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엄마의 환청과 함께 하는 밥상을 차렸다
[삐삐언니의 책방] 엄마의 환청과 함께 하는 밥상을 차렸다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07.10 19: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삐삐언니의 책방 (18)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왜 나는/너는/그는, 아니, 우리는 정신병에 걸리는 걸까. 

2001년 조울병 진단을 받고 난 이후 이 질문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환경인가. 아무리 헤집어봐도 유년의 기억 속엔 내 조울병의 실마리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유전인가. 가족 중엔 없었다. 8촌 이내 친척 가운데  알코올 문제로 인생을 망친 사람은 있지만 조울병을 본격적으로 앓았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시간이 좀 흘러서 나는 사고의 타협 지점에 이르렀다. 조울병은 생물학적 질병이다, 왜 암에 걸렸는지 정확히 이유를 모르는 것처럼 조울병 역시 발병 원인을 명확히 밝힐 수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다. 조울병을 앓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글로 적는 일이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20세기말 한국에서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보편적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 혐오하고 열망하는 것. 나의 객관적 조건과 바라는 이상적인 삶. 이런 것들을 쓰다 보면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나아갔다. 조울병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레이스 M. 저, 전쟁 같은 맛, 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2023.
그레이스 M. 조, 전쟁 같은 맛, 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2023.

<전쟁 같은 맛>은 미국의 여성 사회학자, 그레이스 M. 조가 조현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엄마의 삶을 역사와 사회의 시공간에 엮어 재구축한 서사다.  한국전쟁때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어머니는 이후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미국 서부의 가난한 농촌 출신인 백인 아버지는 선원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22살 어린 젊고 아름다운 엄마를 고향에 데려온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엄마는 매력과 재능을 총동원해 발버둥치다 어느 순간부터 환청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의술이 발달한 나라가 미국이라는데, 엄마는 어쩐 일인지 조현병 발병 이후 8년 동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십대 어린 딸, 그레이스 말곤 어느 가족도 어머니의 병을 인정하지 않았고, 가까스로 찾아간 지역 정신보건센터는 냉담한 태도로 일관한다.

지은이는 성인이 되어서야 엄마의 해리된 말과 행동, 자극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면서 이 병이 사회적 산물임을 깨닫는다. 한반도 전역을 폐허로 만든 6·25전쟁.  아홉 살 어린 소녀였던 어머니는 피난길에 부모를 잃고 혼자 집으로 돌아와 땅에 묻어 놓았던 김치로 연명하며 수개월 동안 버텼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미국의 식량 원조 소식은 단비와 같았으나, 쌀과 보리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받아든 것은 분유가루였다. 

생전 처음 분유를 먹은 한국인들은 며칠씩 설사를 했다. 한국인들에게 집단적 배앓이를 안긴 음식, 분유는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미국과 가난한 분단국인 한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상징한다. 한-미 간 공고한 위계 구조는 미군을 접대하는 한국 성노동자들이 겪었던 강압적 노동 조건을 내포하고 있었고, ‘아마도 매춘부’였을 엄마에게 미국 백인 사회는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면, 엄마가 시달렸던 환청(“다들 나를 험담하고 있어”)은 환각 아닌 진실이었는지도. 병에 걸린 이후 음식을 거부하며 최소한의 영양분에 의지해 살아가던 엄마는 분유 얘기가 나오자 고개를 젓는다.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전쟁 같은 맛이야.” 

지은이는 ‘많이 배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또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읽고 공부하고 쓴다. 그는 “조현병이라 일컫는 일련의 경험이 생물학적인 만큼 사회적인 질병”이라는 T.M. 루어먼(<우리의 가장 문제적인 광기: 여러 문화권의 조현병 사례 연구>)에 깊이 공감한다. “조현병은 가난과 폭력이, 권력의 눈밖에 나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조현병은 개인의 유일한 정체성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사회적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듯, 조현병도 마찬가지다. 그레이스는 생태찌개, 콩국수, 쇠고기국처럼 엄마의 소울 푸드를 함께 나누면서 조현병과의 전쟁에서 지친 엄마를 위로한다. 

“음식을 나누면서 나는 엄마의 조현병에 더 가까이 다가갔고, 엄마가 듣는 목소리들도 내 식구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 목소리들이 낯선 존재가 아닌 엄마의 일부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억압되었던 폭력적인 가족사에서 비롯된, 자기 말을 들어줄 증인을 찾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목소리들은 처음부터 엄마 안에 있었을지 모른다. 엄마 속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며 조각난 역사의 흔적을 미래에 남길 준비를 하면서. 엄마의 목소리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얘기를 나누며, 나는 더 이상 두려움 없이 그들이 하려는 말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