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험하고 외로웠던 '타인의 방'을 기리며
[삐삐언니의 책방] 험하고 외로웠던 '타인의 방'을 기리며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2.11.30 2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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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 ⑪ 완벽한 생애

조해진 지음·창비

조해진 작가와는 딱 한번 만났다. 2년 전 겨울 <마인드포스트>가 주최하는 제1회 문예대전에 함께 심사위원을 맡았다. 회의를 마치고 신림역으로 걸어가는 길, 찬바람이 매서웠던 걸로 기억한다. 이날 내 조울병 병력을 알게 된 그는 자신도 최근 우울로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고 했다. 십여분 짧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지만, 친밀감이 느껴졌다. 

조해진 작가는 “희망을 다짐하는 문장들은 크고 빛났다”라는 심사평을 통해 문예대전 참가자들을 응원했는데, 그의 마음 씀씀이 또한 얼마나 크고 빛났는지는 나중에 행사 뒤풀이 때 전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알리지 말라면서, 문예대전 수상자들을 위한 상금을 준비한 것이었다. 

이 행사를 지원한 서울시가 상금 예산을 배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그저 혀를 끌끌 차며 무심히 넘어갔는데 말이다. 그 뒤 조해진 작가가 새 책을 낼 때마다 눈여겨봤다. 올해 문학상 소식이 반가워 바로 <완벽한 생애>를 주문했다. 그리고, 하룻밤에 다 읽었다. 

조해진, '완벽한 생애', 창비, 2021.
조해진, '완벽한 생애', 창비, 2021.

소설은 세 사람의 인연이 얽히는 순환 구조로 짜여있다. 한국 대학생 은철과 짧은 입맞춤 같은 사랑을 했던 홍콩인 시징. ‘가난의 유전적 단종’을 곱씹는 가난한 남자 선우와 이별한, 역시 가난한 윤주. 그리고 확신과 신념이 없어 흔들리는 활동가 미정. 이들을 이어주는 열쇳말은 ‘타인의 방’이다. 

미정은 외국 나간 노부부의 집을 건사하며 제주도에서 잠시 머물고 있고, 회사를 그만둔 윤주는 친구 미정네집으로 오면서 자신의 영등포 원룸을 에어비앤비로 내놓았다. 그리고 서울로 출장 온 시징은 윤주의 방을 빌려 지낸다. 왜 이들은 자기 집 아닌 남의 집에 임시로 깃드는가. 

소설 속에서 세 주인공은 타인의 방에서 머물면서 각자 슬픔과 고통을 되새긴다. 그리고 다시 삶을 이어갈 용기를 얻고, 새로운 기회와 사랑을 만나는 준비를 한다. 작가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여행자이며, 각자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물론 “그 필연적인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생애가 완벽해지는 건 아니며, 완벽한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돌아보니, 나한테 벌어진 최고의 “필연적 과정”은 20여년 전 정신과 폐쇄병동 입원이었다. 첫 조증이 발병한 2001년 봄. 보름 넘도록 흥분 상태가 지속되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나는 말라리아 때문에 몸이 아픈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부모님에게 이끌려 입원을 ‘당했다’. 

처음엔 병원에서 내보내 달라며 난리를 피웠으나 치료가 계속되면서 조증이 가라앉았고, 얼마간 지나서 엄중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내가 조울병 환자라는 것. 그리고 남은 인생 내내 조울병과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

그 뒤 몇 년 동안 회복-재발-회복 과정을 반복했으나, 나는 같은 자리에서 맴돈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하강의 나선형을 그렸고 때로는 상승 국면에 올랐다. 요즘엔 ‘이런 날도 있지’ ‘이런 때도 있지’ 하면서 흐린 날씨처럼 실수와 과오를 무심히 넘기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가끔씩, 마지막 두달 간 머물렀던 6인용 입원실을 떠올린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타인의 공간. 오늘 거기에 어떤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병동 건물이 너무 낡아 옮겨갔을 수도 있고, 아예 문을 닫았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곳은 내가 삶을 여행하며 거쳐온 가장 혹독한 공간인 동시에 가장 많이 배운 장소다. 

소설가 최진영은 <완벽한 생애>의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제주에는 신구간(新舊間)이 있다고 한다. 지상의 신들이 하늘의 신에게 일년간의 업무를 보고한 뒤 새 업무를 부여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일컫는데 신이 부재해서인지 유독 춥고 궂은 날이 많다는 시기. 신조차 세상을 비울 때가 있다. 그들도 이것에서 저것으로 건너가려면 사이가 필요한 것이다. 신구간에 제주 사람들은 이사나 집수리를 비롯한 집 안 손질을 한다. 사람이 터를 옮기거나 새롭게 할 때 신은 지상에 없다. 자기 자리를 내주고 타인의 집에 들어서고, 이제 더는 소용 없는 것을 버리고 고장난 것을 고치고, 낯선 거리에서 만나고 이별할 때, 신은 사람 곁에 없다. 그건 오직 사람의 일이다. 사람끼리 해내는 일이다.”

조증과 울증은 험하고 외롭다. 내게는 신구간의 시절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버티는 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로지 나의 일이다. 내 생애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필연적 과정을 회피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기특한 구석이 있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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