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형국 “판사 수 부족 때문에 사법입원제 시행 불가능?...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는 사람들의 주장이죠”
염형국 “판사 수 부족 때문에 사법입원제 시행 불가능?...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는 사람들의 주장이죠”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3.01.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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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인터뷰
방황했던 대학시절, 이후 의미있는 삶 위해 변호사 자격 필요하다 생각해
사법연수원 시절,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대표 강연 듣고 공익활동 관심
공익변호사 1호 타이틀 부담스럽지만...해야 될 삶의 역할로 생각해
첫 정신병원 방문 후 문제의식 가져...신체장애시설보다 더 열악해
장애운동계에서도 정신장애 문제 관심 안 가져...장애운동의 한계라 생각돼
정상성에 부합 안 되는 정신장애인은 배제되고 낙인찍히는 게 당연하다 여겨
중범죄인도 적법절차 원칙 있어..사적주체 동의하면 왜 강제입원돼야 하나
치료 관점만 강조해서 신체의 자유 침해하는 건 헌법 원칙에 반해
사회는 OX만으로 작동되지 않아...정신건강복지법 개정은 그런 의미로 봐야
가족의 보호의무자 굴레 벗겨줘야...개인 중심의 지원 체계 작동시켜야
정신요양시설 장기입소,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으로 인권위 제소해야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이 같이 보장돼야 인간다운 삶 보장될 수 있어
관료제 순기능 측면 있어...시민사회 의견 수렴해 정책 입안하고 집행할 것

199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그에게 대학은 낭만을 즐기는 곳도,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해야 하는 공간도 아니었다. 동기들은 입학하자마자 사법고시 공부에 몰두했다. 사시를 준비한다는 건 합격 때까지 청춘을 유예하고 저당잡힌다는 의미다. 오로지 법서(法書)를 넘겨야 하는 법대 문화에서 그는 숨막히는 갈증을 느꼈다.

그는 청춘이 그저 바람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방황하는 영혼이, 청춘이 아름답다고 우리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청춘의 방황은 그에게 다른 방식으로 절망하는 것을 가르쳤다. 공부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의미 있는 활동을 하지 않고 그는 견뎠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뒤늦게 군대를 갔다온 그는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3년만에 합격했다. 2001년이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박원순 당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가 특강을 했다. 박 상임이사는 “공익변호사는 블루오션이다. 용기 있게 뛰어드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연수원 졸업 무렵, 그는 박 상임이사를 찾았고 그의 조언에 따라 아름다운재단 산하의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을 만들어 연수원 동기 3명과 같이 일을 시작했다. 공익변호사라는 말조차도 낯선 시절이었다. 이들 변호사들은 온전히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 가진 것 없는 자들, 빼앗긴 자들, 짓밟혔으나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이들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3명은 각각 사회복지, 이주민, 여성 분야를, 그는 장애 분야를 맡았다.

이후 그, 염형국(49) 변호사는 장애 문제를 넘어 정신장애 분야까지 눈길을 돌리게 된다. 계기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장애 문제를 다루던 중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오퍼’가 들어온 것이다. 정신병원 실태조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조사 대상은 부산의 한 정신병원이었다. 그곳은 창마다 쇠창살이 쳐져 있었고 이전에 방문했던 신체장애인 시설들보다 환경은 더 열악했다. 처음 마주하는 정신장애인들에 대해 공포감도 느꼈다.

염 변호사는 그때 “어떻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평생을 갇혀서 살아야 하나”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2007년 인권위는 다시 그에게 정신장애인국가보고서 작업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그때 많은 정신병원을 현장 방문하고 조사했다. 그 기억은 그를 정신장애인 인권에 지속적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어쩌면 저항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 실존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그는 정신장애인을 배제하는 왜곡된 법과 제도에 저항하는 싸움을 시작했다.

당시 신체장애 진영이 장애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고 장애계는 정신장애 쪽을 몰랐다. 그만큼 정신장애인을 배제하고 소외시켰다. 그건 마치 노동자라는 계급적 처지를 잊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처지로 나눠 정규직의 신분적 우월감을 느끼게 되는 모순된 정체성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는 “당시 장애운동은 정신적 장애인 중에도 발달장애인만 포괄해서 국가에 요구했으며 정신장애인은 외면하고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일종의 ‘사명감’을 가졌다고 했다.

2009년 인권위 제1차 정신장애인국가보고서가 나왔고 2021년 제2차 보고서가 나왔다. 그 기간 정신장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염 변호사는 2016년, 정신보건법 제24조 강제입원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인권 변호사들과 공개변론을 준비해 마침내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아낸다.

이 법 제24조의 강제입원 조항은 가족과 의사라는 사적 주체의 주관적 판단과 진단에 의해 신체를 구속하는, 헌법상의 신체의 자유를 위반하는 민간 병원의 집행 행위였다. 재산 문제로, 종교적 문제로, 가족간 불화의 희생양으로 어떤 이는 제24조에 의해 자기선택 아닌 강제와 강압으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공포를 주는 이 정신병원의 상징성은 입원한 정신장애인들에게 공포의 기억이었고 원형이었다. 그래서 당시 이곳을 나온 정신장애인들은 자신들을 생존자(survivor)라고 불렀다. 참담했던 시절의 이야기일까. 아니다.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저 감시의 외부에 존재하는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는 은밀하게 폭력과 노동과 강제적 치료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막지 못하는 건 아직 정신병원의 폐쇄성과 고립, 내밀한 강압적 치료 질서와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법과 제도의 부재 때문이다.

염 변호사는 당시 정신보건법의 폐지와 정신건강복지법의 제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정신장애단체는 그를 의료 권력과 ‘야합’한다고 비판했다. 상처였을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는 조금이라도 정신 인권 제도가 선제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에 오엑스(OX)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너무나 많은 우연과 필연과 엇갈림과 공포와 믿음과 의심과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며 생성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사회적 공간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라는 극단적 구호 대신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신건강복지법이 만들어졌고 한국사회 최초의 지자체 지원을 받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개소됐으며, 정신장애인의 사회복지 서비스 이용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인복지법 제15조가 폐지됐다. 염 변호사는 이 모든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2021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에 임명됐다. 지난해 인권위가 내린 권고에 정신장애 인권과 관련된 대목들이 유난히 많이 만들어졌다. 아마 그의 인권 철학, 그리고 정신장애운동에 우호적인 인권위 직원들이 구성한 합작품은 아니었을까.

어느 술자리에서 기자는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술을 한잔 들이킨 후 굵은 왕겨가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지난 10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실에서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대학 시절은 어땠습니까. 운동권이었습니까.

“아니요(웃음). 방황을 많이 했어요. 법대에서는 누구든지 사시(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거기에 매몰돼서 다른 인간관계나 대학 생활의 낭만이 사실은 없거든요. 그게 저의 성향하고 맞지 않았고 그래서 적응하지 못했던 거 같아요. 공부도 안 하고 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삶을 4년 동안 살아서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되죠. 뭐 그 당시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은 들어요.”

-사법연수원 1년차 때 박원순 당시 변호사의 특강을 듣지 않았다면 국장님은 어떤 길을 갔을까요.

“평범하게 밥벌이하면서 남들처럼 똑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어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어요. 사법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사시 2차 보고 나서 YMCA의 시민중계실에서 6개월 동안 자원봉사로 법률 상담이나 법률 지원 활동을 했어요.

박원순 변호사를 안 만났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공익변호사 일을 하려고 했을 거 같아요. 저는 참여연대도 찾아갔거든요. 참여연대에도 그때 상근변호사가 한 명 있었는데 참여연대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니까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더 뽑을 여력이 안 된다고 고사를 해서 일을 못 했죠. 그래서 아름다운재단을 찾아간 거예요. 계속 여기저기 문을 두드렸을 거 같아요.”

-노동운동 하던 학출(대학생 출신)들도 한계에 봉착하면 사법고시를 보고 인권변호사가 되려고 하던 게 그 시절이었습니다. 국장님은 사시를 준비한 이유가 뭘까요.

“저는 그런 유는 아니에요. 학생운동은 하지도 않았고 노동운동은 더더구나 하지 않았어요. 법대도 부모님이 좋겠다고 해서 갔고 딱히 과에 대해 소신이나 지향이 있지는 않았어요. 법대 가니까 다 사시 공부를 했고 저도 샐러리맨으로 직장 다니면서 일을 하는 게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고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공익변호사가 되겠다는 마음까지는 아니었는데 의미 있는 일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변호사 자격을 가지려 했던 거 같아요.”

-당시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 있었지요. 거기 참여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까.

“연수원 들어가서 민변을 알게 됐어요. 민변은 지금도 그렇지만 자기 본업을 하면서 가외로 공익활동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에요. 민변이 의미 있는 사회적 활동을 하는데 어쨌든 본업은 로펌이든 개인 사무실이든 벌이를 하면서 가외로 공익활동을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는 변호사로서 필요한 역할을 하기에 한계가 많다고 생각했죠.

저도 지금은 아니지만 민변 회원이기도 했어요. 민변 활동을 했지만 공익변호사하고 많이 다른 형태로 일을 했고요. 공익변호사로 일을 하는 게 저의 성향이었고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성격이 활동적인 건가요.

“저는 편집장님(기자 지칭)보다 더 내성적인 사람이었어요. (MBTI·성격 유형검사 도구) ‘I 성향’ 중에서도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내재적 성향을 갖고 있었던 거 같아요. 대학교 때까지는 소극적인 I 성향으로 살았어요. 나서서 활동하는 것도 전혀 내 일이 아니었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내가 나서서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는 욕구가 굉장히 강해졌어요. 공익변호사 일을 하면서 I 성향보다는 조금 더 ‘E 성향’이 부각되는 과정을 거쳤던 거 같습니다.”

-공익전담변호사 1호라는 별칭이 부담스럽기도 하겠습니다.

“저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 같아요. 사시 준비할 때도 길지 않은 기간 안에 합격하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공익변호사 1호라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굉장한 자부심 중의 하나였죠. 공익변호사 1호라는 타이틀이 부담이 되는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해야 될 역할, 할 수 있는 역할의 원동력으로 생각하며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정신장애인을 처음 만난 게 부산 병원이었습니까.

“맞아요. 그때 미신고시설들 방문조사를 많이 했는데 장애인시설의 상당수는 정신질환자들이에요. 제 느낌으로는 50% 이상이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분들이었어요. 장애인시설에도 정신질환자들이 있고 정신병원에는 정신질환으로 진단받은 분들이 강제로 갇혀 있고요. 정신질환자들이 사회에서 삶을 온전하게 영위하며 살기가 참 어렵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정신장애인들은 정신분열증 환자로 불렸습니다. 그들을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공감에서 일하면서 휠체어 탄 장애인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생소하고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모르는 마음이 많이 있었죠. 정신병원이나 장애인시설에서 정신질환자들, 특히 조현병 환자들 만났을 때는 솔직히 두려운 마음도 있었죠. 이분들이 나한테 돌발적으로 위해를 가하면 어떡하나라는 두려운 마음도 솔직히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접촉면이 넓어지고 정신병원 가서 얼굴을 자주 보게 되면서 편견이나 낙인감은 줄어들었어요.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장애유형 중에서 정신장애인은 더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측면인데 하나는 사회에서 장애인도 차별받지만 정신장애인은 동등한 사람으로 생각을 안 하는 경향이 많아요. 정신질환자라고 하면 정신병원에 있어야지 왜 사회에 돌아다니게 해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냐는 편견과 낙인이죠.

또 하나는 장애계에서도 차별받고 천대받는 거 같아요. 장애계도 신체장애 중심이고 그들이 헤게모니를 갖고 있어서 정신장애인들은 발언권 자체가 많지 않아요. 유엔 CRPD(장애인권리협약)나 장애인복지계획 (논의)할 때도 정신장애인 문제는 논의가 제대로 안 돼요. 대변도 되지 않고. 탈시설도 마찬가지고요.

장애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보다 열악한 (정신)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게 장애운동의 한계일 수도 있는 거 같습니다. 바꿔나가야겠죠.”

-국장님은 2016년 한 매체 기고에서 ‘한국사회는 부적응한 자들에 대한 배제 기제가 넘치게 작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여러 형태로 배제하고 있죠. 정상성이라는 게 우리 사회에서 굳건한 명제로 자리잡고 있어서 정상성에 부합되지 않는 장애인들, 특히 정신질환자들은 사회에 함께 구성된 사람으로 인지되지 않아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배제하는 기제가 작동을 많이 하는 거 같아요. 그런 기제를 깨는 게 지난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신장애인 활동의 당위성도 거기서 나오는 거 같아요.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혀서 배제가 돼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법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설명이 안 되잖아요. 그 사람들도 같이 살아야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생활에서는 배제하고 낙인찍는 게 당연하다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어요.”

-2016년 헌법재판소가 정신보건법 제24조 강제입원 조항에 헌법불합치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때 어떤 의견을 냈습니까.

“그때 문제의식은 딱 한 가지였어요. 헌법 12조에 신체의 자유 조항이 있고 체포 감금하기 위해서는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되는데 정신질환자는 왜 그 대상에서 배제되죠? 심지어 중범죄자도 적법절차 원칙이 지켜지고 인신구속도 영장에 의해서만 하는데 왜 정신질환자들은 가족과 정신과 의사라고 하는 사적 주체들이 동의하고 진단만 내리면 강제로 입원되는 거죠?

이건 헌법의 적법절차 위반이라는 생각이 당연히 드는데 의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의사들은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본인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사회와 본인을 위해 치료를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신체의 자유 제한은 불가피하다고 이야기를 계속해 오고 있어요. 치료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정신병원 강제입원은 치료의 관점, 인신구속의 관점, 인권의 관점이기 때문에 양자가 조화롭게 운영이 돼야죠.

치료의 관점만 강조해서 신체의 자유를 억제하고 침해하는 것은 헌법 원칙에 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을 헌법재판관들에게 설명했고 다행히 헌법재판관들이 납득해서 헌법불합치가 내려진 거 같아요.”

-정신건강복지법 개정 과정에서 당사자들로부터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회의감이 들었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게 오엑스(OX)로 운영되지 않거든요. 정답이 있지도 않고, 0 아니면 100 이 둘 중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요. 그런데 당사자들은 당장 강제입원 제도를 없애지 않고 오히려 강제입원을 온존시키는 정신건강복지법 전면개정은 반대한다고 했었죠. 그건 0에서 바로 100으로 가자는 거잖아요. 한 발자욱도 못 나간다는 건 결과적으로 의사의 논리에 부합되는 주장이거든요.

야합이라고 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백 걸음은 못 가도 몇 걸음은 더 나아갔다고 생각해요. 그걸 통해 복지 논의가 시작됐고 정신건강센터가 정신건강복지센터로 바뀌었고요. 개악(改惡)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정신병원 입원도 그 이후로 굉장히 어려워졌거든요. 형식적이긴 하지만 강제입원 비율이 확 낮춰진 것도 그 법을 계기로 한 겁니다.”

-정신병원 입원에서 사법입원제를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강제입원이 치료라는 목적으로 신체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가급적 하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급성기의 사람이 위해를 가하거나 자·타해의 위험이 있으면 불가피하게 강제적 치료가 필요한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사적 주체들이 진단하고 동의로 해결할 순 없는 거죠. 국가에 인신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판단근거를 부여하고 판사들이 그걸 판단하는 게 맞는다는 게 일차적이고요. 또 하나는 장기적으로 급성기 환자들이 쉼터나 급성기 센터 등을 통해 가급적 입원하지 않고 사회 안에서 치료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부분이죠.

그런데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의 틀을 보면 갈 길이 멀어요. 일단은 강제입원의 허들을 좀 높이고 그걸 통해 입원 환자의 수를 낮추고 지역사회 기반들을 마련해야죠. 강제입원 비율을 낮추는 단계적 방법의 하나로 사법입원을 얘기했던 거죠.”

-판사 수 부족 때문에 사법입원제 시행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는 사람들의 주장이거든요. 판사 수가 부족하면 왜 새로운 제도를 계속 만듭니까? 성년후견제도 그렇고 우리 사회가 판사가 필요한 부분을 계속 늘려가고 있어요. 이혼을 왜 판사가 담당합니까? 사적 주체가 서로 갈라지겠다는데 그냥 알아서 하면 되지. 판사가 개입돼야 할 부분이 점점 더 넓혀지고 있는 거예요.

판사 수가 부족하면 판사 수를 늘려서 감당해야 될 문제지 현행 판사 수를 기준으로 못하겠다고 하는 건 우리 사회를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라는 이야기라서 그런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어요.”

-변호사들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비난도 있더군요.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변호사이기도 하고 그런 주장에 일리가 없지 않다고 생각은 들어요. 우리는 법치국가에 살고 있잖아요.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법을 기반으로 해서 제도가 인권의 관점에서 완비돼 가는 과정에 있어요. 사법입원제를 도입하는 건 당사자 인권을 위해 변호사 조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지원하는 게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거든요.

당사자가 그 지원을 받는 것이 필요한데 이게 변호사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확대하는 문제하고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렇게 주장하면, 공공변호사가 담당해도 되고요. 그런 거 때문에 필요한 제도를 도입 못 하는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장애인복지법 제15조가 폐지됐습니다. 후속 작업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장애인복지법 제15조는 정신장애인이 장애인복지법 상의 복지시설 이용을 제한해왔다. 지난 2021년 12월 이 조항은 폐지됐다-편집주)

“복지부도 그렇고 정신장애인사회통합지원센터도 그렇고 후속 입법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인재근 의원실과 남인순 의원실에서도 발의할 내용을 준비하고 있고요. 입원 비율을 줄이려면 지역사회 복지 기반들이 다 마련이 돼야 돼요.

장애인복지법의 허들을 넘었기 때문에 장애인복지체계든 정신건강복지법의 체계이든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 살 수 있는 기반들이 마련이 돼야죠. 그런데 제15조는 폐지됐지만 그 이상은 현재 아무것도 없어요. 병원에서 나왔는데 가족 말고는 갈 데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신재활시설이나 위기쉼터를 확충하는 대안이 마련돼야죠.

치료 관련해서도 약물치료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진행되는 일본 당사자연구나 핀란드 오픈다이얼로그라든지 이런 대안적 치료법도 지역사회에 확산이 돼야죠. 그 과정으로 후속 작업들이 이뤄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행정입원 외의 모든 강제입원 유형을 없애자는 정신장애계 목소리도 있습니다.

“가족에게 (입원과 보호의) 권한과 의무를 동시에 부여한 게 보호의무자 조항인데 가족에게 그런 굴레를 벗겨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갈수록 사회는 가족 중심보다는 개인이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를 지원하고 한 명 개체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운영이 되고 있어요.

국가가 가족에게 더 이상 보호의무 부담을 지우지 말고 일 개체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지원하는 체계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고민해야죠. 그런 맥락에서 보호의무자 입원제도 폐지하고 행정입원으로 일원화하는 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은 사회복지사, 산후조리사, 아이돌보미 등 28개 법령에서 자격증 취득이 제한됩니다. 이 자격 제한을 전면적으로 다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는 정신질환자에 대해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 완전 폐지의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정신질환자라도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거쳐서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부분적인 제한이 있겠죠. 저는 자격증별로 심층적인 검증이 돼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자격증은 정신질환자도 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바꿔야죠. 특히 사회복지사는 제한할 이유가 없거든요. 그 사람이 사회복지사 자격을 수행하면서 문제가 생겼다면 행위에 대해서 제재를 가하고 자격결격을 규정하면 되지 아예 문을 닫는 방식으로 정신장애인을 배제시키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고 봐요.

최근에 성년후견에 선정됐다는 이유로 공무원 결격사유로 규정한 게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잖아요. 성년후견 대상이 대부분이 정신질환자이거든요. 그런 맥락으로 사회가 조금씩 논의가 되고 단계가 진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장님은 2014년 염전노예 사건에서 국가 책임을 물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 승소했습니다. 정신장애인은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서 학대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도 국가배송소송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길일까요.

“제가 법리 검토를 해보지 못해서 당장 가능하다 안 하다 말씀드리기는 좀 그런데요. 일차적으로는 병원 상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국가배상이 인정되려면 요건들이 있어요. 그 중 하나가 공무원이 고의나 과실로 법을 위반해서 손해를 끼친 게 국가배상의 요건입니다.

공무원이 현행법 위반은 아니지만 정신병원에 있게 한 것 자체가 고의나 과실로 법을 위반해 손해를 끼친 것인지를 검토해야 되는데 쉽지는 않을 거 같아요. 최근에 이용표 (가톨릭대) 교수하고 논의한 게 뭐냐면 국가배상의 방식으로 정신병원, 정신요양시설에 있는 당사자들을 빼내는 건 굉장히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거예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좋은 법이거든요. 정신질환자도 당연히 장애인 범주에 포섭이 되죠. 장애인차별금지법 안에 자기결정권 조항이 있고 시설에서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면 안 된다는 조항도 있어요. 시설의 범주에는 당연히 정신요양시설이나 정신병원도 포섭이 될 수 있겠죠.

그래서 본인 의사에 반해 정신요양시설에서 정신요양을 받도록 하는 거. 거기 40년, 50년 있는 분들도 있는데 이건 시설 유지를 위해 있는 거지 본인을 위해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그런 분들을 대리해서,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으로 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면 자체가 큰 의미가 될 수 있겠다 싶어요. 그 진정을 당사자 본인이 해야 되는데 사실 당사자가 구해지지 않아서 쉽지 않아요. 어쨌든 그런 진정을 같이 구상을 하고 실체화시키면 좋겠습니다.”

-인권위의 정신장애 관련 인권 권고들이 늘어나고 있더군요. 국장님의 역할도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장애인차별조사 1·2과를 다 관할하고 있고 사무국에서 올라가는 안건은 제가 검토해서 올리는 거라서 당연히 제 의견이 반영이 되죠. 제가 조사관이랑 논의해서 주문을 정리하는 경우도 많죠. 예컨대 위기쉼터나 절차조력인 부분은 같이 논의해서 그렇게 권고했고 동의입원도 마찬가지고요.”

-준비 중인 권고문은 있습니까.

“정신병원 직권조사를 몇 군데 했고 작년 말에 두 군데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해서 권고를 했어요. 지금 나머지 두 개가 남았어요. 그것에 대한 권고를 해 보려고 하고 있고 또 정신질환자 문제는 아니지만 장애인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아동에 대한 인권친화적인 지원 방안도 권고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신치료가 인권치료로 이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치료 부분은 정신과 전문의의 영역이라 제가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이고요. 약물치료가 중요한 치료의 한 부분이라는 건 동의해요. 그렇지만 문제는 당사자 의사가 고려되지 않은 채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을 관철시키면서 정신과 치료가 이뤄져 왔잖아요.

다른 영역에서는 환자가 소비자가 돼서 소비자 주권을 이야기하는데 정신병원에서는 유달리 소비자 문제가 무시되거나 외면받는 상황이잖아요. 정신과 치료에서도 당연히 소비자 주권의 문제가 화두로 떠올라야 돼요. 당사자의 목소리가 반영이 돼서 소비자가 원하는 치료방식이 도입돼야죠.”

-정신건강복지법은 두고 정신장애인권리지원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국장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건 현실과 맞물려서 논의돼야 될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현재 복지부 체계에서 정신질환자 내지는 정신장애인, 용어도 사실 두 가지잖아요. 의료에서 정신질환자이고 복지 부분은 정신장애인라고 하는데 어쨌든 정신질환자의 주된 부서는 정신건강정책국(관)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는 복지 문제를 다루는 과 자체가 없어요. 과가 없는데 복지 문제를 다룰 수가 있겠습니까.

장애인정책국에는 장애인권익지원과도 있고 장애인정책과도 있고 복지 문제를 전면으로 다루는 곳이 있잖아요. 저는 장애인정책국에 정신장애인 복지 문제가 포섭돼야만 복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을 어느 소관부처로 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 저는 정신건강정책국일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다루면 사실 복지 문제는 다룰 수가 없어요. 그런 난점이 있어요.”

-정신건강정책국 안에서 복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요?

“그런 거죠. 정신건강정책국에 복지과가 없으니까.”

-장애인정책과를 이용해야 한다?

“그쪽으로 가야만 복지 문제는 해결이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복지전달체계를 보면 정신건강정책국 산하 정신건강정책과에서 주로 다뤄왔어요. 현재 지역의 복지전달체계는 보건소하고 정신건강복지센터인데 보건소는 보건의 영역을 다루고 있지 복지 문제는 전혀 아는 사람도 없고 관심이 없어요.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사회복지사 몇 명 있기는 하지만 복지를 다룹니까. 못 다루잖아요. 왜냐하면 정신건강복지센터장의 99%가 의사이고 의사는 복지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거에요.”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명권이 있어야 그 이상의 권리들이 보장되겠죠. 생명이 없는데 자기결정권이 성립 자체가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냥 먹고 사는 거 이상으로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건 동물의 삶하고 같은 거예요. 생명권만 보장되면 그냥 동물의 삶만 보장한다라는 건데, 인간이 동물하고 다른 건 이성을 가지고 사회적 활동을 한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본체인데 사회적 활동을 억압하면서 치료와 안전, 생명만 보장한다? 이건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생명권이 가장 중요하지만 생명권만 보장돼서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없어요. 생명권 플러스 자기결정권이 같이 보장돼야만 인간다운 삶이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에 있다가 인권위로 오면서 관료주의를 느끼기도 했겠습니다.

“뭐 당연히, 공무원 관료이니까요. 관료주의의 틀을 깨고 제가 혼자 알아서 정책을 펴거나 결정을 내리는 건 가능하지 않죠. 관료제가 폐해도 있지만 순기능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거든요. 시민사회가 순기능하지만 가능하지 않은 한계의 부분도 있고요.

인권위도 국가라는 틀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관이잖아요. 시민사회는 요구를 하지 집행하는 기관은 아니죠. 저희는 시민사회 의견을 잘 수렴해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고 권고를 하고요. 이게 제대로 안 되면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게 반영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국가기관으로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을 색안경을 끼고만 볼 건 아니라는 생각해요. 복지부가 됐든 인권위가 됐든 잘 기능할 수 있도록 시민사회에서 필요하면 질책도 하고 비판도 하지만 또 잘한 거 있으면 응원도 하고 협업도 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법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웃음) 생각은 안 해봤는데요. 저는 글 쓰는 것도 좋아하는데 그걸로 밥을 벌어먹었을까라고 생각하면 모르겠어요. 확답이 안 돼요. 변호사로서 법률 문서를 쓰는 것은 제가 잘하는 편이지만 작가로서나 기자로서 글을 쓰는 건 잘할 자신이 없을 거 같고요. 오히려 저는 산을 좋아해서 산과 관련된 산불감시원이나 산림청 직원 일을 찾아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요즘 보는 책이 있습니까.

“요즘은 사실 책을 잘 안 읽어가지고.(웃음) 보고서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매달 읽어야 할 보고서가 굉장히 많거든요. 보고서를 보는 게 책 몇 권 보는 효과를 내죠.”

-책을 읽을 시간이 안 나겠죠.

“시간보다도 마음의 여유라고 할까, 그런 게 잘 안 생기는 거 같아요. 업무 끝나고 집에 가면 유튜브나 넷플릭스 보고 좀 쉬고 싶지 책을 또…내가 하루 종일 문서를 봤는데 책을 또 보는 건 업무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고차원적인 질문입니다.”

-한비야 같은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겁니까. 그런 삶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유로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죠. 저도 자유로운 삶을 꿈꿔왔던 사람이기는 해요. 대학 다닐 때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을 감명 깊게 봤어요. 아, 저렇게 사는 것도 굉장히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그런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내가 마냥 자유롭고 나만 위해서 산다고 해서 그게 의미가 있을까?

저는 평생에 걸쳐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기여하는 삶을 계속 추구하는 거예요. 그게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일 수도 있고 법률 사각지대의 사람들에게 법률 지원하는 일일 수도 있고, 제3세계 사람들의 기아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일 수도 있고요. 그런 것들을 하는 데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들어요.”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염형국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국장. ©마인드포스트.

-이타적인 삶인가요.

“이타적인 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내가 왜 이렇게 남들과 어울려서 사는 걸 좋아하지라고 하면 그게 나의 행복이고 만족이기 때문인 거 같아요. 사회는 혼자서 헤쳐나갈 수가 없어요. 누군가를 돕고 도움 받으며 사는 게 인간의 삶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해악을 끼치기도 하고 누군가를 괴롭히기도 하죠. 그건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조금 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거 같아요. 어떤 이유로든 차별받거나 혐오받지 않고 장애가 있든 없든 정신질환이 있든 없든 어울려서 살아가는 삶을 저는 계속 추구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거 같습니다.”

-더 할 말씀이.

“저는 20년 가까이 민간영역에서 변호사로서 일을 하다가 공무원 쪽으로 오게 됐는데요. 저는 공무원이 돼서 사람이 바뀌거나 삶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른 포스트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방식으로 나의 이상이나 삶의 방식, 삶의 목표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권위에서도 공감에서 하던 연장선상에서 일을 하고 있고 제가 생각하던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추구하고 실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에서 정신장애인 문제는 계속 제 삶의 화두로 가져갈 생각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 앞에 우리는 섰다. 문이 열리고 내가 올라타자 그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문득, 기자는 억압당하는 존재에 대한 연민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득한 울림이 음악처럼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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