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중 교수의 서평] “여기 우리가 있다”
[백재중 교수의 서평] “여기 우리가 있다”
  • 백재중
  • 승인 2020.06.02 1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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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중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자유가 치료다’ 이후 2년 만에 신간
정신장애인 격리 수용 패러다임 현재진행형
수용 주체와 공간 바뀌었지만 억압이라는 본질은 그대로
코로나19로 정신장애인의 열악한 수용 환경 드러나
정신장애인 인권 방치해온 국가가 제 역할 해야
격리 수용에서 뉴노멀·새 패러다임 열어야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지역사회 연대·응원 필요

정신장애인 수난의 역사는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 복지의 이름으로, 의료의 이름으로 당사자에게 가해진 폭력의 역사입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정신장애인 ‘격리 수용’ 패러다임은 견고하게 유지되었습니다.

국가는 항상 뒤에 숨었습니다. 무책임과 방치는 국가폭력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이제 격리 수용에서 지역사회 복귀와 통합으로 정신 건강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는 온전히 국가의 책임입니다.

2018년 『자유가 치료다』 출간 이후 2년 만에 『여기 우리가 있다 – 대한민국 정신장애인 수난사』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앞 책이 이탈리아 얘기라면 나중 책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과거와 현실에 관한 얘기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과정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정신장애인의 희생이 유난히 컸습니다. 이는 폐쇄되고 환기가 안 되는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밀접하게 지내야 하는 생활 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친 듯합니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사회 관심 밖에 놓여 있던 정신장애인의 현실이 코로나19로 그 민낯을 드러낸 것입니다.

지난 100년, 근현대 우리 역사에서 정신장애인이 자리할 공간은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정신장애인 관리는 식민 지배의 일환으로 시작해 시대의 흐름이었던 우생학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였습니다.

혐오와 낙인, 이를 잇는 차별과 배제는 이들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기 시작했고 급기야 시설에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변두리 존재였던 부랑인들과 뒤엉킨 정신장애인 잔혹사는 우리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습니다.

해방 후에도 이들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전쟁을 거치고 군사 독재가 지배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장애인들은 무허가 기도원과 정신 요양원에 갇혀 폭력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들을 위한 법조차 없었습니다. 1995년 비로소 정신보건법이 제정된 후에는 정신병원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해 갔을 뿐 사회로부터 분리된 신분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과거는 정신장애인에게 수난의 역사였고 그 수난은 지금도 계속됩니다.아마 당분간은 희망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도, 사회복지도, 의료도 모두 이들을 외면했습니다.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격리와 수용 그리고 갇힌 공간에서 자행된 폭력이었습니다. 굶기고 구타당하고, 독방에 감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국가는 이들의 수난을 조장하거나 방치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가 제도 안에서 논의되는 걸 막았고 법률 제정을 저지했습니다. 우리 사회 정신장애인은 국가가 책임질 대상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제도와 정책에서 사라진 정신장애인들은 어두운 장막 뒤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법에서 다룰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해방 후 5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법의 대상으로 편입됩니다.

1995년 어렵게 정신보건법이 제정되고서야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지만 격리, 수용이라는 이전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7만 명 이상의 정신장애인이 정신병원, 정신 요양 시설에 갇혀 살아갑니다. 정신장애인들이 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지역사회 터전은 점점 더 좁아졌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이들은 낯선 존재가 됩니다. 시설에서 돌아온 정신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고달픈 현실이므로 다시 시설로 돌아가거나 숨어 지내야 합니다. 세상도 이들의 존재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시설의 강고함과 지역사회의 황폐함이 서로 맞물리면서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이들을 가뒀습니다.

시대에 따라 수용의 주체나 수용 공간의 외형, 수용 방식이 조금씩 달라질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국가의 역할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민간이 강고한 수용 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국가는 이를 지원합니다.

민간 수용 체계에서 이루어지는 불법,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해 국가는 외면하거나 소극 대응에 머뭅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정신장애인의 열악한 수용 환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폐쇄되고 밀집된 환경에서 장기간 수용되어 지내는 현실이 바이러스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이런 끔찍한 현실을 사람들이 알기나 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모습은 과거 100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현장의 모습입니다. 대한민국 정신장애인 수난의 역사 한 단면이 생생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뉴노멀을 요구합니다.

정신장애인에게도 뉴노멀이 필요합니다. 과거 100년의 낡은 체제를 벗고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뉴노멀일 것입니다. 코로나가 지나고 미래에 새로운 바이러스 팬데믹이 도래할 때는 시설에 남은 정신장애인들이 희생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탈리아는 이미 40년 전에 ‘바살리아 법’을 제정하고 정신장애인들의 지역사회 복귀를 선언했고 지금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정신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기가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관심과 의지 그리고 정책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뉴노멀 모델입니다. 이탈리아가 이룬 대전환의 국면에서 국가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외면하고 방치하고 무책임한 모습이 현재 대한민국 정신 보건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국가의 형상입니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한결같습니다. 이제 오롯이 국가가 지난 역사의 책임을 다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가가 나서 대전환의 불씨를 살려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이후 100년 넘게 계속된 격리 수용의 낡은 패러다임을 벗고 뉴노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는 데 국가의 역할이 무엇보다 절실하고 중요합니다. 참 믿기지 않습니다. 관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국가가 알아서 이 전환의 물꼬를 터 줄까요?

무엇보다 절실한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각성과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민과 지역사회의 연대와 응원이 필요합니다. 한 목소리로 국가의 반성과 성찰 그리고 책임 있는 실천을 요구해야 합니다.

잊힌 존재, 투명 인간으로 지내온 세월을 뒤로 하고, 존재를 밝히 드러내며 “여기 우리가 있다”고 외칩시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제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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