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정신질환은 개인의 질병이 아닌 공동체의 폐허로 인해 생긴 사회의 문제
[이관형 기자의 변론] 정신질환은 개인의 질병이 아닌 공동체의 폐허로 인해 생긴 사회의 문제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3.07.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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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는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서식하던 새입니다. 16세기 에스파냐인을 통해 영국과 독일 등, 유럽 곳곳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에 의해 길러진지는 400년이 넘었죠. 약 13센티미터의 작은 몸은 노란 깃털로 뒤덮여 있습니다. 게다가 노랫소리가 아름다워 십자매, 잉꼬와 더불어 3대 사육조로 불러질 만큼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린 새입니다.

카나리아는 애완용으로만 키워진 것은 아닙니다. 1895년, 동물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생리학자 존 스콧 홀데인이 한 가지 연구결과를 발표합니다. 체구가 작고 대사활동이 빠른 동물들이 유독가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입니다. 그래서 광부들이 무색무취의 일산화탄소를 감지해내기 위해 쥐를 데리고 탄광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floda31.com
1st July 1965: Welsh miner Charlie Williams with a canary at Dinas in the Rhonda Valley, South Wales. Canaries are used as a safety measure against methane in mines. (Photo by Laister/Express/Getty Images)

그러다 쥐보다도 일산화탄소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새장에 가둔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고 쓰러지면, 광부들은 재빨리 갱도를 탈출하여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탄광의 카나리아’라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누군가에게 다가올 위험을 스스로 희생하여 먼저 알려주는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죠.

그러나 탄광에 들어간 카나리아들이 가스 유출 여부와 상관없이 노래를 멈출 때가 많았습니다. 아무리 새라고 해도 어둡고 먼지로 쾌쾌한 탄광 안에서 쉬지 않고 노래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카나리아가 노래를 그칠 때마다 광부들은 불안과 공포감 속에서 탄광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결국 카나리아는 광부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탄광 안에서의 작업에 효율을 떨어뜨린다고 여겨졌습니다. 이후 1980년대 후반부터는 일산화탄소 전자감지기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출처 : barrons.com
Photographer: David Cairns/Hulton Archive/Getty Images

조현병이나 조울증과 같은 정신장애의 원인이 무엇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많은 당사자들이 가정에서의 학대와 학교 폭력, 입시 스트레스와 군대에서의 구타 혹은 성범죄와 해외 생활에서의 외로움과 차별처럼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이 겪는 상처와 아픔인데,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데, 왜 유난을 떠느냐?”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때로는 “정신장애인들이 의지가 약해서, 마음이 여려서, 나약해서 겪는 병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일부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화가 날 때 그 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끼는 사람들, 억울한 게 있으면 반드시 갚고야 마는 사람들이 정신질환으로 약을 먹고 상담을 받는 경우는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탓하고, 내 마음보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더 헤아리고, 그 자리에서 분노하기보다 마음 속 깊이 쌓아두었다가 병이 된 당사자 분들을 더 많이 봅니다.

출처 : magazine.cim.org
Birds. 796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Photograph courtesy U. S. Bureau of Mines COAL MINERS STAKE THEIR LIVES ON A CANARY'S DELICATE LUNGS

그런 점에서 당사자들이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가정과 학교 안에서의 학대와 폭력, 경쟁과 약육강식이 판치고 혐오와 차별이 팽배한 사회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당하기 쉬운 대상이 우리 당사자들이기 때문이죠.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는 정신질환자의 나약함과 무능으로 인해 생긴 개인의 질병이 아닌, 건강해야 할 공동체의 폐해로 인해 생긴 사회적 문제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한 예로 우리나라에 처음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이 청도 대남병원에 20년 넘게 입원해 있던 정신장애인이었습니다. 어떠한 재난의 징조가 시작되려 할 때, 첫 번째 희생자는 늘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장소와 대상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가 점차 확산되자 사람들은 확진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왜 갔냐?”, “집에만 있지 않고 돌아다닌 것은 아니야?”라고 말이죠. 

출처 : pixbay.com
코로나가 점차 확산되자 사람들은 확진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pixbay]

이처럼 코로나 초창기 사회적 여론은 소수의 코로나 확진자를 향한 비난과 낙인, 혐오와 증오를 증폭시켰습니다. 또한 전 코로나의 근원지로 여겨지는 중국 사람은 물론, 많은 동양인들이 서양에서 증오의 대상으로 여겨져 심리적, 물리적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대다수의 국민들이 한두 번씩 코로나에 확진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초기의 분위기대로라면, 거의 모든 국민이 확진의 책임을 지고 비난을 받아야 되는 모순된 상황이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수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당했던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그 시작은 정신장애인이었습니다. 1939년 히틀러는 T-4작전으로 명명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T-4작전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인에 대한 집단적인 살해를 허락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죠. 

출처 : Bundesarchiv
Heilanstalt Schönbrunn, Kinder / Heilanstalt Schönbrunn bei Dachau. - SS-Foto, 16.02.1934

같은 해 10월, 히틀러가 장애인들에 대한 안락사를 허락함으로서 수많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인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안락사 기술은 거리의 노숙인이나 치매를 가진 노인들에서 확대되어 유대인들을 희생시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독일 국민이 히틀러와 나치의 행위에 동조한 것은 장애인과 노인들, 유대인들을 향해 혐오와 낙인, 차별과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자행되었던 마녀사냥도 처음에는 가장 약한 계층의 사람이었던 정신장애인과 여성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마녀사냥 대상이 점차 확대되어 결국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까지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역시 흑사병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흉흉한 민심과 사람들의 불만이 사회를 분노와 증오의 광기로 물들였기 때문입니다. 

출처 : 위키백과
마녀로 판명된 여인을 화형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삽화. Burning at the stake. An illustration from an mid 19th century book

이러한 흐름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자살률 부동의 1위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비극 속에서 특히 정신장애인들의 자살율은 전체 인구의 자살율보다 7.2배나 높다는 통계 자료도 있습니다. 그만큼 정신장애인들이 증상과 치료 영역에서뿐 아니라, 취업과 경제활동, 삶의 만족과 행복한 삶을 충분히 영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지점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출처 :
출처: 중앙지원단 11월 정신건강동향 보고서 '정신질환과 사망' (boda.or.kr)

사회가 이러한 정신장애인들의 현실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혐오와 증오, 차별과 배제로 대한다면, 우리가 겪는 비극은 똑같이 온 사회의 모든 집단과 구성원에게 확대될 것입니다. 정신장애인들을 모두 병원에 수용하고 섬에서 격리하여 시야에서 벗어나게 할지라도,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약자와 집단들이 우리에게 향했던 화살을 똑같이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성별과 연령, 피부색과 출신지역, 경제력과 학력, 정치적 이념과 가치관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비난하는 어두운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카나리아는 원치 않게 탄광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온갖 먼지를 마셔야 했죠. 그래서 탄광 밖의 다른 동물들처럼 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광부들은 가스가 새지도 않았는데, 노래를 부르지 않는 카나리아를 보며 공포심을 조장한다고 혐오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공포심은 탄광의 위험한 환경 때문이지 결코 카나리아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카나리아가 사라지면 탄광 속 모든 광부들이 더욱 위험한 상황에 놓이고 말 것입니다.

정신장애 당사자들은 원치 않게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회의 어둠 속에서 마음과 영혼이 병들어 감도 모른 채 병이 들어야 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고, 때로는 기이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했죠. 그러자 사람들은 정신장애인들이 공포심을 조장한다고 혐오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공포심은 사회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이지 결코 당사자 때문은 아닙니다. 정신장애인들이 사라져도 사회의 모든 집단과 구성원들이 서로를 향한 혐오와 증오로 물들고 말 것입니다. 

출처 : pixabay.com
당사자가 병에서 회복되어 본래의 모습대로 살기 위해서도 깨끗이 정화된 사회 속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어울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카나리아가 본래의 모습대로 살기 위해서는 자연의 숲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를 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병에서 회복되어 본래의 모습대로 살기 위해서도 깨끗이 정화된 사회 속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어울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현의 악기를 조율하여 바른 소리를 낸다는 뜻을 가진 병명인 ‘조현병’의 의미처럼, 우리는 건강한 사회를 살아갈 때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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