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저항하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 짓밟게 돼 있어요. 저항은 전문가주의에 대한 경고예요”
[인터뷰] “저항하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 짓밟게 돼 있어요. 저항은 전문가주의에 대한 경고예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3.02.0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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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문 제3대 국립정신건강센터장 인터뷰
센터장 연임 못 됐지만 자유로워져...국립센터 더 새로워질 것 기대해
부임 3달 뒤 불어닥친 코로나19에 눈앞이 ‘캄캄’...운명이라면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
국립센터 음암병동 같은 세팅이 전국적 스탠다드로 보편화되기를 희망해
조선 민중은 세계적으로 도덕적 성향 높아...대동사상에 기반한 민족 심성
감염병 팬데믹 또 있을 가능성 높아...사회복지 우선시하는 정치로 바뀌어야
정신질환 이유로 병동 입원 차단은 편견...음압병실 만든 건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
가시적 질환에서 비가시적 질환으로 담론 이동 중, 물질 풍요가 정신 결핍 만들어
관계를 통해 결핍을 채우려는 건 본질 아냐...타자의 평가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꼰대’는 타자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너져...하지만 그들도 존중해야
민주주의는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희생 따라...편한 방식으로 작동 안 해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이영문(61) 제3대 국립정신건강센터장은 지난 2019년 11월 부임했다. 그리고 3개월 후, 코로나19가 터졌다. 2020년 2월, 경북 청도대남병원에서 20년째 입원해 있던 65세의 남성이 코로나19에 의한 감염으로 사망했다. 한국의 첫 공식 사망자였다. 그리고 같은 병동에 입원해 있던 100여 명의 정신장애인 대다수가 코로나19에 감염됐다.

종합병원 등은 이들의 입원을 막았다. 감염자이지만 정신질환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정신장애인 환자들은 보편적 치료 시스템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국립정신건강센터(국립센터) 상황은 이 센터장을 중심으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비대면으로 전국 4개 국립병원장들과 상시적 회의를 진행했고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감염된 정신장애인들을 ‘최후의 아지트’처럼 국립센터로 소개했다.

이후 국가는 국립센터에 정신질환과 내외과적 질환을 함께 치료할 수 있는 음압병동을 개소하게 된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 수면 아래에 있던 차별과 배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 배제의 가장 밑바닥에 정신질환자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한 것이다. 전염병은 모두에게 평등한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줬지만 그 죽음은 사회적으로 가장 낙인찍힌 정신장애인들의 삶의 문을 먼저 두드렸다. 전염병 시대는 그렇게 도래했고 지금,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 센터장은 부임하면서 코로나19를 맞아야 했고 이제 잠잠해지니 센터장 임기가 끝나고 있었다. 운명도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임기 말이면 통상 휴가를 떠났다 오는 게 관례지만 임기 만료 한 달여를 남겨 두고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대통령실에서 그를 찾았고 그는 국가트라우마센터를 작동시켜야 했다. 사실상 쉬지 못하고 임기가 끝났다.

이 센터장은 지난해 11월 임기가 만료되면서 센터장 연임에 지원했다. 하지만 전 정부 기관장들을 이번 정부가 ‘솎아내고’ 있다는 풍문들이 들려왔고 결국 그는 연임에 이르지 못했다. 그와는 임기 초반에 한 번 인터뷰를 했었다. 그때 그는 말했다. “행복은 느끼는 거지 추구하는 게 아니에요.”

기자는 그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그가 느꼈던 정신보건의 문제, 인간의 문제, 철학의 문제, 정신의 문제 등 모든 것을 어떤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온전히 우리만의 이야기로 나누고도 싶었다.

인터뷰를 요청하고 지난 1일 이 센터장이 살고 있는 분당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는 청바지에 붉은 목폴라를 입고 기자를 맞았다. 아파트 18층, 최고 꼭대기의 복층으로 된 윗층에는 그의 서재가 꾸려져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책을 읽고, 사유하고, 고독을 즐기고 있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책상 한쪽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놓여 있었다. 다음은 일문 일답.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아주 백수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책임감 이런 걸 다 떠나서 개인의 시간을 아주 잘 보내고 있어요. 공부도 하고.”

-보고 있는 책은요.

“이정우 선생이 쓴 세계철학사. 한국인에 의해서 쓰여진 최초의 철학사죠.”

그가 일어나 책장으로 가 책 몇 권을 갖고 왔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캉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프로이트 전집, 푸코의 <광기의 역사>, 주로 인문학과 정신분석을 연결하는 책들이죠.”

-젊었을 때 보던 책하고 지금하고 깊이가 달라진 겁니까.

“깊이가 많이 달라졌어요. 그때도 칸트 책을 읽어보려 했지만 전혀 안 읽혔고. 40년째 읽고 있는데 장 그르니에의 <섬>이라는 책이 있거든요. 예전에는 지루했던 책인데 이제는 읽으면 팍팍 꽂히죠. 아무 데나 펼쳐도 그림처럼 쑥 들어와요. 그래서 제가 사람들에게 제일 잘 안 사주는 책 중의 하나죠.”

-잘 안 읽히니까?

“내가 경험한 것처럼 뭐 이런 고리타분한 책을 읽나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웃음). 충분히 읽어볼 만한 사람에게만 사 주려고.”

-3대 국립정신건강센터장(국립센터장)으로 일했습니다. 소회가 궁금합니다.

“국립정신건강센터 직원들과 국립병원 관계자들, 전국의 정신보건 관련 기관들이 헌신해준 덕분에 큰 과오 없이 3년을 잘 마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센터장 되지 못해서 서운함도 있겠습니다.

“서운함보다는 자유로워진 데 기쁨이 더 크죠(웃음). 고생한 국립센터 직원들의 열망들이 많았던 거 같은데 그 점에서는 못 돌아가서 미안하죠. 하지만 새로운 체계에서 또 앞으로 가죠. 퇴임사 때 했던 것처럼 센터는 우리나라 정신보건의 클래식으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에 섭섭한 거보다는 새로워지는 데에 기대감이 있죠.”

-취임하고 3개월 뒤인 2020년 2월 청도대남병원 입원 정신과 환자가 사망했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하늘이 캄캄했죠(웃음). 그때는 세계가 공포에 떨 때니까요. 우한(武汉)시의 죽어가는 시체들이 먼저 보여지는데 같은 상황이 한국에도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거든요. 거기다 국립센터 들어선 지 3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에요. 이걸로 인해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더 생겨날까봐 (두려웠죠).

(감염된 정신질환자를 국립센터가)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했을 때 우리는 내과적인 장치가 없으니까 정말 하늘이 캄캄했어요. 그나마 용기를 받았던 건 내가 센터장으로 있으면서 이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라면 감내해야겠구나(였어요).”

-그 사건 이후에 국가가 정신장애 문제를 되돌아본 계기가 된 것은 아닐까요.

“계기는 됐지만 현재까지 가시적 성과는 없죠. 정신장애인들이 입원해 있는 낙후된 시설에서의 집단 수용이라든지 어떤 (정신질환자 사건이 나면) 이분들을 집으로 적절하게 돌려보내지 못하는 문제. 감옥과 같은 상황이잖아요. 여기에 문제가 제기된 거는 사실이고요. 그런데 이걸(팬데믹은) 잊지 말아야죠. 그래서 국립센터와 같은 정도의 세팅을 대한민국에서 보편적으로 구성하도록 우리가 스탠다드가 됐으면 해요.”

-취임하면서 코로나19가 터지고 퇴임하니 코로나19가 잠잠해졌습니다. 교수님의 센터장 운명이 얄궂다는 생각이 듭니다.

“끝날 때 그냥 그만둔 게 아니에요. (지난해) 10월 29일 밤 12시 이태원 참사가 터졌죠. 제가 퇴임식을 11월 10일 했으니까, 보통 퇴임 마지막에 휴가 쓰고 그러거든요. 휴가를 써야 되는데 대통령실에서 밤에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임기 나머지 한 2주간을 이태원 참사 문제 해결에 시간에 다 쓰게 됐죠.”

-트라우마 치유해 달라고 대통령실에서 전화가 온 겁니까.

“네. 이태원 참사 때 국가트라우마센터를 운영해야 되니까요. 긴급하게 회의도 돌아갔죠. 우스갯소리로 제 임기는 코로나로 시작해서 이태원 참사로 끝났다(웃음).”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코로나19 현상이 폭증할 때 개원 전문의들이, 자기 진료도 마다하고 현장으로 달려간 것이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대동사상(大同思想)의 이타적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전국의 많은 의사들이 대구에 몰려가서 초기 진압에 큰 도움을 줬죠. 우리도 정신과 분야에서 국립센터 직원들과 4개 국립병원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가서 일을 했죠. 현장에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도와준 건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에 내재돼 있는 공동체 의식이 작동된 거라고 봅니다.”

-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우리 민족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민중이라고 했죠.

“동의합니다. 한 번도 다른 민족을 공격한 적이 없고요. 중국처럼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개념도 우리한테는 없었고 유럽 전역은 근대 이후에 백년전쟁, 종교전쟁이 있었지만 우리는 종교전쟁이라는 게 한 번도 없었죠. 침략 전쟁도 물론 없었고요. 그리고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정의가 뚜렷한 민족이에요.

서구철학에서 선과 악의 개념은 중요했거든요. 그리스 철학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했다면 이게 기독교가 성립되면서 선과 악으로 바뀌거든요. 우리 한국인에게는 유교와 도교, 불교와 샤머니즘이 결합돼 있는데 조선 성리학은 명나라 망하면서 사상의 정통 뿌리가 조선에서 성립됐어요.

성리학을 고리타분한 학문이고 남녀 차별하는 사상을 마구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아주 일부분이에요. 조선 시대 말기에 권력층들이 그걸 사유화한 거지 원래 사상은 굉장한 올바름이거든요. 퇴계 이황 선생도 남녀차별하지 않았고 정약용 선생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점에서 우리 정신에는 정통 성리학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봐요.

이게 서구 학문들이 무자비하게 들어오면서 일제 시대에 학문적 변질이 엄청나게 많이 됐거든요. 그걸 아직 극복 못 한 것이 굉장히 많죠. 학문적 사대주의가 그걸 나쁘게 부각해서 그렇지 4000년 역사를 훑어보면 안병무 선생이 말씀하신 인간의 인간다운 조건들에 대한 사유를 자연적으로 우리는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코로나19에 대한 집단적 경험은 인류에 어떤 의미를 던져줬다고 생각합니까.

“인류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에 대한 경고죠.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 현상은 앞으로 또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새롭게 출현하는 어떤 병원체가 전 세계를 전염병으로 또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한 사회에 대한 희망, 지속가능한 사회를 추구하게 되겠죠.

한국은 정치경제에 비해 보건과 복지를 낮게 생각해요. 이게 역전돼야 합니다. 정치경제 체제 목적이 안전과 사회복지를 우선시하는 정치로 바뀌어야 합니다.”

-중국이 비밀리에 진행한 세균전 시험 과정에서 우한폐렴이 발생하고 코로나19가 시작됐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일국의 욕망 때문에 애꿎은 인류가 고통당하는 것 아닌가요. 거기에 왜 전체 인류가 공동으로 반성해야 한다고 강요당해야 합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죠. 저는 매우 동의하기가 어려워요. 반대로 돌이켜 생각하면 2003년에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발생했을 때 사스에 대한 원인은 그때도 규명이 어려웠어요. 천연두는 1978년쯤에 박멸됐다고 선언했거든요. 하지만 스몰팍스(smallpox)라고 하는 (천연두) 바이러스는 여전히 세계보건기구(WHO) 본부에 있고 미국 질병관리본부에도 있고 러시아에도 있습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문제는 또 만들어질 거에요. 핵과 파급력이 같아요. 핵은 국지적일지 몰라도 팬데믹에서는 바이러스가 더 위험하죠. 그래서 우한시에서 시작됐다고 할지 몰라도 그것이 원인이라고 규명하기에는 너무 어렵죠.

한 지역에서 발생한 걸 왜 전 세계가 고통스러워해야 하냐는 논리는 사고의 비약 같아요. 우크라이나 전쟁은 침공이 명백하잖아요. 이 같은 확실하게 원인을 알 수 있는 걸 빼놓고는 하나의 로컬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모순의 문제라고 얘기하는 건 바이러스 문제에서는 어렵다고 봅니다.”

-교수님은 음압병동과 관련해 치료 효율성을 위해 특정 치료군만 분리시켜 입원시키는 사례를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신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일반 병동에 입원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편견이죠. 코로나에 감염됐는데도 불구하고 종합병원에 입원 못 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코로나 양성인 정신질환자 병동을 따로 만들게 된 거죠. 코로나병동을.”

-그게 차별입니까?

“일반병동에서 내과적인 문제로 수용을 했으면 돼요. 내과적인 문제, 외과적인 문제가 있는데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종합병원에 입원을 못 한다면 엄청난 편견이고 차별이죠. 우리가 전 세계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음압병실이라고 선전은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그런 사정 때문에 만든 거죠.”

-40년 전까지만 해도 정신과 의사하겠다고 하면 지원한 의사(전공의)까지 정신장애인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신과 전문의 지원율이 가장 높습니다. 이런 현상이 생긴 이유는 뭘까요.

“눈에 보이는 질환 중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질환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각이 옮겨간 거죠. 철학적 담론으로 치면 지극히 물질적인 의학의 시대에서 물질적인 것이 아닌 형상, 그러니까 하나의 사유에서 생기는 병들이 많아진 것으로 봐야 되거든요. 물질의 시대에 결핍이 오는 건 정신이거든요. 물질이 많아질수록 정신은 결핍되게 돼 있어요. 이건 철학의 역사에서 늘 반복되는 겁니다.”

-먹고 살 만하니까 이제 정신으로 옮겨갔다?

“쉽게 말하면 그렇고 물질의 풍요가 정신적 결핍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지나친 책임감, 성실함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걸 왜곡하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말고 약게 살아라는 말로 들릴 수 있죠. 20세기가 감염 질환이나 신체질환 중심이었다면 21세기는 우울, 불안과 같은 자기 내부의 문제로 힘들어지는 시대라고 규정하거든요. 심리학의 시대로 규정을 하죠. 물질이 부족한 시대에는 정신이 좀 더 그 빈 곳을 채워요. 그러다보면 정신 자체에 대한 것이 폭넓어지죠.

남들에 공감할 줄 알고 자기 자신을 충분하게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요. 그런데 지금은 자기 성과에 대해 스스로를 비난하고 ‘내가 왜 요것밖에 못 했을까’하면서 남들과 비교하죠. 시인 나태주 선생의 시에 그런 게 있어요. ‘괜찮다 넌 충분히 했어 그걸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 돼’.

자기만족이 안 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무한한 책임감을 강조하다 보면 자기만족을 모를 수 있다는 걸 제가 역설로 이야기 한 거지 책임지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웃음).”

국립정신건강센터 전경. [사진=연합뉴스]
국립정신건강센터 전경. [사진=연합뉴스]

-노자는 세계의 의미를 성실함에 두었습니다. 변함없이 오는 사계절이 그렇듯이 인간은 성실함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성실보다는 자연의 섭리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죠. 봄이 오면 여름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또 가을이 오고. 그렇다면 오늘 부족했던 것이 내일은 채워질 수 있고 오늘 내가 책임지지 못했던 일이 내일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쪽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거죠.

오늘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일이 되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나태주 선생의 시구(詩句)는 아주 적절했다고 봐요.”

-자기 본위적으로 못될 만치 자기만 생각하라, 개인과 조직의 갈등이 있다면 개인의 욕망을 따르라고 조언했습니다. 정신장애인들처럼 마음이 여린 이들이 이런 걸 실행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힘들어지는 건 대부분이 관계 때문이거든요.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고 자기에 대해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면 관계로부터 오는 것에 대해서 우쭐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죠. 남들이 칭찬하는 데에 놀아나지 말고 비난하는 것에도 놀아나지 말라고 동양에서 수없이 얘기했는 거고요.

서양철학에서는 이런 식으로 안 가르쳐요. 남들의 욕망, 즉 타인의 욕망을 우리가 욕망하는 존재라고 정의를 하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쇼펜하우어는 혼자 있는 것을 세상의 즐거움으로 여기라고 단호하게 말하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남의 인생이나 비난에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거꾸로 나는 우리 정신장애를 앓는 이들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봐요. 그래서 관계를 맺으면서 뭔가에 참여하고 싶고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는 건 맞아요. 그렇다고 해서 관계를 통해 사람의 마음이 채워지는 거는 본질적으로는 아니거든요.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그 칭찬이 나한테 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남의 칭찬으로 내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아니라는 거죠. 늘상 남들의 평가로 내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 끌려다니는 삶이 되죠.”

-저는 주변 사람들은 참 잘 됐는데 저는 실패하고 낙망하고 좌절하고 그랬습니다만.

“낙망할 필요가 없죠. 잘된 사람도 어떠한 고민이 있을 거예요. 그들도 때로는 좌절할 것이고 그걸 우리가 못 볼 뿐이지. 현재 상태를 놓고서 비교하면 남들은 쉽게쉽게 잘 가는 거 같은데 왜 나만 이러나 이런 생각 많이 하게 되죠. 거기에 안 빠지기 위해서 고통스러워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려는 작업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자기존중은 필요하되 자기연민은 사실 불편해요. 자기연민을 버리고 자기존중을 키워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죠. 그게 남의 칭찬이나 비난으로 자기존중감이 형성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봐요. 물론 어린 시절에 비난을 많고 받고 큰 애가 자존감이 낮다는 건 그 자체는 맞아요.

그러나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존감이 낮아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극단의 정신질환을 앓았던 분도 회복이 될 수 있는 거죠. 타자와 관계하고 대비했을 때 자기 본위적으로 생각하라 이런 뜻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건강한 삶으로 사랑과 일을 언급했습니다. 저는 사랑과 노동이 치유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정신질환으로부터의 치유는 어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치유는 내부에서 오는 거죠. 우리 모두는 치유의 내재적인 능력을 다 갖고 있어요. 물리학과 사회학에서 쓰이는 레질리언스(Resilience·복원력) 용어가 있는데 용수철의 되튀김 현상이거든요. 억누르는 힘만 없으면 자연적으로 회복돼요. 자연생태계에서 에코(eco)와 연결된 파생된 단어들이 많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다 자연발생적인 회복력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노동을 하는 이유도 자기 내재적인 복원력을 위해서 하는 거고 사랑도 자기 복원력을 위해서 하는 거죠. 복원력만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면요. 그래서 프로이트는 일과 사랑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일은 능동적인 노동이 있고 수동적 노동이 있어요.

프로이트는 능동적 노동을 하는 존재로 본 게 맞아요. 그건 프락시스, 즉 실행이죠. 인간은 원래 수동적 노동을 하는 존재는 아니에요. 강제된 것에 대해서는 본성이 거부하게 돼 있어요. 본성이 거부하는 걸 억지로 해야 하니까 병이 나는 거지.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하는 이유는 지극히 맞는 말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일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사회성을 염두에 둔 이야기죠. 인간의 본성에 맞게끔 하라고 그런다면 그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는 거죠. 그게 가장 자기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거죠.”

-군복을 입은 태극기부대 노인들을 보면 그 심리가 늘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자기 존재가 가장 빛났던 시절이 군 복무 때였고 거기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권위주의 시대의 군 복무는 더 그렇고요.

“프로이트를 차용하면 인간은 전진만 하는 것이 아니고 퇴행도 하거든요. 퇴행을 할 때는 인생에서 가장 안전했던 지점으로 퇴행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술을 먹거나 힘들어졌을 때는 어린애와 같은 행동이 나타나요.

몸이 아프면 누군가가 나를 돌봐주던 아기 때로 돌아가는 거죠.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로 가라고 하면 각자 다르지만 빛나는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실제 군대 생활을 했던 이들이 자기가 장교 시절이나 빛나던 시절로 돌아가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위에 나가고 싶은 거죠.”

-장교가 아니라 일반 병사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죠. 주로 해병대 한 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때가 제일 아름다웠다, 본성으로 보면 그렇죠. 두 번째는 집단의식이죠. 집단의식은 다양성을 없애고 다 동일하게 됐을 때 가장 힘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제복이 갖고 있는 힘에 기대 같이 맞춰 입는 거죠. 노동자들 시위할 때도 똑같은 옷 입고 하잖아요. 의사들도 파업할 때 가운 입고 동일하게 하잖아요. 의사들 가운 입고 시위에 참석하는 거나 군복 입고 시위에 참석하는 거나 저는 같은 맥락이라고 봐요.”

-교수님은 꼰대 개념으로 권위와 위선으로 뭉쳐진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묻어둔 채 생존하기 바빴던 세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한 채 살아남았다고 했어요. 이들이 성조기를 들고 있는 태극기 부대 노인들이 아닐까요.

“일부가 그렇겠죠. 그런데 그들도 존중받아야 될 권리가 있어요. 당연히 그들도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했던 분들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남들이 몰라준다는 생각이 강하죠. 꼰대들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권력의 주체라는 걸 나타내려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이런 마음이 있어요. 그걸 반대로 뒤집으면 상대방이 내가 이런 사람인 걸 몰라줄까 봐 하는 두려움이 있는 거죠.

권력이 세다는 건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욕망과 권력이 휘둘러졌는데 이게 콘트롤이 안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있습니다. 이게 속성이에요. 그래서 꼰대들이 느끼는 이중성에는 두려움이 바탕에 깔려 있어요.

그래서 제가 꼰대들이 주변에 있으면 꼰대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게 가장 꼰대들이 무서워하는 겁니다. 나를 두려워하게끔 권력을 휘두르는데 나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러면 꼰대는 당황하게 되죠. 처음에는 화도 막 내고 했는데도 계속 두려워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너지게 돼 있죠.

이게 독재 세력들이 했던 방식과 똑같잖아요. 꼰대를 독재라는 큰 틀로 본다면 독재를 마음대로 하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저항을 했죠. 과거 민주화운동이 그렇죠. 스스로 무너져요. 이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죠.”

-교수님 세대에는 아이들이 어른에게 함부로 못 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뒤집혀서 애들이 꼰대 어른들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좌절한 이들이 군사독재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곤 합니다.

“A가 틀렸기 때문에 B가 맞다는 거죠. 그 때문에 군사독재 시절이 좋았다는 건 틀린 거죠. 그 말은 내가 노예의 삶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불안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도 보면 그렇지만 주어진 것을 누릴 때는 불안하지 않아요. 시키는 대로 할 때는 불안하지 않고요.

실제 불안의 발달된 개념으로 보면 농노제도가 무너지고 나서 스스로가 다 땅을 갖게 됐을 때 인간이 더 불안해졌다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문헌적으로 그렇게 나오는데 언뜻 생각하면 내가 땅을 안 가져야 불안하지 않겠네, 그냥 소작농으로 살 때가 더 불안하지 않고 좋은 거 아닌가? 그건 단편이죠. 그건 불안이 나쁘다고 생각했을 때 얘기고, 생각하는 자유인은 그렇지 않죠.

로마 시대, 그리스 시대의 자유인을 생각하자면 (지위가) 귀족 다음 아닙니까. 자기는 세금도 내야 되고 군납도 해야 되고 그리고 투표도 하고 권리도 갖고 있죠. 그러니까 적절하게 자기 존중감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불안감을 어느 정도 갖고 있어야 되는 거에요. 삶 자체가 불안이잖아요. 그걸 존재론적 불안이라고 표현하는 건데 내가 존재함으로써 불안한 거죠. 그걸 받아들여야죠.

그리고 불편한 것하고 불안한 것하고 구분을 해야죠. 그래서 불편하다는 것은, 아까 말한 꼰대들의 항변은 옛날 세상보다 지금은 많이 불편해졌어 이거죠. 그래서 밑에 애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말하는 건 스스로 내가 꼰대라고 하는 이야기죠. 지금 세대들은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세상이 작동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인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젊은 세대들이 원하는 대화 방식, 일하는 방식, 노는 방식 그것을 이해해야 되는 거에요. 그게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거지. 오늘 회식 있으니 가자, 이제 안 통하죠. 항상 문제는 어디에 있냐면 현실의 자기 자신에게 놓여 있는 거거든요.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들의 사고에도 그런 게 있어요. 학생 시절에 내가 민주화운동을 해서 고문도 당하고 했는데 이걸 세상이 몰라줘. 나는 민주화운동했던 사람이라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이것도 꼰대거든요. 제 주변에도 많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만든 나라인데 하면서요.

저는 태극기부대를 보면서 그 노인들이 각자의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나타내는 건 존재를 나타내는 거거든요. 다만 문제가 되는 건 그 과정에서 이유 없는 폭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경찰을 마음대로 밀어제치는 거,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이유 없는 폭력이죠. 법과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거라면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라고 생각해요.”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칸트는 자기 이성으로 사유하는 것에 용기를 내라고 요청했어요. 우리 사회는 지금 노예근성을 가진 이들이 집단화돼 태극기 들고 광화문에 모이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광기 아닐까요.

“그들에게는 그 인생이 보상받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있죠. 자기 성찰에 대한 기회를 놓쳐버린 이들의 항변일 수 있어요. 안타까워요. 우리의 논리를 얘기하고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본인들의 욕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저는 거꾸로 요청하고 싶어요. 그걸 견뎌낼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거죠.”

-사랑이 치유의 한 부분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어렵네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여전히 모르죠. 특히 남녀 간의 사랑, 이성이나 동성 간의 에로스적 사랑. 사랑의 정의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냈는데 정신분석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해요(웃음).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Falling in love is the only socially acceptable psychosis(사회적으로 용납 가능한 유일한 정신병이다)’이에요. 제정신인 상태로는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거죠.

정신분석에서 사이코시스(psychosis·정신병)라고 썼지만은 매드니스(madness·광기)죠. 그러니까 치료를 받아야 할 광기도 있지만 치료가 거부되거나 치료할 수 없는 광기도 인간에겐 있는 거니까. 사랑이 그런 광기에 의해서 사실은 도움을 받는 거죠.”

-그래도 사랑을 해라 이런 말씀입니까.

“아주 이성적인 상태 때는 남을 위해서 뭔가를 못 해요. 왜냐하면 내가 손해 보고 힘들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사랑에 빠진 상태 때는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상태에서 할 수 없는 행위도 하는 거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밤을 샐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아프면 자기도 모르게 아프고 그러죠. 이상하잖아요.

아기가 아픈데 아빠는 옆에서 쿨쿨 자고 엄마는 밤새도록 잠을 못 자요. 엄마가 갖고 있는 도저히 남성들이 따라갈 수 없는 모성애. 그 모성애는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되죠. 엄마와 아이가 한 마음이 돼 있는 거죠. 그 힘으로 유아기, 걸음마 시기를 다 이겨내는 거죠. 여섯 살 될 때까지 절실한 보호와 사랑을 받으면서요.”

-상처받아도 사랑을 해라, 이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많은 인문학자들이 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플라톤은 사랑하지 않았어요. 지극히 이성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고 하는 건 머리로만 사랑하는 거거든요.

그럼 플라토닉 러브가 존재합니까? 당연히 존재하지만은 그건 사랑의 실체에서 아주 일부죠. 그건 또 육체에 대한 것을 폄하한 이야기거든요. 인간이 정신이 있고 육체가 있으면 정신적인 사랑이 더 위대한 사랑이라고 플라톤은 본 거죠. 그러나 육체적 사랑 또한 중요하다는 걸 간과한 거죠.”

-우리 민족의 도전성과 적극성, 창조성을 생각할 때 향후 10년 이내에 정신건강 관련 치료와 서비스, 인프라가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안 그렇다고 봐요. 서양이 더 낫다는 관점은 아니에요. 서구 역사가 더 낫다는 점은 아닌데 거꾸로 정신에 대한 편견이 서구보다는 합리적으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정신보건 분야 시스템이 월등하게 높아졌을 때 제3세계에서 우리를 배우러 오지 않을까요.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죠. 지금도 많이 오고 있고요. 그런데 정신보건 분야는 극과 극으로 양극화되어갈 것으로 봅니다. 최첨단의 약물학적 치료라든지 진단법은 판을 칠 거에요. 그러나 사람에 의해서 사람을 돌보는 시스템인 멘탈헬스 서비스의 고유의 성질이 있잖아요.

이건 수가의 문제, 사회적 환경의 수용 문제가 같이 발달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거든요. 물질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은 점점 발전할 거에요. 좋은 약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보다 더 빨리 쓸 거고요. 미국이 그런 지수를 갖고 있어요.

미국은 최첨단의 의료를 갖고 있지만 반대로 최악의 보건 지표를 갖고 있거든요. 우리나라보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의료보험이 인구 70%밖에 못 갖고 있고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미국보다 좋은 의료시스템을 갖고 있죠. 전문의에 대한 접근도 쉽고요.

그런 변수들이 있는 반면에 차별 없이 정신질환에 관계된 수가 제도는 의료급여를 포함해서 굉장히 낮잖아요. 동일한 행위에 비해서 경제적 측면에서 우선순위가 낮게 책정돼 있어요. 이런 것들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만 된다면 충분히 OECD 국가 중에서도 선진 시스템으로 갈 수 있죠. 그런데 나는 이걸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봐요. 이걸 바꿀 수 있는 힘은 당사자주의에 있다고 봅니다. 전문가주의로는 이걸 못 바꿔요.

노인 케어 문제의 속도가 빠르게 좋아지는 이유는 노인들이 직접 요구하고 그들이 참정권을 갖고 투표하기 때문이거든요. 신체장애인운동도 마찬가지잖아요. 서울 전철역 전역에 엘리베이트가 깔리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시위들이 있었고 수없이 많은 이들이 희생이 있었어요. 역설적으로 편한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게 민주주의입니다.

민주라는 말이 굉장히 순차적이고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고 착각들을 많이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모든 혁명에는 피 냄새가 난다, 김수영 시인이 말했죠. 이미 4·19혁명이 있은 다음에 그 이야기를 했죠. 많은 희생이 따른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당사자주의가 더 강화되고 그것이 정치적인 형태를 띌 때 힘이 되거든요.

이탈리아의 바잘리아는 전문가들과 당사자들, 사회개혁가들과 정당 조직, 이게 다 결합된 형태로 운영했잖아요. 그걸 통해 연합정권이 성립될 때 바잘리아 정신보건법을 제정하고 실행시켰던 거죠. 결국은 그런 테제로 주제로 만들어져야만 가능하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까.

“제가 2012년에 아주대 의과대학을 나오고 나서도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에 강의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했었고요. 의과대학에서 가끔씩 특별강의는 했어요. 2016년 이후에는 아주대 인문대학에서 특임교수를 했고 2018년부터는 연세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겸임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겸임교수를 하면서 2학기에는 사회복지대학원하고 신학대학원에서 강의를 합니다. 교수라는 게 딴 게 아니고 학생들하고 공부를 계속 같이하는 거잖아요. 그 일은 게을리 한 적이 없어요. 지금도 의과대학보다는 인문학 쪽으로 하는 강의가 더 재밌죠. 계속할 생각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힐 때 제자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자며 탈옥을 권유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해요. 내가 아테네의 젊은이들하고 토론하고 대화하는 이 기쁨을 두고 외국에 나가서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요. 그 말이 생각나는데 교수님도 그런 경우입니까.

“강의를 하고 가르치는 거는 역으로 배우는 거죠. 10년 전 아주대 의과대를 나올 때 만든 치료공동체 연구소가 협동조합 형태로 있거든요. ‘소통과담론’이라고 이걸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지금은 느슨한 연대로 해왔다면 수원에 정착해서 좀 더 소통과담론을 중심으로 한 치료공동체를 하고 싶어요. 뭘 지향하냐면 정신건강과 인문학, 문화의 결합을 도모하는 겁니다. 그걸 통해서 공부를 할 생각입니다.”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이영문 전 국립정신건강센터장. ©마인드포스트.

-은퇴 선언까지는 좀 멀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토킹큐어(Talking cure)가 본질인 정신과가 다른 과하고 구분되는 점을 꼽으라면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걸 좋게 얘기하면 사이키애트릭 인터뷰(psychiatric interview)라고 하죠. 혹은 사이코테라피(psychotheraphy)라고 표현하고 이걸 번역을 할 때는 심리치료라고 하고 심리상담이라고도 하죠. 어쨌거나 토킹큐어, 말과 말로써 사람을 치유하는 분야가 정신과죠. 토킹큐어를 좀 더 극대화할 수 있는 그런 치료를 하고 싶어요.”

-폭압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장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본주의라 그러면 사실 좋은 의미도 들어가 있으니까 좀 거칠게 표현해서 ‘자본화된 사회’라고 할게요. 자본주의는 원래 좋은 성찰을 갖고 있어요. 자본화된 사회라고 표현을 한다면 사회 자본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사회라고 표현할게요. 그런 사회일수록 약자들은 항상 피해를 받아왔어요.

팬데믹 상황이 아니더라도 자본화된 사회일수록 생산성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은 더 커질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면 자본화된 사회에서 그래도 해야 될 부분들을 해야죠. 유럽이 수없이 많은 전쟁과 내부적인 싸움을 통해서 만들어낸 게 사회주의적 담론이거든요. 그래서 의료와 교육체계가 사회주의 체제로 간 거죠. 스웨덴을 포함한 북반구에서 사민주의가 발전하게 된 거고요.

그래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양쪽의 역사들에 주의(ism)라고 하는 이념이 들어간 것은 역사가 150년밖에 되지 않아요. 그렇지만 이미 코뮤니즘에 대한, 공동체적인 돌봄 베품의 역사는 굉장히 깊어요. 과거에는 그런 자본화된 사회가 없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지금처럼 자본이 극대화된 사회는 인류 역사에 없었어요.

그때도 자본이 있는 사람들은 조세 제도 등을 통해서 그걸 갖지 못한 사람들을 반드시 돌볼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낸 거에요. 우리 조선 역사에서도 똑같이 있습니다. 민중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정전제, 민중들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었던 혜민원 병원 시스템 이런 것들도 늘 있어왔거든요.

생산을 통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거는 즉각적인 재화가 될 수 있는 자본이 있고 사회적 자본이 있잖아요. 즉각적인 재화는 아니지만 이것이 재화 못지않게 동등한 가치를 가진 자본. 예를 들면 신뢰, 함께하는 거. 그걸 통해서 다음 생산성이 이어지는 거죠. 그런 것들을 좀 더 키워나가는 일을 같이해야겠다 생각해요.”

-그걸 통해서 정신장애인들이여 단결하라, 저항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싶은 겁니까.

“저항해야 될 것이 있으면 저항해야죠. 불편했던 것, 부당했던 것들을 이야기해야만 인간이죠. 인간은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할 줄 알고 거기에 대해 압력이 왔을 때는 저항하는 힘을 가진 본성이 있는 존재예요. 정신장애를 앓았다고 본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방식은 프로테스트(Protest·저항)하는 거죠. 당연히 인간이니까.

저쪽에서 나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데 내가 프로테스트를 안 해? 그럼 저쪽은 계속 짓밟게 돼 있어요. 그건 프로페셔널리즘(전문가주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해요. 전문가주의에 의해서 사실 많은 부분이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많았죠.

예를 들면 검사들의 논리에 있어서 검사들이 죄가 있다고 하면 다 죄가 있는 건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의사들이 이게 치료가 됩니다, 안 됩니다를 왜 자기들이 결정해요? 진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진단은 다이어그노시스(diagnosis)잖아요. 그노시스(gnosis)는 안다는 거잖아요. 다이어(dia)는 둘이 안다는 거고.

환자와 의사가 있으면 환자의 병에 대해 의사가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진단을 내리는데 다이어그노시스라고 둘이 알아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다이어그노시스를 안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데 당신의 병은 이거 같은데 이게 맞습니까. 엑스레이를 보면 여기에 뭐가 있고 조직 검사해 보니까 결과가 이렇게 나왔습니다라고 하죠. 30년 전만 해도 이렇게 했습니까? 안 했죠. 검사 결과도 보여주지 않았어요. 제가 레지던트 때는 환자들이 자기 검사결과에 대해서 잘 몰라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 지금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얼마인데 선생님 무슨 약 씁니까 다 알고 오잖아. 정신과에 대해서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정신보건센터를 처음 시작했을 때 1990년대 후반에 내가 그랬어요. 각자가 질병 진단명과 먹고 있는 약을 알아와라. 주치의한테 가서 다 알아와라. 사이코 에듀케이션(psycho-education·심리교육)할 때 내가 그렇게 가족들한테도 얘기하고 당사자들에게도 그랬어요.

그러면 어떤 환자는 가서 알아오는데 어떤 분들은 갔는데 의사들이 안 가르쳐준다는 거야. 왜 안 가르쳐주냐라고 하니까 그 약만 빼고 먹으면 어떡하냐고 그래. 그래서 그건 틀린 말이니까 가서 다시 정중하게 물어와라. 그래도 안 가르쳐줘. 그럼 내가 주치의를 바꾸라고 그랬어. 그 사람 의사로 자격 없다고.

물론 그것 때문에 안 좋은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환자들한테 약을 가르쳐달라고 해 가지고 안 가르쳐줬더니 주치의를 바꾸라고 그랬다. 저런 건방진 사람이 있냐. 그때는 혈기도 왕성했고. 그러니까 이런 다이어그노시스의 본질에 맞게끔 내가 정당하게 치료받고 있는가를 알 권리가 있고, 알아야 된다고 주장해야죠. 그런 시대로 가야 된다는 거지.

당사자들이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서 무조건 싸우자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권위나 억압에 대해 부당하다고 얘기할 줄 알아야죠.”

그와 나는 담배를 뻑뻑 피웠다. 이윽고 그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집 인근의 한 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우며 무추름하게 서로의 빈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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