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살아서 맛있는 단호박을 먹는구나”
[삐삐언니의 책방] “살아서 맛있는 단호박을 먹는구나”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06.02 1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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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 (17) 인생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류시화 옮김, 이레 펴냄

언젠가부터 단호박을 좋아하게 됐다. 물론, 이름에만 ‘단’이 붙은 단호박도 더러 있다. 하지만 세상엔 진짜로 달콤한 단호박이 있는 게 분명하므로 단호박을 파는 가게를 지나다보면 항상 걸음을 멈추곤 한다. 며칠 전 카톡에 단호박 광고가 떴다. 내 것을 주문하려는데, 채소를 좋아하는 선배 한 명이 딱 떠올랐다. 10여 년 전 내게 달리기의 세계를 처음 알려준 분이었다. 우리는 성실한 러닝메이트였다. 그간 함께 달린 거리를 더해보면 오백 킬로쯤은 가뿐히 넘지 않을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서, 인생 수업, 류시화 옮김, 이레, 2006.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서, 인생 수업, 류시화 옮김, 이레, 2006.

선배는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일도 공부도 운동도 육아도 ‘완전연소’를 지향했다. 너무 줄창 달려왔기 때문일까. 5년 전 암을 이겨냈던 그에게 몇달 전 다시 암이 덮쳤다. 훨씬 위험하고 치명적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10시간 넘는 무시무시한 대수술과 여덟 번의 항암치료를 초인적 의지로 견뎌내는 중이다. 얼마 전 산책을 함께하면서 북한산에 대해 얘기가 나오자 여윈 얼굴에 광채가 흘렀다. 몸이 좀 나아지면 함께 산에 가자고 했다. 확신이 들었다. 이겨내겠구나.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시작한 의사이자 사상가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2004년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책 <인생수업>을 펴들었다. 제자이자 명상가인 데이비드 케슬러와 함께 죽을 뻔했거나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들 100여 명을 인터뷰해 그들이 말하는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을 강의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앞서 그의 책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었다면 이 책은  “삶에 도전하고 그 결과를 음미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목차에 나와 있는 ‘커리큘럼’은 대략 짐작가능한 내용이었다. ‘사랑’ ‘상실과 이별’ ‘가슴 뛰는 삶’ ‘영원과 하루’ ‘용서와 치유’…. 마지막 장 ‘살고 사랑하고 웃어라’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싶었는데 막상 읽다 보니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숱한 죽음을 목도했고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 했으며 죽음의 의미를 철저하게 파고들었기에 그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좋은 삶이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려는 최초의 시도를 합니다. (…) 우리가 병에 걸려 더 이상 은행원, 여행가, 의사,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날이 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만약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만일 당신이 사무실의 성실한 직원, 이기적인 삼촌, 헌신적인 이웃이 아니라면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정의내리기 위해 타인을 살펴봅니다. 그래서 타인의 기분이 나쁘면 우리 자신도 실망합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런 방어를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건강하고, 완전하며,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삶이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열심히 살았고, 그리고 내일도 열심히 살아갈 선배와 나누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당신은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기분좋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사랑할 때는 스스로를 미소짓게 만드는 일들로 삶을 채우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을 노래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좋은 일'이라고 배운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일 뿐입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생산적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는 늦잠을 자는 쪽이 영혼에 더 많은 영양을 공급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영혼에 더 많은 영양을 공급할수록 우리 주위 모든 곳에 있는 사랑이 흘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꼭두새벽 일어나서 아이를 챙기고 하루종일 일하고 밤새워 공부를 하고 틈틈이 운동을 하던 선배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선배,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다 해주지 마세요. 너무 생산적으로 살지 말아요. 게으르게 살아요.” 

단호박을 주문한 뒤 며칠 지나 선배에게 문자가 왔다. 맛있게 먹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살아서 단호박을 먹는 게 넘 행복하다!”

찡했다. 호박 맛이 괜찮다니 기분이 좋다고 간단히 답문자를 보내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래요, 단호박 한 조각 하나에 삶을 느끼는 게 진짜 삶이죠. 선배, 잘 살고 있어요!’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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