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멍게가 몇등인지 판단하지 말라
[삐삐언니의 책방] 멍게가 몇등인지 판단하지 말라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2.10.03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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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 ⑨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정지인 옮김, 곰출판

나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나는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사는가? 

이런 질문이 몰아치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가끔씩 그렇다) 우울의 나날이었다. 깊은 어둠의 하강곡선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하면 ‘사는 일’은 발목에 채운 족쇄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해. 어쩌면 살아야 할 이유는 아예 없는 건지도 몰라. 이렇게 되뇌는 몇달이 지나고 다시 평온이 찾아오면 삶의 의미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을 내려놓았다. 삶이란? 그냥 저절로 살아지는 거야. 

2022년이 아직 석달이나 남았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마도 내게 ‘올해의 책’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책은 이 질문을 화두로 꼭 붙잡고 과학의 미로를 탐구하며 나아간다. 그것도 너무나 근사하고 지적이며 진심이 담긴 방식으로. 

과학 전문 기자인 지은이 룰루 밀러는 어릴 적 물었다. “아버지,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과학자인 아버지는 잘라 말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아버지는 혼돈만이 인간을 지배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지구 입장에서 보자면 넌 개미 한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이같은 어두운 혼돈 속에서 우리는 왜 끈질기게 삶의 의지를 불태워야 하지? 왜 넘어져도 또 일어나야 하지? ‘결정적 실수’로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고 직장도 나온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불굴의 용기로 이름난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을 추적해나간다. 전세계를 다니며 수천 종의 물고기를 잡아 표본을 만들고 이름을 붙인 사람. 30여년간 수집한 어류 표본들이 화재와 지진으로 처참하게 훼손됐는데도 다시 시작한 사람. 어릴 적 소심과 가난, 불운을 딛고 스탠포드대 학장으로 승승장구한 사람.

이런 성공 스토리가 뭐람, 하며 흥미가 식을 무렵,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어릴 적 들판을 누비며 “숨어있는 보잘것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찾던 수줍은 소년이었던 조던은 진화를 연구하면서 생명엔 종별 우열·위계가 있다는 ‘사다리론’에 빠져들었다. 정신적·육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탈리아의 마을, 아오스타를 방문한 경험은 그가 우생학의 그릇된 길로 접어든 결정적 계기였다. “거위보다 지능이 낮고 돼지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사람들로 가득한 진정한 공포의 공간이었다.” 

19세기말부터 맹위를 떨친 우생학은 정신질환을 앓거나 발달장애 등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세상의 테두리 바깥으로 축출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유대인·집시인·장애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독일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인들 역시 우생학에 사로잡혔다.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 유전적인 불구자들을 수용시설로 몰아넣었고, 미국의 많은 주들은 이들에 대한 불임시술을 합법화했다. 그리고 조던은 이 모든 것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정지인 옮김, 곰출판, 202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정지인 옮김, 곰출판, 2021

하지만 ‘정상’만이 삶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 정상-비정상의 경계가 뚜렷하다는 믿음, 그리고 생명의 위계질서가 있다는 그의 확신은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무참히 부서진다. 1980년대 분류학자들은 수리분류학 등 새로운 기법을 동원해 조던이 평생을 바쳐 구축한 물고기 분류체계가 허상임을 밝힌다.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 중 다수가 자기들보다는 포유류와 더 가깝다’ ‘어류라는 범주는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 

지은이 룰루 밀러는 ‘물고기’는 없다는 사실, 즉 어떤 것도 확실하거나 고정된 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유로워진다. 그러면서 사랑을 잃게 된 ‘실수’의 기원에 양성애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자리잡고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를 부정할 수 없다. 불운을 피할 재간도 없다. 하지만 진화 과정에서 퇴행한 낙오자라며 조던이 그토록 무시했던 멍게가 실제론 척삭이라는 척추와 비슷한 구조물을 가장 먼저 선구적으로 갖춘 생물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감히 누구를, 무엇을 얕잡아볼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누가 나를 함부로 얕잡아볼 수 있단 말인가. ‘정신질환자’로 불리는 이들 역시 열등한 대접을 마땅히 받아들여선 안 된다. 폭죽처럼 또는 폭탄처럼 터지는 생각들이 무작정 ‘비정상’에 구획돼 교정돼야 하는 '절대적 오류'일까. 

“자연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운,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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