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라, 정신의 붉은 고통이 피워올린 위로의 무늬들이여
아름다워라, 정신의 붉은 고통이 피워올린 위로의 무늬들이여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11.27 2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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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 예술인 6인 작품전...경애미술관에서 7일간 진행

전시회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기자는 멕시코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를 생각했다. 프리다는 47세라는 짧은 삶 속에서 고통받을 만큼의 고통을 받았고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과 삶에 공감한 이들은 그를 통해 눈물의 위로를 받았다.

프리다 칼로는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부모는 그를 아꼈고 의대로 가서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고등학생 시절, 통학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달려오던 전차와 버스와 충돌하면서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35번의 대수술을 견뎌야 했고 그 아픔과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그는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멕시코 벽화예술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디에고 리베라를 찾아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림을 통해 그들은 연인이 되었고 21살의 나이 차였지만 결혼하게 된다.

프리다 칼로 작품 두 명의 프리다. 이 둘은 분열된 자기의식을 가리킨다. [사진=위키페디아]
프리다 칼로 작품 두 명의 프리다. 이 둘은 분열된 자기의식을 가리킨다. [Photograph of Frida Kahlo's 1939 oil painting The Two Fridas, Courtesy of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리베라는 당시 두 번째 이혼을 한 상태였고 네 명의 자식을 둔 처지였다. 주변이 결혼을 만류했지만 프리다 칼로는 결혼을 강행했다. 이후 리베라는 자신의 처제인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게 됐고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 칼로는 배신감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평론가들은 말한다. 프리다 칼로가 겪었던 삶의 경험들은 보통 사람들이 겪지 않을 거대한 고통의 파고였다고. 프리다는 고통의 궤적을 떠돌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했다”고. 또 자신의 소망으로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을 꼽았다.

불꽃처럼 살다간 그를 생각하며 강남구 경애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장으로 들어섰다. 정신장애 예술인 6인의 작품을 소개하는 ‘정신장애인의 그림을 시대를 읽다, 보다’의 작품전이었다.

하경이 씨의 작품 앞에 섰다. 프리다 칼로가 떠올랐다. 작품 ‘내 안의 날개’, ‘메이크업’은 수많은 색깔들로 채워졌다. 어두운 듯한 풍경에 사람 뒤에 돋아난 검고 흰 날개들. 아라베스크풍의 간결한 색채. 융이 만다라를 통해 설계한 가설, 인류의 집단 무의식을 보는 듯한 ‘수학과 미술’ 작품. 기자는 사진을 찍으며 그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해되지 않은 것들은 이해받기 위해 있다. 괴테는 ‘문학은 어려울수록 좋다’고 했는데 저 만다라를 닮은 미술은 이해되지 않기에 인간을 사유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성의 영역에서 해석되지 못하는 광기의 깊은 무의식을 저 작품은 담고 있는 것일까.

하경이 作 '메이크업'
하경이 作 '메이크업'
하경이 작 '내 안의 날개'.
하경이 作 '내 안의 날개'.

 

하경이 작. '수학과 미술'.
하경이 作. '수학과 미술'.

하경이 씨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내 그림의 대부분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간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메이크업을 한다.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 나 자신에게, 내 마음에 메이크업한다”라고 밝혔다.

정신장애를 가진다는 것은 불행인가 개성인가. 아니면 불안함일까. 하경이 씨는 “남들과 틀린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를 뿐인, 개성이 조금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서... 그래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정신장애를 특이한 삶의 자리에 위치 짓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해석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장애는 다만 ‘다른 것’일 뿐이라는 전언이 저 안에 고여 있다. 하경이 씨는 20대 초, 양극성정동장애를 가지게 되고 대학을 그만두게 된다. 입·퇴원을 반복하며 나중에는 조현정동장애로 병명이 바뀐다. 약을 먹고 있고 프리다 칼로처럼 병상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자신은 위로받고 타자를 위로한다.

이정하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 대표는 8번의 강제입원을 겪은 후 지상에 정박하는 배처럼 삶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의 말대로 ‘삶의 경계’에 섰을 때 그는 “완벽한 그림처럼 환영을 보고 거리를 걸어가면 온통 흐물흐물거리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가족은 그를 강제입원시켰고 대안이 없는 인권적 정신의료 시스템이 부재하던 시절을 온몸으로 관통했다.

이정하 작.
이정하 作.

마지막 퇴원을 할 때는 그는 주치의에게 “당사자운동을 하겠다”고 말했고 주치의는 “응원한다”고 전했다. 주치의는 그랬다. “저 전에 근무했던 병원의 방향으로 고개 돌리는 것도 힘들어요. 그쪽 방향으로 가지도 않고 살았어요. 그곳 환자분들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바위처럼 무겁”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강제입원 절차에서 발생하는 모든 폭력적 경험은 그것을 수행하는 정신과 의사까지 고통받게 만드는 것이다.

이 대표는 언젠가 그런 질문을 받았다. 다시 태어나도 정신장애인이 될 거냐고. 그는 “기꺼이 다시 정신장애인이 되는 것에 거리낌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학대와 금기에 대해 도전하고 부당한 것에 투쟁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특히 “정신증은 나의 정체성 중 하나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지만 그것이 꼭 사라져야 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질환이나 병이 계속 되더라도 그것을 책임지는 것”이라며 “이미 그 차원에서는 완치 의미는 무의미해진다. 그것은 단계를 넘어선다”고 강조했다.

스케치 형식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에는 정신병원에서의 경험을 고스란히 닮고 있다. 침대에 묶여 있는 상황, 돈이 궁해 컵라면을 먹는 동료환자에게 다가가 국물 한 입이라도 달라고 하는 모습, 미래에 대한 기대 없이 병실 흡연실에 모여 담배만 피우는 군상들의 모습들.

그건, 어쩌면 폭압적 강제입원과 그로 인해 지속되는 삶의 와해의식이 빚어낸 희극일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명구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 대표는 이번 전시회에서 작품 ‘못다한 이야기’를 상재했다. 40대로 보이는 여성이 창밖으로 걸어내려가는 남성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프리다 칼로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주어야 하는 막막함. 그렇다고 함께 하기에는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고통. 보내버릴 수밖에 없는 허허로움.

이정하 작 '못다한 이야기'.
이정하 作 '못다한 이야기'.

프리다 칼로는 말했다.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는 것.” 이 대표는 당사자운동이라는 혁명적 대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것이고, 그것이 사회주의 혁명 의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해도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고 훼손되는 고립된 인간의 해방을 위한 집단적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는 혁명가다.

그래서 그의 꿈은 파도손 사무실이 있는 을지로 인쇄골목 전경처럼 사는 것이다. 사회의 주변부에서 타자화된 정신장애 당사자들이 지역 안에서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 꿈은 소박하지만 강렬하고 너무나 당연한 전언이지만 그 완성이 너무도 어려운 고통과 희망의 교차점이 된다.

최준석 씨는 일기를 쓰듯 그림을 설명했다. 어느날 그는 방안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깜깜한 밤 숲이 우거진 산속에 누워있었다고 했다. 주택가에서 멀지 않은 야산 숲 속이었다. 그는 왜 그 공간까지 간 것일까.

20대에 그는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정신장애 초기에 당사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환청과 망상으로 거리를 떠돌게 된다. 돈은 없을 것이고 길거리나 식당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한다. 혹은 최준석 씨처럼 “골목에 내어 놓은 배달 음식그릇에 남은 것을 먹거나 남의 밭 깻잎을 몇 장 따서” 먹는다. 아니면 “호프집에서 사람들이 일어서기를 기다리다 남은 치킨을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거나, 몇 개를 가지고 가서 먹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떠돌았다. 환청이 환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당사자는 혼란 속에서 세계의 주변부를 돌아다닌다. 장애유형 중에서 가장 가난한 부류인 정신장애인의 삶. 상태적인 정신질환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의 길을 지나가며 그 10만 볼트의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삶. 그것이 정신장애인의 여로다.

그래서 그는 이제 촛불을 끈다. 켜는 게 아니라 끄려는 의지. 그는 “촛불은 무엇인가를 마음 속에 떠올리게 해 주기보다는 그것들을 태우거나 녹이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정하(오른쪽) 대표와 하경이 씨. (c)마인드포스트.
이정하(오른쪽) 파도손 대표와 하경이 씨. (c)마인드포스트.

그의 꿈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앙상하고 다친 몰골로 먼 길을 걸어가는 풍경을 만난다. 그 꿈의 원형은 버려지지 않고 늘 다른 형식과 풍경으로 바뀌어 나오지만 ‘먼 길’을 걷는다는 의미에서 연속성을 가진다.

그 연속성은 최준석 씨가 겪었던 기억 속 ‘떠남과 돌아옴’의 원형 의식이 담겨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가장 취약했던 시절에 겪었던 경험들을 잊지 못한다. 무의식으로 들어간 풍경도 있지만 생쌀처럼 날것으로 그 고통의 시점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1940년대 프랑스 화가 장 드 뷔페는 정신장애인이 그린 그림을 ‘아르 브뤼(Art Bruit)’라고 명명했다. 아르는 예술을, 브뤼는 ‘조야한, 꾸밈없는’이라는 프랑스어다. 정신장애인이 건져올린 고통의 외화이자 이를 통한 타자의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프리다 칼로처럼.

그래서 그는 “꿈속에서 찢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질질 끌며 서로 의지도 하면서 기괴한 봉우리가 많은 산속이나 폐허, 그리고 늪도 지난다”고 말했다. 자기 기억의 원형에 묻힌 누추한 기억들. 이는 자신의 내면이 그만큼 황망했고 황량했다는 의미다. 저 걸어가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배제된 정신장애인들이기도 하고 산속과 폐허는 정신의 처리되지 않은 고통의 풍경일 것이다.

최준석 씨는 꿈 속에서 거대한 탑에 이르게 되는데 맨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대접받는다. 사람들은 음식을 허겁지겁, 황급히 먹지만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을 듯 먹고 다 먹은 이들은 철장을 두른 장소에 스스로 문을 잠가 숨을 몰아쉬고 쉰다고 전했다.

저 음식은 최준석 씨가 허기가 져서 먹어야 했던 호프집의 먹다 버린 치킨이었고 그것은 먹어도 배가 고픈 음식이다. 음식을 먹고 난 후 그는 다시 스스로의 장소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이 삶의 불안의 연속성은 그의 무의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정신의 지하동굴에서 걸어나오라”는 명령이 되어 버린다. 나오지 않으면 그곳이 우리를 가둬버리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마치 칸트가 “이성을 사용하는데 용기를 가지라”고 말했듯이.

전시 작품은 이외에도 이주환 씨의 ‘자화상’, 이상현 씨의 만화 같은 풍경들, 이은혜 씨의 ‘변화’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주환 씨는 미 샌프란시스코의 아트스쿨에서 영상디자인을 전공했다. 하지만 유학 중 갖고 있던 정신질환이 발현되면서 아프게 귀국한다. 조현병 진단을 받은 지 이제 23년째인 그는 “조현정동장애인 내 삶에서 전문가들이 정해놓은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조금씩 더 나은 모습으로 살자는 의미에서 ‘바르게 살자’는 필명으로 온오프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자화상은 깨어진 거울 안을 들여다보는 듯 무겁다.

이주환 작. '자화상'.
이주환 作. '자화상'.

이상현 씨는 맑고 간결한 만화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의 주사와 폭력에 못 견딘 어머니가 자신과 동생을 두고 집을 나간 것. 동생의 갑작스런 사망. 고모 손에 이끌려 절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중학생 무렵 아버지가 찾아와 같이 고시원에서 생활했던 기억. 아버지와 어떤 계기로 헤어지고 시설에서의 생활. 군 입대 후 ‘관심병사’로 겨우 제대한 기억, 정신병원 입퇴원의 반복, 병원에서 알게 된 지인의 도움으로 또다른 시설에서 생활하게 된 서사를 이야기했다.

특히 그는 절 생활 도중 겪었던 상급자들의 폭행, 사회생활에서 겪은 ‘나쁜 친구’에게 당했던 사기, 악덕 사장의 횡포, 공황장애를 겪으며 사람들로부터 받은 놀림을 이야기했다. 이는 그를 더 깊은 우울로 이끌었다. 그 긴 신열의 시간을 지난 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지금은 편안하게 지내게 됐다.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의 희망을 믿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통을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은 결론이 “희망을 믿고 살아가려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짧은 경구였다. 깨달음의 언어는 본래 짧고 간결하다. 그가 그렇다.

이상현 작. 만화 형식의 그림들.
이상현 作. 만화 형식의 그림들.

이은혜 씨도 작품 ‘변화’를 게재했다. 머플러를 한 여성이 겨울 풍경으로 보이는 삭막한 나무들이 있는 벌판을 걷고 있다. 그 앞에는 영화 스크린처럼 큰 안경을 쓴 여성이 나오고 그 얼굴 옆에는 해바라기들이 펼쳐져 있다. 한 풍경 안에 두 개의 계절이 섞여 있다. 지금은 겨올의 벌판을 걷지만 미래는 저렇게 아련한 봄 풍경이라는 내면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은혜 씨는 “봄인데 해바라기를 그린 것은 오직 태양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꿈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싶은 내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전은 이달 11일부터 27일까지 열렸다.

이은혜 작. '변화'.
이은혜 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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