳤다고 몰아세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정신병원 안에서 조용히 지내야 빨리 나갈 수 있다는 걸 여러 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우스우면서도 슬픈 느낌이 들더군요.

“난리 치면 안 내보내 줄 거 같아서 그렇게 한 거죠. 사실 조용히 있지는 않았어요. 조울증이 조용히 있으라고 해서 조용히 있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의사가 오면 내보내 달라고 침대 위에서 소리치기도 하고 특이한 행동도 하고. 부모님이 가톨릭 신자들인데 나는 불교에 귀의(歸依)하겠다고 해서 침대 위에서 하루에 108배씩 절하고 그랬어요.

의사한테 소리치고 간호사에게 화내고. 거기 알코올중독 때문에 들어온 환자들에게도 ‘나중에 퇴원하면 술 마시자’고 했고요. 그들의 회복 의지를 저해하곤 했죠.”

-정신과 폐쇄병동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느껴졌다고 했어요. 그때의 기억을 더 듣고 싶습니다.

“갇혀 있다는 이미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유를 빼앗긴 상태가 너무 분노스러워서 그랬어요. 그때 병원에서 읽은 책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는데요. 조증일 때는 자기 삶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과장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병원에 갇혀 있는 생활이 아우슈비츠와 똑같다고 생각했고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관찰했듯이 저도 병원에서 사람들을 관찰했죠. 나에게서 자유를 빼앗는다 해도 나는 최후의 나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생각을 막 한 거예요. 그때 제 심리 상태가 폐쇄 감금에 대한 엄청난 좌절이었죠.”

-조증의 봉우리가 높으면 울증의 골도 깊다고 했습니다. 조증과 울증 가운데 언제가 가장 위험합니까.

“전 조증일 때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행동이 예측이 안 된다는 점에서요. 조울증이 무슨 병인지 알게 되면 조증을 겪고 난 후 울증이 찾아온다는 걸 알아요. 조증일 때는 조증 상태가 공포스럽고 마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어요. 조증 뒤에 울증이 온다는 걸 알기에 두려워요.

2001년 처음 조증 앓았을 때는 몰랐어요. 그런데 2006년에 재발해서 조증 앓으면서 감정이 고양되고 팽팽한 긴장 상태가 되는데 좀 있으면 우울의 세계가 올 거라는 걸 알고 두려워했죠. 조증일 때 정신이 예민해지는데 예를 들어 어떤 할머니가 거리를 지나가는데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일어나는 거예요. 별 근거 없이 표정만 보고 할머니가 오늘 딸과 싸웠을 것이라는 억측을 했어요.

그런 게 무서운 일이죠. 좀 더 가면 망상이 되고 거기서 또 한발 나아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입밖에 내어 얘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게 두려웠어요. 그리고 조증에서 잘 관리를 못 하면 울증도 더 안 좋아져요.”

이주현 작가 (c)마인드포스트.
이주현 작가 (c)마인드포스트.

-조울병이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잠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일상생활을 잘 하는 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변하는 거잖아요. 정신질환에서 가장 잘 안 되는 게 잠인 거 같아요. 잠을 잘 자는 게 사람이 아픈지 안 아픈지를 진단하는 중요한 척도 같아요. 조울증은 조증일 때 잠을 안 자도 힘이 나고 울증일 때는 엄청나게 자죠. 일정한 수면 패턴을 유지하는 게 괜찮음의 척도 같아요. 모든 정신질환은 잠이 제일 중요해요. 잘 쉴 수 있도록 마음 상태가 돼야죠.”

-조울증이 발현되면 많은 이들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님의 경우는 회사가 배려해 준 겁니까.

“저는 운이 좋았어요. 신문사 들어간 지 4년차였던 27살에 발병했어요. 어렸기 때문에 막내 측에 속하니까 선배들이 많이 봐줬던 거 같아요. 저희 회사가 공동체적 분위가 있는데다가 어린 기자가 아프다고 바로 회사를 그만두게 하기보다는 배려해줬고 또 장기 휴직(병가휴직)이 가능했어요.

제가 운이 좋았다고 말한 게 미안한 감이 있는데 신분이 정규직이고 병가휴직을 몇 달 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서 일할 수 있었던 거죠. 저는 고용 안정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재발한 2006년도에는 몇 개월 입원한 겁니까.

“그땐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어요. 그때 그냥 일상생활하면서 있었어요. 입원이나 휴직하지 않고 ‘겨우겨우’였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견뎠습니다.”

-조증 심할 때 정말 민폐 많이 끼치잖아요. 그럴 때는 관계가 회복되기 힘들다고 합니다.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살아야 할까요.

“어떤 사람과는 관계가 회복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과는 예전 관계로 돌아가기 힘들기도 해요. 발병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그냥 체념하고 모른 척하고 살아가야죠(웃음). 제가 (조증 때) 만약 돈을 엄청 많이 빌렸다 그러면 그건 갚아야죠. 그걸 모른 척 할 수 없잖아요.

(사람과의 관계에) 실수했다면 그건 짐짓 눈감고 살아야지 어쩔 수 없어요. 그걸 갖고 괴로워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거 같아요.”

-2001년 조증을 거쳐 2003년 의사로부터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20개월 정도 약을 먹었다고 하는데 조울증은 약을 먹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약을 먹고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들은 적 있는데 조울증이나 조현병이 재발하면 약을 평생 먹는 게 좋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2001년 조증이 발병했을 때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의사가 2003년 안정된 걸 확인하고 약을 끊어도 좋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때부터 2006년 재발하기까지 3년 동안 약을 안 먹었어요.”

-어떤 약을 드십니까.

“저는 라믹탈 100밀리그램, 아빌리파이 2.5밀리그램을 먹습니다. 라믹탈은 상태에 따라서 200밀리그램까지 먹기도 해요. 아빌리파이는 우울할 때 추가로 처방받았어요.”

-조울증이 완치되는 병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럼 평생을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네. 평생 약을 먹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잘 살펴서 조증으로 가고 있거나 우울감이 있다고 생각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적극적으로 의사에게 얘기를 해야 돼요. 제가 원래 라믹탈을 먹다가 4월부터 아빌리파이를 추가로 먹기 시작했는데요.

부서를 옮기면서 일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의사 선생님이 더 추가해 준 거거든요. 당시엔 힘들어서 진료 예약 날짜를 앞당겨서 급히 병원에 갔고 약도 추가로 처방받았어요. 환자들은 자기 상태를 보고 의사에게 적극적으로 얘기해서 도움을 청해야 해요.”

이주현 작가 (c)마인드포스트.
이주현 작가 (c)마인드포스트.

-조증이든 울증이든 핵심은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도 많죠.

“저도 그랬어요. 여러 번 상처받고 기분 나쁘고 그랬죠. 그래도 지금은 좋은 의사를 찾았어요. 좋은 의사를 만나기가 어려운 건, 정신질환뿐 아니라 다른 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정신과 의사는 특성상 만나서 얘기를 많이 해야 되고 의사가 상처를 주면 상처를 받지만 다른 병도 자신에게 맞는 의사를 찾아서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바꾸기도 하죠. 의사를 찾는 데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해요.”

-울증일 때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 거 같은데 결근하거나 지각한 적은 없었습니까.

“힘들 때는 겨우겨우 회사에 가곤 했습니다. 지각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긴 갔죠. 그러나 무단결근은 하지 않았어요. 진짜 몸이 아프면 사전에 연락해서 휴가를 썼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울증일 때 강의실에 안 가기도 했지요. 그러나 학교는 돈 내고 다니지만 회사는 돈 받고 다니는 데잖아요.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죠.”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작가님에게 사랑은 미완의 상처처럼 느껴집니다. 도대체 사랑이 뭘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누굴 만나든지 그 관계는 상처가 남기 마련이죠. 그 사람이 저를 먼저 떠날 수도 있고 먼저 죽을 수도 있는 거고. 아무리 좋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식어갈 수도 있는 거고. 미완의 상처라기보다도 모든 관계는 상처를 남긴다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 상처를 그냥 감내할 것인가. ‘나는 그런 상처 안 받을래’라고 해서 연애도 사랑도 안 하고 그러는 게 옳은 일일까요? 상처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래도 사랑을 하는 거잖아요.”

-진보적 신문사의 기자를 선택한 건 젊은 시절 권위주의 체제를 아파했던 이들에 대한 심리적 죄의식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요. 93학번은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는 학번이 아니었어요. 저는 운동권도 아니었고요. 제 주변을 봐도 당시 학생운동을 안 해서 죄책감을 가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어요. 제가 기자가 된 이유는 세상을 좀 더 알고 싶었어요. 죄의식이 아니라 호기심이 강했죠. 기자는 세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대통령부터 노숙자까지 다 만날 수 있는 게 기자다. 이렇게 생각했죠.”

-신문사 수습기자 시절에 비로소 ‘난 아팠던 것이다’라고 노트에 적었어요.

“수습기자 시절에 조울증은 아니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크게 표나지는 않았지만 약간 조증과 울증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 내가 아픈 연속선상에 있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 아픔이) 일상생활을 저해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큰 병의 맥락에서 봤을 때 내가 계속 아프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던 거죠.”

-정신장애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작가님은 훌륭하게 회복되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보면 밥을 벌어먹고 사는 게 누구에게나 중요하잖아요. 제가 직장을 계속 다니고 있었다라는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모든 걸 잘 극복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운이 좋았고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거 같아요.”

이주현 작가 (c)마인드포스트.
이주현 작가 (c)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 자식을 둔 부모는 작가님처럼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일을 하면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럴 거 같아요. 왜냐하면 자기 앞가림을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게 저의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1기(10대)는 온실, 2기는 질풍노도와 헤맴의 시간, 3기는 조울과 친구 맺는 시기. 황금시대. 나는 지금 3기를 지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4기는 뭐가 될까요.

“4기가 있다면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의 시기가 아닐까.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론 파워스 지음)를 읽었는데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엄청 취재를 많이 했어요. 조현병 아들 둘을 두고 있었는데 한 명은 자살하는 등 아픔이 컸어요.

그런데 파워스는 자기 이야기뿐 아니라 정신질환 관련 법체계, 논문 및 의학 자료, 환자와 그 가족 등등 정말 취재를 많이 해서 썼거든요.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사람들의 삶과 제도, 치료 방법을 망라해서 쓰고 싶어요. 그래서 징검다리의 시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병원 입원 때 의사가 건네준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의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를 읽고 병식을 가지게 됐다고요. 지금 병식이 없는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까.

“정신질환의 어려운 점은 자신이 깨닫기 전까지는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해줘도 잘 몰라요. 어쩌면 정신병이라고 하는 자체가 그 병에 걸렸다는 자체를 모르는 것, 즉 질병인식불능증까지를 포함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병식을 갖게 된다면,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치료 단계에 들어선 거라고 생각해요.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는 책이 좋은 점은 담담하게 병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이에요. 증상들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어서 읽다 보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인생의 굴곡에서 일어나는 일로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너무 공포스럽다거나 자신에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완고한 생각을 버려야 병식을 가질 수 있어요.”

-저는 병과 싸우다가 연애 한 번 못하고 청춘이 다 지나가 버렸다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작가님은 어떻습니까.

“저는 그래도 재밌는 일도 많았고 여행도 다니고, 진짜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그런 건 아니었고요. 결혼을 못 한 거죠. 집도 못 사고(웃음). 가정을 꾸리거나 집을 사거나 그런 세상의 영악한 일들을 못한 거죠. 그런데 그게 꼭 조울증 때문에 집을 못 산 건 아니겠죠.”

-그럼 무엇 때문에 집을 못 산 겁니까.

“경제 관념이랄까, 부동산 감각이 부족해서 그런 거 같아요(웃음).”

-정신건강복지법 같은 법률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잘 모릅니다. 설명을 듣고 싶었어요. 정신건강복지법 때문에 정신병원이 많이 늘어나서 감금되고 폐쇄병동에 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는 정신건강복지법에서의 부양의무자에 의한 강제입원, 입원 유형에서 보호자가 부양의무자이고 형제자매는 안 되는 이유를 물었다. 기자는 알고 있는 것들을 조금 얘기했다. 간단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가 물었다. “박 기자님은 강제입원 당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기자는 답했다. “저는 곱게 입원했습니다. 발병 후 10년 뒤에야 입원했습니다.” “그럼 어려움이 많았겠네요.” 기자는 “인생이 막 뒤집어졌다”고 답했다.)

'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c)마인드포스트.
'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c)마인드포스트.

-책 내용에 조현병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더군요.

“제가 조현병을 잘 몰라서 그래요. 이 책 이야기는 조울의 사막이잖아요. 조현의 사막을 제가 잘 몰라서 저도 궁금했어요. 어떤 식의 증상을 겪는지. 책에서 봤는데 중독에 빠지기 쉽고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 않나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조울증이나 우울증도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그런 증상을 보인다고 했어요. 환청·망상이라고 해서 다 조현병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정신장애인에 의한 사건이 발생하면 사회적 혐오가 더 심해집니다.

“되게 가슴이 아프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르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어쨌든 조울병 환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보지요. 전문가들은 전체 범죄 비율을 보면, 정신질환자의 범죄 비율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혐오가 부각되면서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지죠.”

-언론의 잘못은 없을까요.

“언론의 잘못도 있죠. 선정적인 보도가 있어요. 정신질환자들은 일단 감시하고 가둬야 하는 존재로 그렇게 언론이 쓰는 거 같아요. 저도 진주 아파트 사건(안인득 사건)의 경우 그 사람은 입원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을까 생각은 들어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어쨌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벌어진 사건이고 어떻게 하면 그런 분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좀 더 신중하게 보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인득 사건은 2019년 4월 경남 진주의 임대아파트에서 42세의 안인득이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던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편집주)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 즉 정치적 운동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당사자 운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계기는 책이 나온 뒤 멘탈헬스코리아의 청소년 피어 스페셜리스트들을 만나면서에요. <마인드포스트>는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 당사자 운동이라는 건 어떤 걸 얘기하는 걸까요?

(그는 당사자 운동의 연혁을 질문했다. 그리고 그 단체들과 마인드포스트와의 관계 등을 물으며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잠시 기자가 인터뷰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주헌 작가 (c)마인드포스트.
이주헌 작가 (c)마인드포스트.

-우리의 목표는 치료가 아니라 치유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좀 더 설명해 주시면요.

“비유를 하자면, 치료는 곪은 데가 있으면 도려내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치유는 저처럼 질병이 완쾌되지 못하더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치유는 내가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인데 그 느낌은 단지 아프지 않는 거라기 보다는 다른 차원의 느낌이에요.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 이런 걸 넘어서 어떤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상태. 그게 반드시 다 나아서 그런 건 아닐 거에요. 계속 관리하면서 치유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나이 육십 세쯤 되면 작가님은 뭘 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어려운 질문인데 저는 꿈이 있다면 강변에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끝낸 후 아차 싶었다. 그의 책을 갖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기자는 쓴 입맛을 다셨다. 오후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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