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헤아리는 편지 02] 불안한 시작...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절망을 머금고 나는 태어났다
[마음을 헤아리는 편지 02] 불안한 시작...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절망을 머금고 나는 태어났다
  • 소울레터
  • 승인 2023.07.25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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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레트의 기억의 다락방...시뻘겋고 못생긴 아이
Photo by Thought Catalog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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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딸이라니. 시뻘겋고 못생긴 게 내 배 아파 낳았어도 영 붙임이 안가."

​변변찮은 형편 때문에 산부인과 대신 허름한 조산소에서 아이를 낳은 우리 엄마는 내가 언젠가 들었던 이 말을 서른이 훌쩍 넘은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돈 꽤나 벌어왔다는 건설공사 소장과 오로지 아빠가 벌어놓은 돈만 보고 고작 세 번의 만남 끝에 바로 결혼을 결심했다는 옛이야기는 딸인 내가 듣기에도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남자의 경제력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충분히 그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서 덥석 생판 모르는 남정네와 결혼한 무모함은 바로 엄마의 가난 때문. 그 무분별함의 결정체가 바로 갓 태어난 나였다.

​신혼살림을 지방에 차린 엄마는 날 낳자마자 아빠 사업이 망해버려 울며불며 친정집으로 달려가 큰 외삼촌을 만났다고 했다.

"큰오빠. 그 사람 알고 보니 제정신이 아니야. 사람이 어딘가 이상해. 도저히 같이는 못 살겠어."

​가만히 듣고만 있던 큰 외삼촌은 우리 집안에 이혼이란 용납할 수 없다며 울먹이는 엄마를 단칼에 내치고서 그 후로 생활비만 몇 번 부쳤다고 했다. 갓 태어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의 품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을 함께 빨아들인 기억이다.

​나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감정과 기분을 감지하고 기억해 내는 남다른 능력을 지녔다. 불안을 머금고 태어나서인지 몰라도 살면서 기가 막히게 눈치를 본다. 나면서부터 엄마의 눈치를 봤기 때문에 애정이 결핍된 채로 세상에 묻혀 살아왔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엄마와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조차 거부당한 거절감은 이후로도 쭉 내 삶을 몹시 번거롭고 아프게 했다. 모태신앙인 나는 교회 모범 학생이었는데 이 땅에 사는 동안 엄마보다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채고야 말았다. 세상은 잠시 잠깐이니까 엄마 눈치도 잠깐만 견디면 된다는 걸 알았다. 엄마로부터의 사랑이 너무 결핍되어 때때로 계모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산고를 오롯이 겪어가며 날 세상에 등장시킨 엄마를 아주 이해 못 하는 건 또 아니다.

​알고 보면 엄마도 참 가여운 사람이다. 시골 깡촌 빈농의 장녀로 태어나서 육 남매를 교육하고 일곱 살 때부터 외할머니를 도와 일하기 시작했다는 우리 엄마. 엄마는 결혼하기 1년 전에 농약을 들이켤 만큼 찢어지는 가난에 시달리는 일이 지긋지긋했다고 늘 이야기한다. 도무지 살아갈 소망이 없어 어리석은 마음으로 저지른 일이었다고 지금은 그때 일을 후회한다고 했다. 엄마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다 해야 했지만 정작 당신이 하고팠던 간호학 공부는 포기했다. 글을 쓰려고 대학을 가겠다던 큰외삼촌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가난이 지긋지긋해 선택한 돈 많은 남자에게서 일순간 돈이 사라져 버리자 엄마는 결혼을 지속할 이유가 더 이상 없었다. 게다가 처녀일 때와 달리 핏덩이 같은 못생긴 애까지 하나 딸렸으니 그 부담이 오죽했을까.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 한다던데 아빠의 사업 실패는 우리 가정에 경제적 불안을 가져왔고 돈이 가장 큰 삶의 이유이자 목표였던 엄마는 내게 애정을 쏟을 여유가 충분치 않았다. 오히려 기대를 저버린 사람에게 시집와 애까지 얻었다는 절망 때문에 엄마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었을 일이다.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절망과 불안을 머금고 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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