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응급입원이 생명권 보호에 부합하지만…대안으로 위기쉼터 마련돼야”
인권위 “응급입원이 생명권 보호에 부합하지만…대안으로 위기쉼터 마련돼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04.1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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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응급의 인신구속적 치료는 지역사회 치료 원칙에 반해
정신과적 위기에 대응할 지역사회 인프라 부족...위기쉼터 필요
정신의료 모델 의료에서 인권으로 이행...자기결정권·신체자유 옹호돼야

정신응급 상황에서 병원이 아닌 지역사회 위기쉼터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나왔다.

14일 인권위는 지난 7일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지역사회 정신질환자를 위해 가족통합형 쉼터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위기지원 쉼터를 설치하고 쉼터 내에 지원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게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인권위에 따르면 공황장애를 갖고 있는 40대의 A씨(여)는 지역사회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이용하던 중 어느 날 센터 직원에게 삶을 비관하는 문자를 보냈다. 센터 직원은 수차례 A씨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극단적 선택을 우려해 경찰에 연락해 A씨를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도록 했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 제50조는 정신질환자로 추정되고 자·타해 위험이 높은 사람을 발견할 경우 경찰과 의사의 동의를 얻어 응급입원을 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응급입원은 강제입원의 한 유형으로 입원환자는 입·퇴원 과정에서 자기결정권이 배제된다.

A씨는 이후 입원 과정에서 신체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A씨에 대한 응급입원 조치가 적법했다는 의견을 냈다. 인권위는 “국민의 생명권 보호라는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정당한 목적과 적합한 수단에 부합한다고 판단한다”며 진정을 기각했다.

다만 정신응급 상황에 있더라도 지역사회에서 회복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인신구속적 치료를 우선시하는 법률 및 관행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과 정신장애인 보호·정신보건의료 향상을 위한 원칙(MI 원칙)이 권고하는 지역사회 치료 원칙에 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인권위는 인권위법에 따라 인권 보호와 향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관계기관에 정책과 관행이 개선과 시정을 권고할 수 있다.

인권위는 의견서에서 “국가는 국민의 생명, 신체, 안정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며 “따라서 자살 우려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본인 의사에 반할지라도 치료 목적의 입원을 일시 허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인권위는 “강제입원을 당한 개인은 그로 인해 지역사회에서 거주하며 사회생활에 참여할 기회가 박탈되는 등 행복추권을 침해당한다”며 “신체의 자유와 같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제한받게 되므로 국가는 그 제도가 남용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2016년 개정된 정신건강복지법이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지역사회 삶을 지지하는 데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비자의입원(강제입원)을 비롯한 강제적 치료가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당사자의 신체의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현재 정신장애인 운동계는 새로운 정신장애의 복지 관련 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요구안에는 위기쉼터와 같은 병원 입원의 대안적 치료 체계도 제시되고 있다.

위기쉼터는 정신과적 응급상황에 처한 당사자가 정신병원이나 병동으로 바로 이송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쉼터에서 며칠간 머물도록 하는 치료 시스템이다. 정신응급의 지속 기간이 2~3일이면 안정된다는 점을 감안해 신체의 자유가 훼손되는 폭력적 입원을 피하고 자기결정권이 존중되는 위기쉼터를 이용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인권위가 지난 2019년 실시한 ‘중증정신장애인 의료체계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찰과 구급대원, 보건서와 정신건강복지센터, 병원 관계자 등은 정신과적 위기상황에 대응하는 지역사회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들은 위기쉼터 마련과 응급·행정입원 전담병원의 지정, 지자체의 정신질환자 지원시스템 강화 등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정신의료와 관련된 세계적 추세도 과거 의료모델에서 인권모델로 패러다임이 이행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인권적 가치인 자기결정권과 신체의 자유를 옹호하는 정신과적 의료 체계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실제 세계보건기구(WHO)는 지역사회 정신건강서비스 지침을 마련해 정신질환자의 위기 지원 및 지역사회 기반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정신의료계에서는 위기쉼터의 구성에 일부 동의하지만 ‘위기(crise)’의 의미를 정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모든 정신과적 응급 단계에서의 정신 위기 상황의 개별성을 무시한 채 위기쉼터만을 고집할 경우 자칫 제때에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의견이다.

따라서 위기를 규정하는 정신과적 범주가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청소년위기쉼터나 위기여성쉼터 등 지역사회 쉼터들은 역기능적인 가정이나 남성 배우자의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면서 이를 피하기 위해 이용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정신장애인의 위기쉼터는 물리적 폭력이 아닌 심리적 어려움으로 인한 입소이기 때문에 이를 청소년·여성 위기쉼터와 같은 개념으로 접근할 경우 정신과 치료의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정신병원이 인권적 치료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면 굳이 대안적 쉼터만을 고집할 이유가 있느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인권위는 의견 표명에서 “위기지원 쉼터 마련 등 지역사회 기반의 치료·회복 서비스가 다양하게 확충돼애 한다”며 “정신과적 위기 상황에 처한 이들이 가급적 수용되지 않고 가족과 이웃 곁에서 안전하게 치료·회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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