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연의 번역과 해석] 이번 여름에 경험한 정신병원 강제입원 이야기(캐시디 윌슨)
[송승연의 번역과 해석] 이번 여름에 경험한 정신병원 강제입원 이야기(캐시디 윌슨)
  • 송승연 기자
  • 승인 2021.12.05 2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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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저자가 시카고대학 정신병원을 직접 경험한 개인적 이야기다. '시카고 마룬' 편집자들은 시카고대 캠퍼스 경찰이 저자의 거주지로 방문한 것, 저자가 다양한 정신과시설에서 체류한 것, 저자가 입원되는 과정에서 친구와 가족과 소통한 것, 입원 이후 대학과 소통한 것 등이 이야기의 세부 사실들을 확인했다.
Stella Bevacqua / (c) The Chicago Maroon
Stella Bevacqua / (c) The Chicago Maroon

이번 여름에 경험한 정신병원 강제입원 이야기(캐시디 윌슨)

환자를 돌보는 데 실패한 정신과 시스템에 대한 신경과학 전공 대학생의 고찰

우리의 현재 문화는 소위 ‘정신과적 개입’에 대한 경험,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트라우마에 대해 침묵하도록 만든다. 정신과적 개입을 당하는 당사자들에 대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낙인과 편견 때문에, 그러한 개입은 치료시스템이라고 주장되고 있으며, 그 개입으로 인해 어떻게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생존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외치는 것은, 사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정신과적 개입의 영향에 대해 ‘당사자들의 이야기’와 ‘현실’ 사이에는 극명한 간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과 생존자들(psychiatric survivors)은 사회에서 어느새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사자에 대해 협소한 개념을 가지게 된다.

트라우마를 안겨준 정신과적 개입에서 살아남은 당사자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낙인의 힘’ 때문에 경험을 이야기해도 묵살되며, 이는 ‘의료적 선의’라는 담론이 유지되도록 해준다.

2021년 6월, 나는 내 의지에 반하여 시카고대학 정신과병동에 강제입원 당했다. 다양한 사람들(정신건강 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포함해)과 이 경험에 대해 논할 때, 종종 그들이 놀라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정신의료기관이 환자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내 경험이 그들의 기대와 완전 달랐기 때문이다.

UCPD(시카고대 캠퍼스 경찰)가 내 집 문 앞으로 온 순간부터,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치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대학에서 정신의학 윤리와 병리화의 교육학에 중점을 두고, 신경과학과 인권을 공부하고 있다. 전공 관련 주제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정신과 시스템이 도움을 주고자하는 환자들에게 너무 자주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정신과적 시설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환자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 당시 겪은 일을 비인간적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처음 정신병원에 도착했을 때와 비교했을 때 더 악화된 정신적 상태가 되어 나오게 됐다.

불법적이거나 시설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은 없었고, 정신과 시스템 안에서 모든 종사자들은 자신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소위 ‘치료’를 위한 시스템은 ‘책임’으로부터 의료진과 기관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의 삶을 더 개선하기 위한 개입을 시행하도록 설계돼 있지 않다.

이 이야기는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다.

지난 여름 어느 금요일, 내가 일하고 있던 시카고대 신경과학 랩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됐고, 이는 정신과 시스템에서 받은 이전의 트라우마에 대한 재경험(flashback, 트라우마의 전조증상)을 불러일으켰다.

토요일 아침, 나는 여전히 정신적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건강전문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권유한 방식을 따랐다. 스스로 위기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했다. 캠퍼스 밖에 위치한 내 아파트의 침실에서 학생상담서비스에 전화를 걸었고, 지금 느끼는 감정 때문에 상담원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전화 상담을 하면서, 정신과 병동에서 겪은 이전의 트라우마가 된 경험들이 위기를 촉발시켰고 이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상담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을 때, 문을 격하게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문을 부숴버릴 것만 같아서, 달려가 얼른 문을 열었다. 4명의 남성 UCPD 경찰관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잠잘 때 주로 입는 셔츠뿐이었다.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울고 있었으며,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도 계속 울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 화가 났고 이를 표출했지만, 그것은 즉각적인 위험(imminent danger·강제입원 요건 중의 하나인 자·타해 위험성을 의미)은 아니었다.

한 경찰관이 나에게 침실에 있는 접이식 의자에 앉으라고 말했다. 바닥에 잠옷 바지가 놓여 있었고, 셔츠만 입고 노출되는 것이 불편해 바지를 입었다. 다른 경찰관은 아직 상담원과 통화하고 있던 내 전화기를 빼앗아 가져갔고, 결국 상담원과 통화는 종료됐다.

어떤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만큼 충분히 관찰했다고 생각했고, 곧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방 안을 돌아다니던 경찰관이 다가와서는 일어나 뒤돌아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따라 뒤로 돌았을 때, 그들은 내가 저항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가 달라는 요청도 없이 수갑을 채웠다.

그들은 나를 문 쪽으로 데려갔다. 집 열쇠를 가져가도 되는지 물으면서 그 쪽으로 다가갔지만, 그들은 나를 제지했고 다른 경찰관이 열쇠를 챙겼다. 그들은 나를 아래층으로 데려갔다. 건물 밖에 있었던 4대의 순찰차 중 하나에 나를 태웠으며, (집에는 들어오지 않고) 밖에 머물고 있었던 여성 경찰관과 함께 타는 것이 더 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성별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남성들이 내 집에 들어와 방 안을 수색하고, 내 몸을 만졌던 순간부터 이미 없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묻는 내게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수갑이 너무 꽉 조여서 손가락의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고, 이를 그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응급실(ER)로 들어갔을 때 수갑을 풀어주었다. 내 옷을 가져가고 환자복을 주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물과 정보들을 요청했지만, 둘 다 받지 못했다. 최악의 악몽이었다. 반복되는 트라우마 때문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제 나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바로 그 환경, 즉 정신과 병동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몇 시간 후, 몇몇 의대생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들어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건강 관련 역사들을 공유했으며,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상담사 및 정신과 의사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에게 나는 정신과 생존자이면서, 동시에 성폭행 생존자이지만, 적극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애초 나는 플래시백(트라우마에 대한 회상) 때문에 정신적으로 괴로운 상황에 놓였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정신적 고통은 이제 온종일 경험한 ‘신체적 자율성’에 대한 반복된 침해, 그리고 최악의 악몽을 겪음으로서 생겨났다.

이 순간에도 나는 그들이 퇴원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적절한 말을 하고, 안전한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정신과적 치료를 잘 받았던 경험들을 보여줌으로서, 안전한 퇴원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중 그 어떤 것도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의대생 중 한 명이 마침내 물을 작은 컵에 담아 건네주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정신과 의사가 와서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울부짖었다.

나에게는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이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환경이고, 입원으로 발생하는 신체적 자율권 침해는 오히려 정신건강에 피해를 준다고 다시 한 번 설명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 정신과 의사는 떠났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그들은 차트에 있는 의료기록을 해석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조금 쉬기 위해 차가운 타일이지만 바닥에 누웠다. 누군가 지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누워 있으면 안돼요.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진정제를 투여할 거예요.” 바로 일어났고, 방 건너편 데스크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러 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알게 되면 기분이 나아진다(정보를 얻는 것을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권장 받은 방법이다). 그래서 그 직원에게 물어보고, 또 말을 걸고, 그리고 다시 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누군가 나에게 “직원들의 시간을 독점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진정제를 알약으로 복용할 것인지, 아니면 주사로 맞을 것인지 물었다. 알약으로 복용하겠다고 말했고, 그제야 그들은 나에게 물을 주었다.

진정제 효과가 약해졌을 때, 간간이 깨어나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전화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가끔은 직원들이 허락해주었지만, 거부할 때도 있었다. 허락이 되면 친구나 어머니에게 연락해서 내가 어디에 있고, 무슨 상황에 놓여 있는지 설명할 수 있었지만, 외부와 접촉할 기회는 제한되어 있었다.

일요일에 정신과 의사가 와서 정신과병동에 병상이 마련되기 전까지 여기에 더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다. 할 일도 없었고 이런 환경에서 깨어있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최대한 자려고 노력했다.

직원들은 응급실에 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를 위층으로 옮기는 것에 이야기했다. 응급실에는 화장실이 있었지만 휴지는 없었다. 그리고 화장실을 사용 중일 때 문을 닫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Sofia Capua Montoto / (c) The Chicago Maroon
Sofia Capua Montoto / (c) The Chicago Maroon

월요일 새벽 1시쯤, 약 37시간 동안 응급실에 갇혀 있다가 병원 내 다른 병실로 옮겨졌다. 이제 창문이 있는 방에서 머무르게 되었지만, 하루 종일 나를 관찰하는 간호조무사도 같이 부여됐다. 간호조무사는 오전 7시쯤 교대 근무를 했다.

응급실에서는 양치질을 할 수 없었지만, 여기서는 관찰 받으면서 양치질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칫솔을 주었다. 샤워도 할 수는 있었지만, 간호조무사가 상시 나를 지켜봐야 했고, 비누를 직접 들 수도 없었다.

샤워를 하는 동안 내가 비누를 들고 있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 간호조무사는 당신이 그 비누를 먹을 수도 있다고 말했고, 그 때 다른 누군가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들은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지”라고 말했다. 지금 내가 무슨 문제에 놓여있냐고 물었지만, 간호조무사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월요일 오후 5시경, 어떤 한 정신병원에 병상을 하나 마련했고, 구급차로 이송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구급차 이용비에 대한 나의 걱정은 무시됐다. 추후 (보험 처리가 되었지만) 구급차 이용비로 792달러 청구서를 받았다.

일리노이주 하비에 있는 잉걸스 메모리얼(Ingalls Memorial) 병원까지 차로 30분 정도 이동했다. 도착했을 때 식사 시간이 지나버려, 아침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도착한 날 물이 나오지 않아서 샤워도 못하고 손도 씻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할 수 없이 잠을 청하려 노력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와 담요는 불편했고, 수면제가 필요했지만 이용할 수 없었으며, 사람들은 15분 정도마다 한 번씩 방에 들어왔고 가끔은 들어올 때 불을 켜서 확인하곤 했다.

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병동에 있는 종사자한테 물이 나오는지를 물었다. 그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나는 병동을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누군가 다가와서 어떤 서류에 서명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병동에 들어오겠다고 서명하지 않았기에 그 말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내가 “특정 청원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여기를 떠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여기에 서명을 해야 한다는 답이 왔다.

내가 지난 3일 머무르면서 혹시 놓쳤던 중요한 것이 있었는지 물었고, 그녀는 없었다고 말했다. 나에게 권리가 있는지 물었고, 그녀는 있다고 답하며 서류 한 장을 주었다. 그 서류 첫 번째 줄에는 환자가 서명하면 퇴원에 대해 요청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이 점을 지적하자, 그녀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하며 서류를 가져갔다.

정신과병동에 5일을 머문 후에야 서명을 하고 퇴원을 요청할 수 있다(그 5일에는 평일만 포함되고 주말을 포함되지 않는다). (서명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정신과병동에 들어왔기 때문에 굳이 다시 서명할 필요가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서명을 한다면 당신의 의견이 더 잘 반영될 것이라 답했다. 평일 기준 5일이 지나면, 퇴원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기에 서명을 한다면 전문가들에게 협력하겠다는 의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빨리 퇴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서명을 하라고 부추겼다.

서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기에, 결국 서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즉 여기에 서명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가 무엇에 ‘동의’한 것인지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공식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론적으로 보면 정신병원은 기분을 더 나아지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입원 이후, 그 어떤 것도 나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정신과병동에서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에 30분씩 두 번 진행되는 ‘치료’ 그룹이 있었지만, 때로는 이것이 아예 진행되지 않는 날들도 있었다. 집단치료에서는 뭘 했을까? 한 번은 건강한 식습관에 관해 다루었는데, 그들은 어떤 음식들이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얼마나 좋지 않은지 설명했으며(그 음식들에는 병동에서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신경전달물질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어떤 집단치료에서는 다 같이 정신질환에 대한 WebMD(주류적 의료매체) 기사 인쇄물을 읽었다. 어떤 그룹 시간에서는 안뜰에 나갈 수 있었는데, 이때가 아니면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병동에 있으면서 운이 좋다면 정신과 의사나 사회복지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화요일에 정신과 의사를 만났다. 그는 처음 들어갔던 응급실에서 현재의 정신병원으로 연계되는 것이 오래 걸린 이유로, 응급실에서 나와 같이 있었던 의료팀이 있는 병원으로 입원하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정신병원으로 와서 응급실에 같이 있었던 종사자들과 어떠한 교류도 없었으며, 여기서 새롭게 만나는 의료진들 또한 이전의 의료진들과 소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여기 와서 만나는 의료진들과 대화할 때마다 계속 반복해서 나의 상황을 설명하게 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와서 새로운 정신과 의사를 만났지만,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토요일에 상담원과 통화한 내용에 대해서만 물었고, 그 이후 일어난 일이나 내가 여기 오기 전 다른 의사들에게 한 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의료진 중 누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가장 안 좋은 것은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이며,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질 때라고 전달했다. 병동에서 사회복지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입원병동은 나에게 최악의 지옥이라고 말했다.

감각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며칠 동안 내 속옷 없이 생활했고, 삶의 즐거움이나 위안을 주는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수많은 사소한 모욕, 비인간화, 병리화, 유아화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있는 지금의 환경은 내가 시카고대 학생정신건강서비스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설명한 ‘트라우마가 되었던 그 환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정신병원에서 보낸 시간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빨리 퇴원하기만을 바랐다. 수요일에 다시 사회복지사를 만났고 퇴원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물어봤다. 그 사회복지사는 어제 당신과 이야기했기 때문에 오늘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면서 거절했다.

여기서 지내는 이 며칠은 비참했다. 매우 지루했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고, 내 옷이나 속옷도 가질 수 없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언급할 때마다 그저 ‘가벼운 문제’로 치부됐다. 그리고 외부와 접촉이 제한돼 있었다. 전화 사용 시간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일정이 항상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전화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전화번호가 다른 주 번호라서, 간호사실에 있는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주고 바꿔주어야 했는데, 전화를 할 수 있는 시간에서도 그들은 미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만약 전화 통화 시간 외에 누군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면 그것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수요일 늦은 오후, 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세 번째로 또 새로운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내가 이전에 말했던 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의사는 토요일에 있었던 전화 상담에 대해 다시 물었고, 그 일이 마치 방금 일어난 것처럼 나를 대했다.

나는 다시 이전에 다른 의사들에게 했던 이야기들을 요약해서 전달했고, 지금까지 여기서 보낸 시간이 어땠는지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여기를 나가고 싶었고,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들은 퇴원시키기 위해선 ‘부가 자료들을 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나중에 퇴원한 이후 이것에 대해 더 알아본 후에야, ‘부가 자료들’이라는 게 나와 질환에 대한 정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정신병원이 치료 및 퇴원 계획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학의 학과장과 이야기할 수 있게 정보 공개에 서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대학생상담센터를 통해 입원했기 때문에, 어차피 학교는 이미 정신과병동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4일 동안 정신과병동에 머무르면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를 ‘한 사람’으로서 대해주는 이는 없었으며,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사이에 많은 불일치가 있음을 느꼈다.

응급실에 있을 때 본인의 명확한 동의 없이는 약물을 투여하지 않을 거라고 들었지만, 어느 순간 간호사가 내게 다가와 동의 없이 주사를 놓은 적도 있었다. 그 주사는 비타민B였지만 이러한 행위는 당사자의 완전한 동의와 이해 없이는 어떤 약물도 투여하지 않겠다는 이전의 약속이 헛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 주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맞았을 뿐이다. 심지어 각 종사자들이 개별적으로 방침과 절차를 준수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환자에게나, 혹은 나에게나 도움이 될 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심지어 절차를 따르기 위해 돌봄의 상실을 감수하기도 하였다.

정신건강에 가장 좋지 않은 상황들에 정확하게 노출됐다. 정신과병동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됐는지에 상관없이 같은 공간에 거주했으며, 같은 치료 그룹에 들어갔다. 가정 내 폭력으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 중독에서 회복 중인 사람, 그리고 자신이 병동에 왜 갇혀 있어야 하는지 진심으로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각자는 각자의 환경, 각자의 개성, 심지어 우리의 인간성에도 거의 신경을 두지 않는 관료적 체계에서 똑같은 개체로서 취급됐다.

목요일이 됐고, 이제는 퇴원할 수 있을 거라 낙관했다. 여기에 있는 게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졌다.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왜 나에게 최악의 일인지,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는지, 여기에 나를 가둬놓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며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었는지, 그리고 내가 여기를 나갈 수 있을 만큼 얼마나 안전한 상태에 있는지 등에 대해 거듭 호소했다.

부가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이 상황이 내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인식했고, 나와 유사한 감정을 표출했다. 게다가 당시 나는 응급입원의 표준 시간인 72시간을 넘어 억류돼 있었다. 사회복지사에게 이제 퇴원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다음날 퇴원이 될 거라고 답했고, 실망감을 느꼈다.

이 날 집단치료 중에 정신과 의사와 의대생들이 나를 옆으로 불러냈고, 이제 곧 퇴원될 거라고 말했다. 4시간 정도 지난 후 그들은 우버를 불렀다. 환자복을 벗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베이비 샴푸, 화장지, 여기 있으면서 축적된 다양한 서류들 등으로 구성된 소지품을 챙겼다. 내 신발과 다른 소지품들도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우버가 도착할 때까지 주지 않았다.

입원되어 있었던 토요일 오전부터 목요일 저녁까지, 치료사 혹은 상담사 혹은 최소한 그들 중 하나로 식별될 수 있는 그 누구와도 대화한 적이 없다(입원의 원인이 된 전화 상담 외에는 말이다). 입원할 때부터 퇴원할 때까지 치료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

일어난 일은 입원 절차가 시행되고 준수되는 것뿐이었다. 토요일이나 퇴원하게 되는 목요일 저녁이나, 실질적으로 더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건강은 훨씬 더 안 좋아졌다.

그들이 마침내 내가 자해 위험이 없다고 믿어서 퇴원을 시킨 것인지,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기에 충분하다고 결정할 때까지 임의적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것인지 모르겠다. 비록 퇴원 이후 마음이 놓였지만, ‘나아졌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으며, 강제입원 경험의 후폭풍도 겪어야 했다. 내가 이 과정에서 겪은 경험들과 영향들은 정신건강시스템의 정책, 절차, 알고리즘 사이에서 어느새 사라졌다.

내가 알기로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불법이 아니었으며, 모든 종사자는 정신과 시스템 안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내가 겪은 일은 시카고대학 정신병원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불행은 지금도 미국 전역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정신과 시스템에 대한 이전의 경험들, 그 경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관심, 그리고 신경과학 학생이자 연구원으로서의 관점 때문에, 나는 강제로 이루어진 개입으로 발생하는 트라우마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을 알고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정신과적 트라우마의 생존자들’과 관련해 무엇을 논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대우하고 있는지에 대해 진지한 의문이 제기되기를 바란다. 그 누구라도 도움을 요청하는 바로 그곳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며, 그들의 경험이 일반적인 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묵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출처: https://www.chicagomaroon.com/article/2021/11/9/forefront-medicine-summer-involuntary-hospit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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