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 김희재, “정신장애인의 그림에는 천대와 멸시가 없고 아름다움만 있어요"
[우리 이야기] 김희재, “정신장애인의 그림에는 천대와 멸시가 없고 아름다움만 있어요"
  • 임형빈 기자
  • 승인 2018.11.22 1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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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작은 예술가 당사자 김희재
20대 찾아온 조현병...결혼도 3년만에 끝나
희망없이 찾았던 병원에서 재활 결심
여러 색깔의 장미처럼 삶도 다양하고 존중해야
나의 사투가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가 될 것

작은 예술가 당사자 김희재(c) 마인드포스트
작은 예술가 당사자 김희재 씨(c) 마인드포스트

“온갖 자연 풍경이 그림의 소재입니다. 화려한 노을풍경처럼 화려한 건 없습니다. 노랗게 스러져가던 노을이 붉은 노을로 바뀔 때면 한 편의 대서사시가 펼쳐진 것 같습니다. 이 때만은 내 유년의 동심이 살아 숨쉬는 것 같고 풍경에 내가 안기는 것 같아요. 정신장애인들의 그림이 괴기스럽고 암울하다고 하는데 소수가 그렇고 대부분은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마음을 투사합니다. 그들의 그림은 힐링이 되고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됩니다.”

화가 활동을 하고 있는 당사자 김희재(49.여) 씨는 자신의 사랑하는 그림 철학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녀의 집안은 전통적인 미술가 가문이다. 어머니는 서양화, 오빠는 사진, 동생은 동양화, 제부들도 미술과 관련된 일들을 하고 있다.

그녀도 그림을 좋아했지만 처음부터 미술을 전공한 건 아니었다. 사진을 전공한 오빠의 영향을 받아 사진학을 공부했으며 대학도 사진 전공으로 입학했다.

그러다 틈틈이 자연을 소재로 꽃, 나무 등을 스케치해오다 어느날 불현듯 조현병이 찾아왔다. 입퇴원을 반복했다. 그녀는 고통을 달래려 그림만 그렸다. 다니던 낮병원의 원장이 그녀의 그림 소질을 보고 병원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미술가의 피는 속일 수 없었던 것일까. 2013년부터 아마추어 미술제에 작품을 출품하게 되고 크고 작은 상을 받게 됐다. 사진을 전공해 그 기술이 아깝다고 생각한 병원 측은 희재 씨에게 사진프로그램반을 개설해 줘 강사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주로 꽃과 나무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왔던 희재 씨는 유독 장미꽃을 사랑한다. 색채가 화려하고 품종에 따라 서로 다른 개성의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모델들이 다양한 옷을 입고 맵시있게 런웨이 하는 것처럼 그녀는 장미를 사랑한다.

"장미 한 종류로 수천 가지를 그릴 수 있습니다. 검은 장미, 흰 장미, 빨간 장미 그리고 수줍게 봉우리 잡힌 것부터 화사하게 핀 꽃송이까지 인생의 희노애락을 표현할 수 있죠. 여성의 활동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할까요."

"붉은 장미는 사랑을, 흰 장미는 순결을, 검은 장미는 숭고함을 나타내죠. 줄기마다 튀어나온 가시는 여인의 절개라 할까요. 아주 매력적인 친구들이죠. 그들은 표현하기엔 자연스럽고 풍성한 느낌이 장점이죠. 해바라기 또한 묘한 매력이 있어요. 가을 들판에 핀 황금빛 해바라기들은 절대자에게 순응하고 약한 자에게 따뜻한 미소로 배려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표현하려고 애씁니다."

그녀는 그림 그릴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그림에 몰두할 때 생에 대한 근심과 걱정, 미움이 사라져 오직 화폭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 안에서는 천대와 멸시가 없고 아름다움만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조현병이 발병한 건 28살 때였다. 환청과 환시가 심했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심지어 밥도 먹지 않고 간단한 씻기도 거부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왜 그랬을까 할 정도로 조현병은 그녀를 괴롭혔다. 당시는 남편과 7년의 연애 끝에 결혼한 때라 누구보다 더 결혼생활에 충실하리라 다짐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종교 망상이 심했습니다. 어둡고 습한 화장실에 가면 마귀 소리가 들끓었고 집안의 양지 쪽으로 피신하면 천상의 소리가 우아하게 들려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죠. 식사를 차리고 나면 누군가 기분 나쁘게 숟가락을 패대기치는 소리가 들려 괴로웠습니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이겨내려고 했지만 마음만큼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반지하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 밖에 전혀 나가지 못했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나가면 까무러치기 일쑤였다. 남편도 그녀의 발병을 알고 조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3년간의 결혼생활은 끝을 맺었다. 너무나 소중히 여긴 결혼생활이라 큰 슬픔이 그녀를 지배했다.

삶은 그녀의 행복을 거부했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질병은 그 자체로도 낙인이 되고 생의 밑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린다. 냉혹한 삶을 겪은 그녀는 아주 오래 '앓아누웠다'. 희망 없이 병원들에서 입퇴원을 4차례 반복했다.

어느 날 살기 위해 문을 두드렸던 수원의 행복한우리동네의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게 됐다. 그곳에서 낮병원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다시 살아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삶을 현실에 소환했고 그녀는 그 삶을 껴안았다.

지금은 당사자 친구들이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을 한다. 또 공통적인 아픔을 가진 당사자들의 체험은 그녀를 위로하고 스스로 일어나야겠다는 다짐의 반석이 되고 있다.

“나의 삶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몇십 년을 살지는 몰라도 나의 이야기를 기록해 많은 당사자들과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처절한 사투가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해보지 못했던 경험에도 몸을 맡겨보려고요."

그녀는 당사자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스토리를 작성하는 작가가 되는 것이 제2의 꿈이라고 했다.

“당사자 그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에겐 자신만의 스토리가 존재하고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전 그것을 기록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그래서 많은 당사자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 이야기 (c) 마인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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