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기고]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내고...“방황도 우울감도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더라”
[당사자 기고]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내고...“방황도 우울감도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더라”
  • 김선호
  • 승인 2023.07.12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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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중퇴 후 선택한 대안학교...이젠 병원 아닌 일터에서 시간 보내
조현병 당사자로 광명시정신건강복지센터 등록회원...장애인일자리로 근로 활동 중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빨간 머리 친구를 만나다

나는 학교생활의 어려움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졸업장 대신 우울증을 얻었고, 자퇴 후 1년이 넘는 시간을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부모님은 나에게 입원 치료를 권유했다. 약 2개월의 치료 후 퇴원을 했고, 6개월 가까이 병원에서 추천해준 낮병원에 다녔다.

이후 병원에서는 주간재활시설을 소개해 주었고 복지관 안에 위치한 한 시설에 가게 됐다. 당시 19살이었던 나와 20살 형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회원이 성인이었다. 소통에도 어려움이 있었고, 거리가 너무 멀어 3개월 남짓 다니다 복지사님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복지사님은 집 근처, 또래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대안학교를 소개해 주었고 나는 인터넷으로 그 학교를 찾아봤다.

홈페이지 사진 속 어딘가 불량해 보이는 아이들. 나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주변의 권유로 가을학기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잘 적응할 수 있었고, 학교의 규모는 작았지만 나름대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수학여행도 함께 가고, 수업도 꼬박꼬박 들으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한번은 새로운 신입생이 왔다.

나와 동갑인 빨간 머리 친구. 껄렁거리고 자유분방한 모습의 그 친구는 등교 첫날, 급식이 맛이 없다며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빨간 머리 친구는 나에게 “얘, 왜 말을 안 해?”, “마음에 안 들어”라며 괜히 시비를 걸었고, 아침마다 내 신발 앞코를 밟으며 미운 장난을 쳤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의 지도에 따르지 않았고, 상대방에게 무안을 주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그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튀고 활달한 그의 성격은 몇몇 무리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한번은 학부모 참관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학생, 부모님들과 함께 축하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나는 일찍 자리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행사까지는 시간이 남아 이곳저곳을 그냥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빨간 머리 친구가 내 앞으로 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팔을 들어 나를 위협하는 시늉을 했고, 나는 방어적으로 막는 자세를 취했다. “어쭈?”라고 말하며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빨간 머리. 나는, 그 순간 쌓인 앙금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생애 첫 몸싸움은 피 흘리며

나는 빨간 머리 친구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싸움이 붙었고 서로 달려들어 머리를 쥐어 잡고 상처를 냈다. 금방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 싸움은 멈췄지만 내 한쪽 뺨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를 본 선생님은 나와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는 여태껏 겪은 억울함을 이야기했고 친구는 내가 “다른 친구들에게 욕을 하고 괴롭히고 있었다”라고 했다. 긴장감에 혼잣말을 하거나 노래를 흥얼거렸을 순 있지만, 내가 누굴 괴롭힐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맞을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나는 의자를 던지고 소리쳤다. 잠시 뒤, 그 친구는 나에게 와 사과를 하겠다고 했지만 마주한 눈빛은 사과하려는 사람의 표정이라기보다, 나를 더 자극하는 듯했다. 되려 화가 난 나는 다시 그 친구에게 달려들었고 선생님은 싸움을 말리며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나는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같이 갔다. 억울하고 죄송했다.

뺨에는 손톱에 긁힌 상처가 크게 남았고 아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생애 첫 몸싸움을 했고 그 친구는 나와 관련된 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됐다. ‘폭력을 사용하면 다니지 못한다’는 학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겨울방학을 맞았다. 학교에는 가끔씩 찾아갈 일이 있었는데 한번은 나와 다툰 빨간 머리 친구가 학교 입구에 서 있었다. “이제는 못 볼줄 알았는데 왜 있는 걸까?”

지나치며 “선생님이 먹을 거 사 주신다고 해서 왔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와 부모님께 이 이야기를 하며 화를 냈다. 나를 괴롭힌 친구에게 선생님이 맛있는 걸 사 준다는 게 합당한 일인지 부모님께 따져 물었고 간만에 만난 그 녀석에게 쓴소리라도 해줄 걸 싶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인생은 회전목마

그렇게 변화와 방황 속에 10대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스무 살이 됐다. 개학 후 등교한 학교에는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운 좋게 학생회장이 되어 들뜬 시간도 있었다. 내성적이지만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고 재미있게 봄 학기를 보냈다.

졸업을 위해 치른 검정고시 결과는 여름이 돼서야 받아볼 수 있었다. 대안학교에 다닌 지 근 1년, 여름을 맞아 남이섬으로 놀러갔는데 그날따라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 선생님이 눈에 밟혔다. 아침 일찍 집에서 확인을 하지 못했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은 만큼 떨어질 것을 생각했는데 운 좋게도 합격선을 조금 넘어 합격이 됐다.

원치 않게 학교를 자퇴해 대안학교로 돌아온 내게 검정고시 합격은 정말 기쁜 소식이었고 우울감 같은 정신과적 증상도 싹 나아진 듯했다. 물론 실제로 나아진 게 아니었기에, 훗날 주치의 선생님께 약을 줄여달라고 떼쓴 걸 많이 후회했다.

합격 소식에 학교에 다닐 의지를 잃은 건지, 약을 급격히 줄인 탓인지. 다시금 사람을 만나고 학교에 가는 게 두려워졌다. 학교에 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중요한 모임과 수업에도 결석하자 선생님은 혼을 내셨다. 부모님도 탑이 무너지듯, 증세가 확연히 나빠지는 걸 보고 슬퍼하셨다. 가까스로 졸업식까지 마쳤지만, 스무 살의 꽃다움은 어디로 가고 삽시간에 져버린 내 청춘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10대 후반, 20대 초반까지 너무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세상이 무너지듯 자퇴를 했고, 입·퇴원을 거쳐 대안학교에 입학했다. 대안학교에는 예전처럼 나를 괴롭히는 대상이 있었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도 있었다. 피를 묻힌 생애 첫 몸싸움도 거쳤고, 학생회장에 선정되고 검정고시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도 물론.

‘인생은 회전목마’라고 하던가, 놀랍게도 결국은 제자리를 찾아갔다. 여차저차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었고, 서점에서 만나 어영부영 안부만 묻고 헤어졌지만 정말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지금은 병원이 아닌 집과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과거 또한 나름의 추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됐다.

다시 마주하라면 또 마주할 수 있을까, 겁이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청춘을 보낸 것 같아 아쉽지 않다. 대안학교, 그 덕에 성장했던 나의 10대, 20대. 문득 영화 ‘파수꾼’이 생각나기도 한다. 청소년기의 방황도 우울감도, 100% 나아질 수는 없겠지만 결국 어떠한 자리를 찾아간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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