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장애인에게 휴대폰 할인 혜택보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정책을 국가가 만들어야죠”
정지영 “장애인에게 휴대폰 할인 혜택보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정책을 국가가 만들어야죠”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2.03 2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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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금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팀장 인터뷰
고1때 교통사고 후 7년간 집에만 있어...“딱히 슬프지는 않아”
지체장애와 정신장애 가진 중복장애 여성...젠더 폭력에 눈떠
장애인으로, 여성으로, 장애여성으로 삼중 차별 받아
한국장애인연맹·장총련 간부로 일해...“상처받았던 시간들”
장애인 지역사회 삶을 위해 주거와 소득, 활동지원 서비스 연계돼야
권력은 자체로 선을 베푸는 존재 아냐...시민단체 압력 있어야
인권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그게 살아가야 할 조건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신체장애와 정신장애를 모두 가진 여성을 만난 건 이번이 기자 기억으로는 처음이었다. 지인과 술을 마시던 중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며칠 후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가 ‘쿨’하게 받아들였다.

정지영(48) 씨 이야기다. 1990년대 초반, 고등학교 1학년이던 그는 스쿨버스를 기다리던 중 다른 스쿨버스에 치었다. 다행이랄까. 버스 타이어가 그의 몸을 덮치지는 않고 엎드린 가운데로 지나갔다. 병원에서 3개월을 누워 있었다. 당시 척추뼈를 다친 그는 하반신 마비 상태였다.

그러나 병원 정형외과 의사와 간호사는 그에게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을 줬다고 했다. 일 년을 병원에서 생활하던 중, 퇴원을 얼마 남기지 않고 병원에 재활의학과가 생겼다. 거기 의사는 그에게 “앞으로 걸을 수 없고 휠체어를 타야 한다. 그러니 휠체어 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형외과의 판단에 대한 희망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퇴원을 했지만 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학교까지 가려면 언덕을 넘어야 하고 마을버스를 타야 하고 게다가 학교는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가족이 그를 업고 다니면서 공부시킬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자퇴했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희망 없이 집에 물처럼 고여있었다. 그때, 그가 생각한 건 가족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의지 하나였다고 한다.

인간은 원치 않는 고통을 겪으면 운명을 원망하게 된다. 스위스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나눈다. 죽음과 관련된 질환이 발생하면 당사자는 그 결과를 부인하고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병원의 진료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면 그는 자기 운명에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신과 타협을 한다. 단 몇 년이라도 살게 해 준다면 무언가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그렇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고 그는 깊은 우울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우울의 단계를 거쳐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죽음뿐만 아니라 인간이 원치 않는 고통과 절망을 껴안게 됐을 때 자기 삶과의 화해를 위해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건 아닐까 하고 기자는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지영 씨에게 그런 과정 같은 건 없었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의외였다. 기자는 발병했을 때 운명을 깊이 원망했고 자신을 학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는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여야 했을 때 “딱 한 번 울었다”고 했다. 기자는 참 많이 울었는데 말이다.

7년을 집에서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집에 혼자 있을 수 없을 정도의 공황장애를 겪게 된다. 그 장애 정도가 약해졌을 때 그는 집밖으로 나왔다. 정신적 질병이 그를 다시 세상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그는 장애인 운전면허증을 땄고 검정고시를 거쳐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세상에서 다시 발을 떼면서 DPI(한국장애인연맹) 서울지회장,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장총련 사무국장을 1년 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여성으로 신체장애와 정신장애를 모두 겪는 존재가 돼 버렸다.

이후 그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의 금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센터와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전국 자립생활센터 중 유일하게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을 모두 회원으로 받고 있다. 지영 씨를 만난 건 지난달 29일 금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다. 휠체어를 밀고 나타난 그가 건넨 명함에는 자립생활지원2팀장 직위가 적혀 있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후 휠체어를 타게 됐습니다. 당시 어린 나이에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 같습니다.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었고 사춘기 때도 말썽부리지 않고 반항을 한 적도 없어요. 그때는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어요.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가족에게 부담이 안 되게 얌전하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죠.”

-예기치 못했던 사고로 장애인이 되면 보통 몇 년을 집안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어둡게 있지는 않았어요. 책 보고, 텔레비전 보고, 신문 보고, 라디오도 듣고요. 당시에는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 아마 그때 우울증이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어요. 그냥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 정도였어요.”

-슬픔이나 억압을 당하면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마치 슬픔이나 억압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더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억압의 반동적 감정으로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게 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전 식구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어요. 혼자서는 딱 한 번 울었어요. 재활의학과 의사가 ‘앞으로 못 걷는다’라고 말했을 때 딱 한 번 울고 그 다음에는 혼자서도 안 울었어요.”

-신체장애와 정신장애를 가진 중복장애인입니다. 정신장애 판정은 어떻게 받은 겁니까.

“판정을 안 받았어요. 장애인 등록증이 있으니까 (정신 쪽) 판정을 받을 생각도 안 했어요. 정신장애 등록은 소견서에 많이 의존하잖아요. 주치의가 소견서를 안 떼 줄 것 같았고 어차피 신체장애로 등록돼 있는데 등록증이 또 필요할까 싶었어요.”

-신체장애는 등록돼 있는데 정신장애는 아직 등록이 안 돼 있는 건가요.

“저는 주장애가 척수장애, 하반신 마비이고요. 부장애는 고관절 장애에요. 고관절은 척수장애인들에게 욕창이 많이 생기거든요. 그때 관절까지 괴사가 돼서 고관절을 잘라냈어요. 다 지체 안에 포함되니까 사람들이 중복이라고 부는 거 같아요. 장애등록 두 가지를 한꺼번에 했다라기보다는 지체장애인으로 살다가 정신질환을 가지게 됐다는 의미로 얘기를 했어요.”

-정신장애는 어떻게 환청과 망상이 있었던 건가요.

“그게 기질이 있었던 거 같아요. 일을 할 때도 좀 2~3일은 반짝 일하다가 하루 이틀 정도는 축 처져 있고요. 일을 한번 시작하면 몰아쳐서 하다가 또 쉬고 그런 게 주기적으로 반복됐거든요. 전에 일하던 단체에서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자려고 눈을 감으면 사람 얼굴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고 했어요.

사람들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가위눌리는 거라고 얘기해요. 그런 얘기를 많이 해서 제가 치료 시기를 놓쳤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병원에 갔으면 어땠을까.”

-약은 어떤 걸 복용하고 있습니까. 신체·정신 약물이 많은가요.

“약을 되게 많이 먹어요. 조울증이니까 데파코트 먹고 우울증이니까 라미탈 먹어요.”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신체장애와 관련해서는 약을 드십니까.

“신체는 약을 안 먹어요. 하반신 마비 척수장애인증후군 중에는 강직이 심하신 분들이 있거든요. 다리에 강직이 있거나 통증이 있는 분들은 진통제나 이완제를 많이 먹는데 저는 거기까지는 아니에요. 그래서 약을 안 먹어요.”

-조울증이라고 했는데 의사가 진단한 겁니까.

“2016년에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로 진단받았어요. 그 전에도 비슷한 증세가 있었는데 제가 증상을 사람들한테 얘기한 게 2011년 무렵이었어요.”

-정신병원 입원을 몇 살 때 하신 건가요.

“44살요.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한 달 있었어요. 주변에 정신장애인 당사자 리더들이 저의 증상을 알고 있었고 조언을 많이 해 줬어요. 한 달 입원하고 지금은 이 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병원에 다녀요. 약을 많이 먹어요. 자기 전에 10알 정도 먹고 아침에는 2알 먹어요. 아빌리파이하고 아티반요.”

-장애인연금은 나오는 건가요.

“장애인연금은 소득에 비례해서 나오기 때문에요. 제가 직장 생활하니까 연금은 안 나오고 장애수당만 6만 원 나와요.”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고 있습니까.

“생활비는 여기 센터 급여가 220만~230만 원쯤 돼요.”

-많이 받으시네요. 놀랍습니다.

“여기 센터 정직원이라.”

-선생님을 세상으로 나오게 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계기가 아이러니하게 공황장애 때문이었어요. 7년 동안 집에만 있었는데 친구들이 대학교 생활을 할 때는 괜찮았는데 그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나이가 되니까 제가 이게 뭔가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났어요. 병원에서 정확하게 진단 받은 건 아닌데 생각해 보면 공황장애 증세가 나타나서 주변의 도움으로 밖으로 나왔어요. 그때 나와서 장애인 운전면허증을 땄어요.”

-공황장애가 오면 집 바깥으로 못 나가지 않나요.

“그때 증세가 집에 저 혼자 못 있는 거였거든요. 느닷없이 온몸이 저리고 죽을 거 같은 증세가 있었어요.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그게 공황장애더라고요. 약물 치료가 가능한 질환이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어느 날 그 증세가 없어지더라고요. 그 후 세상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25살 정도에요.”

-선생님은 신체장애인이고 정신장애인이고 여성입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약자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죠. 또 비혼(非婚)도 들어가잖아요. 결혼 안 했으니까. 여러 가지가 교차하면서 가장 낮은 약자의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으니까 저는 체감을 많이 못 했어요. 장애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약자로써 차별을 받는데 저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고 이해를 해 주니까 차별을 체감하기는 어려웠어요.”

-젠더와 장애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볼 수밖에 없겠지요. 이 세계는 어떤 곳이던가요.

“차별적이죠. 미투 운동이나 공직자 성추행 사건을 보면 우리나라의 성 인지 감수성이 한참 떨어져 있는 거 같아요. 젠더 문제에 인종, 다문화, 장애가 들어가고 빈민층도 들어가고요. 그러면서 다중 차별이 오는 거죠.

우리 사회는 한 사람을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그 사람이 처한 환경들로만 보니까 차별이 심해요. 장애인으로서 차별받고 여성으로서 차별받고, 그게 합쳐져서 장애여성으로서 차별받죠. 세 가지의 차별이 생기는 거죠. 한 가지를 갖고 차별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하나씩 차별하거나 섞어서 차별하기도 해요.”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DPI(한국장애인연맹) 서울지회장,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장총련) 사무국장으로 일했더군요. 선생님은 신체장애 운동에 노력을 기울인 거 같습니다. 정신장애 운동이 그만큼 약하다는 의미일까요.

“정신장애 운동이 시작된 지가 얼마 안 됐잖아요. 신체장애 운동이 먼저 시작되다 보니까 제가 처음 일을 했을 때는 신체장애 운동에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이 2000년 초에 시작됐습니다. 그때부터 활동을 해 온 겁니까.

“그때는 장애계의 이슈가 자립생활 운동에 있었기 때문에 저도 같이 묻혀 간 거지 자립생활센터를 통한 장애인 운동은 아니었어요. 자립생활 이념을 전파하는 활동을 했어요.”

-DPI나 장총련 외에 따로 활동한 곳이 있나요.

“아뇨. 없어요. DPI 서울지부에서 간사로 출발했고 2015년 서울지회 회장까지 했어요. 장총련은 2015년 가을부터 해서 2016년 가을까지 하고 입원을 해서 퇴사했어요.”

-왜 입원했습니까.

“저는 DPI 중앙 조직이 좀 더 이슈에 민감하고 대중에게 가까운 조직이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서울지부이다 보니 중앙 조직을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DPI 중앙회장 선거에 나갔는데 엄청 깨졌죠. 선거에 떨어지고 DPI 서울지부장을 맡게 됐는데 그때 스트레스가 좀 컸어요. 선배들이 저를 못살게 굴었거든요. 어린 것이 감히 선배들 선거하는 데 나왔다며 괴롭혔어요.

그래서 제가 DPI 서울지부 조직을 해산했어요. 조직 활동을 할 수 없게 압박과 압력이 들어오니까 차라리 문을 닫는 게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제가 14년을 몸담았던 조직이 변질되는 게 싫었어요. 회원들도 같은 의견이었고요. 많은 회원들이 그만두게 되면서 임시총회해서 문을 닫았죠. 그때 충격이 있었고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표출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냥 그렇게 있었어요.

DPI 서울지부 해산하고 6개월 후에 장총련에서 같이 일하자고 해서 갔어요. 1년 일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장총련을 그만 뒀죠. 병원에 한 달 있었어요.”

-사람에게 상처 받으니까 어떻던가요.

“절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이기적이던가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기적인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다양하죠. 제 주변에 있던 분들은 대부분 좋은 분들이어서 오래 같이 일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일부 선배들이 저를 예쁘게 봐 주지 않아서.”

-금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정신장애와 신체장애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입니다. 이런 유형의 센터는 한국에서 거의 없죠. 어떻던가요. 정신장애와 신체장애가 어울리는 곳의 장점이 많던가요.

“지금은 같이 있는 단계에요. 여기 정신장애인 자조모임이 생겨서 오는 정신장애인들은 10명쯤 돼요. 서로 다른 유형의 장애인들이 모이는 곳이니 장점을 만들고 찾아야 할 거 같아요. 정신장애 자조모임 회원들 중에서 환청 증세가 나타났을 때 우리 활동가들이 이해했을 때 장점이 나타나는 거겠죠. 지금은 서로 이해하려고 하는 단계에요. 정신장애인과 함께하는 센터니까 저희 직원들이 가장 세미나를 하고 싶어 하는 주제가 정신장애에요.”

-직원 중에 정신장애인은 선생님 혼자인가요.

“정직원은 저 혼자고요. 구청에서 지원하는 공공 일자리가 있어요. 그 일자리를 가급적 정신장애인들만 채용을 해요. 지금은 정신장애인 4명이 복지와 전일제 일자리를 얻어서 일하고 있어요.”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장애인복지법 15조 폐지 운동을 정신장애 운동 진영뿐만 아니라 장애인자립생활센터도 요구를 하며 집회를 하더군요. 이를 사회적 연대로 해석해야 할까요.

“운동의 확장이라고 생각해요. 정신건강복지법 생기면서 장애인복지법 15조에서 정신장애인의 복지 서비스를 제외시켰는데 처음에는 눈에 안 거슬린 거죠. 신체장애인들은 그냥 이런 법이 생겼네 하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정신장애 운동도 같이 커지다보니까 차별조항이라는 게 딱 꽂히는 거예요.

소아마비 장애인들의 경우 처음에는 뇌성마비 장애인들이나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을 이해를 못 했어요. 중증장애인을 잘 이해를 못 하니까 장애인 이동권의 중요성을 몰랐던 거죠. 그런데 중증장애인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동권 운동을 소아마비 장애인들도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발달장애인도 마찬가지로 유형별로 걸리기 시작한 거죠. 또 저희 단체는 뇌전증 장애 문제까지 레이더에 걸렸고요. 그래서 운동의 확장과 연대라고 생각해요.”

-신체장애인은 협력하고 단결하는 부분이 강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정신장애는 질환적 특성 때문에 뭉치지 못하고 흩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체와 정신 양쪽을 겪으면서 이 같은 문제가 보이던가요.

“신체장애인들은 딱 눈에 보이는 장애거든요. 자기 정체성을 숨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더 결집을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정신장애의 경우에는 숨길 수 있는 장애잖아요. 그리고 정신장애인이라고 밝히는 걸 꺼리는 분들이 많죠. 사회에 정체성을 드러내기가 어려운 장애이기 때문에 뭉쳤다 흩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싶어요.

인자가 있어야 운동이 조직이 되는데 정신장애인 당사자를 발굴하기가 어려워요. 발굴을 하려고 해도 누가 정신장애인인지 모르니까.”

-부양의무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고 있습니다. 사회가 이성을 통해 선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명제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별로 동의가 안 돼요. 이성을 통해서 선한 방향으로 나간다기보다는 타협을 통해 권력이 움직이는 게 아닐까요. 권력이 나눠줄 수 있는 만큼만 주는 거죠. 부양의무제도 단계적으로 폐지되는데 권력이 먼저 이래야 한다고 해서 된 게 아니라 시민단체들의 압력으로 이슈화 되면서 폐지되는 거잖아요.

화끈하게 폐지되는 게 아니라 단계적으로 폐지된다는 건 자본을 가진 국가의 기획재정부 쪽에서 예산을 투여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관련돼 있어요. 폐지가 되면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날 건데 거기에 대한 예산이 더 필요한 거죠. 예산을 분배하는 건 권력자들이 하는 것이지 이성에 의한 선한 의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겁니까.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는 세상.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세상.”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아뇨.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웃음). 관심이 없어요.”

-기억에 남는 투쟁의 기억이 있을까요.

“투쟁을 하거나 이슈 파이팅을 할 때 역할 분담이 있잖아요. 저는 뒤로 빠져서 ‘서포트’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정말 분노했던 건 이동권 투쟁할 때 시민들이 비웃었거든요. 저희가 철로를 막으니까 시민들이 욕을 하고 비난했어요. 분노라는 게 이런 건가 생각이 들었죠.

또 하나는 사람들은 전동휠체어를 나라에서 무료로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세대의 장애인들은 전동휠체어 살 때 일정 금액을 나라가 지원해 줘요. 그런데 그 일정 금액을 의료보험에서 지원받기 위해 싸우고 투쟁했다는 걸 몰라요. 저희가 건강보험공단을 점거한 적이 있어요.

체계적으로 공청회도 열고 당사자의 수기도 발표하고 객관적 자료도 내놓아도 안 되니까 마지막에 한 게 건강보험공단 출입문을 ‘빠루’로 부수고 이사장실을 점거한 거였어요. 다 끌려나오긴 했지만 그 뒤로 건강보험의 확대 적용이 된 거예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사회적 약자라는 동정과 시혜의 시선을 비판했습니다. 그럼 사회는 우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동정과 시혜의 시선으로 보면 안 되죠. 저희는 권리를 가진 인격체이고 사회적 약자예요. 동정과 시혜는 한계가 있어요. 시혜의 시선으로 접근하면 정책에 반영되지도 못하고 일회성으로 끝나요. 사회적 약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안 돼요.

저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이 불쌍하고 안돼 보여서 측은지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 같이 근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죠. 휠체어를 밀어주는 분도 동정으로 밀어주는 것이 있고요, 아니면 정말로 언덕길 때문에 제가 힘들어 하는데 함께 밀어주는 부분이 있어요.

어떤 시선으로 행동을 하느냐가 다른 거니까 사회적 약자를 동정과 시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비판했어요. 장애인 혜택으로 할인 정책이 많잖아요. 서비스 기반을 마련하기보다 휴대폰 요금 감면해주고 지하철도 공짜로 탈 수 있게 하고요. 그런데 그런 것보다는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직접적인 정책들을 국가가 만들어야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런 정책이 나오려면 동정이나 시혜로는 어려워요.

장애인도 부자 장애인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지하철 할인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장애인이라고 받는 시선은 똑같아요. 또 편의 시설이 안 돼서 어디를 못 가는 건 부자 장애인이든 가난한 장애인이든 똑같거든요. 그걸 할인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동정의 마음이자 시혜자적 서비스인 거죠.”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센터에서 담당하는 부서는 뭔가요.

“정신장애인 자조모임 담당하고 있어요. 지금 10명 정도 나와요. 나와서 얘기도 하고 책도 보고. 작년에는 과일청 같은 것도 같이 만들어보고 스피치 교육도 들어보고.”

-한 중증장애인은 자신이 탈원화를 하게 만든 이유는 ‘자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는 건 자유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인권의 테두리라는 말을 좋아해요. 인권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 그게 살아가야 할 조건 아닌가요.”

-현재 발달장애와 중증신체장애인은 시설을 나오지 못하고 있죠. 이들을 위한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요.

“지역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주거와 소득의 문제, 활동지원 서비스 문제를 연계해야겠죠. 그래야 나올 수 있잖아요. 시설은 본질적으로 억압적 분위기예요. 그래서 시설 장애인들에게 자립생활이 얼마나 행복하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지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가 밖으로 더 분출되면서 국가에 압력을 넣을 수 있겠죠. 절박한 마음들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사회 인프라를 만들어나가야 해요.”

-선생님은 국가에 무엇을 가장 요구하고 싶습니까.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나라요. 자유를 추구해도 괜찮은 나라. 가난해도 괜찮고 장애인이어도 괜찮고 정신장애인이어도 괜찮은 나라. 우리가 태어나는 걸 선택할 수는 없지만 태어난 그대로 살아가도 안심할 수 있는 나라요.”

-최중증장애인과 발달장애인, 중복장애인은 탈시설 정책보다 소규모 그룹홈으로 시설이 전환돼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그럼 예산이 소규모 시설로 너무 많이 들어가요. 시설을 소규모화한다면 또 건물을 새로 짓거나 그룹홈을 만들거나 관리자를 둬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잖아요. 시설을 폐쇄하고 장애인들이 지역에 나오고 활동지원 서비스와 주거지원 서비스를 받고,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확충하는 데 돈이 들어가야죠.

올해 예산에도 장애인들이 체감할 수 있는 자립생활 서비스 예산보다 시설에 투입되는 돈이 훨씬 많아요. 장애인시설도 마찬가지고요. 정신병원도 소규모화한다고 하는데 큰 집을 작게 쪼개봐야 돈이 계속 들어가잖아요. 그 예산의 물길을 지역사회로 돌려야 하는데 저는 소규모화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선생님은 장애인으로 살아온 인생에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몇십 배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몇 배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은 맞지 않아요. 저는 사회적 환경을 바꾸기 위해 단체에서 활동했고 그게 조금이라도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를 했다면 사람들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몇십 내의 노력을 안 하고도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겠죠. 그 몇 배의 기준이 뭔지도 애매해요.”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다, 혹은 장애는 개성이라는 주장이 사회의 불평등을 편견 없는 태도로만 해결하겠다는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다’라는 거예요. 비장애인도 사고가 나서 중도장애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 아니냐라는 얘기를 하죠. 저는 모든 사람은 아플 권리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장애인이 돼도 장애로 인해 사회적 삶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돼야죠.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다라는 말은 아닌 거 같아요.

장애인이 돼도 상관이 없는 사회가 돼야죠. 장애를 개성이라고 하면 장애만 개성이 되잖아요. 그 장애인은 또 다른 개성이 있을 거잖아요. 그런데 장애로 퉁쳐버리는 거죠. 그럼 그들이 가진 개성은 묻혀 버려요.”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씨 (c)마인드포스트.

-선한 척하는 동정과 시혜의 시선이 바로 폭력이라는 의미일까요.

“네. 선(善)의 길의 끝에 악(惡)이 있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어요. 선한 마음으로만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에요. 너는 선해야 하고 착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자체가 폭력 아닐까요.”

-선생님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뭘까요.

“저요?(웃음) 세속적으로는 잘 살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밖에 없죠. 그런데 저는 호기심 아닐까 싶어요. 늘 세상이 궁금해요. 이 사람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했을까. 아니면 국장님이 왜 나랑 인터뷰를 하자고 했을까, 그런 것까지 다 호기심이에요.”

-선생님한테 인생은 어떤 의미입니까.

“저는 운동가라고 하기엔 좀 부끄러워요. 저에게 인생은 살아가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자라는 것이에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요.”

그는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이 있다. 인터뷰 도중 “1급은 한번 도전해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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