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니 ‘모든 것은 변한다’는 공리에 대해...언론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다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니 ‘모든 것은 변한다’는 공리에 대해...언론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3.03.15 1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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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노경민 기자 기사에 대한 사소한 말걸기...‘망상’을 ‘이상한 믿음’으로 순화
기사 말미에 낮은 정신질환 범죄율 통계 내보내...격리가 아닌 공존의 의미로 전환
정신장애계가 비판했지만 닿을 수 없었던 낙인의 기사쓰기...조금씩 바뀌고 있어
15일자 뉴스1 기사 갈무리.
15일자 뉴스1 기사 갈무리.

15일 <뉴스1> 노경민 기자의 기사가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 사건의재구성이라는 코너에 담긴 정신질환 관련 뉴스였다.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50대 A씨는 2020년 7월, 부산 동구 아파트 옆집에 사는 B씨(70대·여) 집의 베란다 창문을 열고 들어가 B씨를 흉기로 살해했다. 앞서 A씨는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B씨 옆집에 살았고 이후 이사를 했지만 여전히 B씨가 자신에게 나쁜 기운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B씨 집에 3차례 몰래 들어가기도 했다. 기사읽기(클릭)

범행 당일, 그는 B씨 집의 열려 있는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가 B씨를 살해했다.

검찰 조사에서 A씨는 이렇게 말한다. “베란다 문만 잘 잠가 놓았어도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B씨 집에서) 목을 찌르기 좋은 자세로 마주보고 있자 순간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A씨는 정신감정에서 편집조현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사는 전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살인사건에 대한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자의 눈이 오래 머문 단락이 있었다.

우선 노경민 기자는 ‘망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믿음’이라고 적었다. 국어사전에서 망상은 ‘잘못된 믿음 또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냥 잘못된 판단으로 이해되는데 이 용어가 ‘망상’으로 기술될 경우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증폭된다.

왜냐하면 많은 사건사고 기사에서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범행을 ‘망상’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망상’이 가지는 기호는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사 제목에 ‘망상’을 넣으면 언론 소비자들은 “역시나 정신병자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마인드포스트>는 여러 차례 이 용어의 사용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언론사에 요청한 바 있다. 그리고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단의 언론모니터링단에서도 ‘망상’ 용어가 제목과 리드문에 달린 경우 해당 기자에게 즉각적인 삭제 요청을 해왔다. 기타 조현병회복협회 카페인 심지회, 마포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언론모니터링에서도 ‘망상’ 용어의 사용에 문제 제기를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경민 기자는 망상 대신 ‘이상한 믿음’이라고 순화해서 표현했다.

물론 이 기사에는 법의학적 정신감정에서 ‘편집조현병’을 앓고 있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이건 기자 개인의 의견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사건에서 아무렇게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라는 ‘카더라’ 뉴스와는 다른 시선이다.

언론모니터링단을 비롯한 당사자 자립생활 혹은 운동과 관련된 기관단체들이 요청해온 건 바로 “법의학적 정신감정이 나오기 전까지 절대로 추정적인 정신질환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는 그간 정신질환 사건에 대해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시선으로 접근해 왔다. 사건의 원인이 모호할 경우 “경찰에 따르면 용의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라고 보도하면 끝이었다.

그래서 기사 제목에 큼지막하게 ‘정신질환자’, ‘조현병 환자’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올리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를 살해한 조현병 환자’, ‘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한 아들, 조울증 환자’라는 제목은 이를 읽는 언론 소비자들에게 정신질환과 관련된 표상에 지극히 부정적인 이미지와 공포를 갖게 만들어버린다.

1995년 우리나라 최초의 정신질환자 권리를 명시한 정신보건법 제정 이후에도 언론의 이 같은 글쓰기 문법은 변함없이 지속돼 왔다. 1995년 이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정신질환의 부정적 내용들이 신문 제목으로 차용됐을 것이다.

그만큼 기자들은 그 글쓰기 문법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이 인권침해라든가,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삶에 치명적인 고통을 안긴다는 걸 고민해보지 않았다. 게다가 ‘잠자는 아버지에 흉기 휘두른 조현병 아들’, 아니면 ‘고속도로 역주행한 조현병 환자’ 등의 타이틀을 달아도 아무도 이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항의하지 않았던 긴 시간, 즉 무기력이 일상화된 정신장애인들은 언론이 표상시킨 범죄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뉴스1> 노 기자는 광기의 부정적 의미 대신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망상이 아닌 ‘이상한 믿음’으로.

물론 해당 사건의 재판부 판결문에는 “A씨가 편집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양형 구절이 들어가 있다. 판결문은 또 “A씨가 범행 당시 망상증으로 인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긴 하다.

여기에서 미디어는 재판부의 양형 이유에서 정신질환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공개해야 하는 것일까, 아닐까. 기자들은 기사 문맥에서 사건이 발생하게 된 ‘왜’의 부분을 건드리지 말라는 요구는 기사를 쓰지 말라는 것이라고 항의하고는 한다.

이 지점에서 인권과 언론 가치는 충돌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호주의 정신장애인 지원단체 ‘마인드프레임’이 제시하는 정신질환 보도에서 가이드라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신건강에 대한 책임 있는 보도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 영국 보건국이 지원하는 정신보건 프로그램인 ‘타임 투 체인지’가 제시하는 뉴스 미디어 가이드라인 등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정신질환자에 의한 범죄 보도 시 이들은 가해자보다 피해자갈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 기억하라.”

만약 기자가 정신장애인이 사회적 약자이고 이들을 옹호하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척박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면 앞장서서 ‘정신질환자의 위험성과 범죄성’을 외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정신장애인이 피해자가 될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들을 옹호해줄 사회적 자원이 빈곤할 때 약자의 시선에서 출발하는 언론의 공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이 역시 법원의 양형 이유를 자세하게 보도하지 않을 것이다.

2022년 12월 심지회(한국조현병회복협회)가 언론 모니터링단을 통해 정신질환 편견 기사들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2022년 12월 심지회(한국조현병회복협회)가 언론 모니터링단을 통해 정신질환 편견 기사들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이는 기자의 가족 구성원에 ‘정신질환자’가 있다면 정신질환 관련 기사를 쓸 때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이익을 지지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시선이다. 편견이 멈추는 지점이다.

따라서 판결문에서 자극적 정신질환 병명이 언급되더라도 언론은 최대한 억제하는 글쓰기의 방향을 따라가야 한다는 낮은 수위의 결론에 이를 수 있겠다.

또 하나, 기자의 눈을 머물게 한 건 바로 기사 하단의 문구다. “전체 정신질환 환자의 범죄 비중은 크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장애 범죄자는 0.6%이고 강력범죄 비율은 전체의 2.2%에 불과했다.”

또 아래에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따르면 조현병은 조기에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다”는 문구를 넣었다.

현재 한국기자협회의 자살보도 권고기준에는 기사 하단에 우울증 등 정신질환과 관련돼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 전화번호들을 함께 올리도록 권하고 있다. 극단적 선택을 다 막을 수는 없지만 극단적 선택을 막기 위한 예방적 조치는 할 수 있다. 이건 언론이 추구하는 공적 가치에 부합하는 문제다.

눈을 끄는 건 또 있었다. 몇 개의 댓글이다.

‘정신병은 무기징역으로 사회와 완전히 격리시켜라. 정신병자들 평생 국가가 관리하는 수용시설에 있게 해야 안전하다. 가족 부담도 경감된다. 정신병으로 범죄 저지른 사람들은 징역형 끝나면 국립정신병원에 평생 가둬 치료해야. 사회 내보내면 사람 또 죽임.’

기자는 쓸쓸했다. 제목에 찍힌 정신질환 낙인이 치안적 의미로 전환될 때 정신장애인의 격리와 사회적 배제의 댓글은 차고도 넘쳤다. 그런데 그토록 많았던 ‘정신병자 감금 논리’가 이 기사의 댓글에서는 생각만큼 늘어나지는 않았다. 이는 언론이 정신질환자 권리를 기사 안에서 재구조화하는 과정에 따른 현상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훈육과 타자화가 아닌 상생과 존엄의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기자의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일례로 최근에 정신병원에서 허가 없이 나온 환자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가 떠오른다. 그 사건의 기사들은 90%가 ‘정신병원 이탈’, 그리고 ‘발견’으로 적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거의 100% ‘정신병원 탈출’, ‘정신질환자 체포·검거’로 낙인화했을 건데 말이다. 정신병원을 수용소와 교도소로 전환시켜 해석하던 당대의 글쓰기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쨌든 조금은, 변해가는 것일까. 정신질환이 낙인과 배제, 타자화가 아닌 공존의 영토에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언론은 느껴가고 있는 것일까.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 하나가 있으니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그 공리를 생각해 본다. 변할 수 있을까. 아니, 변했을까.

낙인을 최소화한 기사를 쓴 <뉴스1> 노경민 기자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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