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그냥 아팠어, 그냥 슬펐어, 그냥 걸었어. 
[삐삐언니의 책방] 그냥 아팠어, 그냥 슬펐어, 그냥 걸었어.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12.18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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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23) 할머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벤 몽고메리 지음·우진하 옮김, 책세상

최초의 기억은 ‘신작로’였다. 여섯 살쯤부터였다. 모내기철 농사를 짓는 큰아들네 일손을 도우러 시골로 가시는 할머니와 함께 6km 가량 되는 차도를 걸었다. 어른 걸음으로는 1시간30분 정도 거리지만 일흔을 바라보는 할머니와 꼬마에겐 서너 시간 걸렸다. 할머니는 멀미가 너무 심해 아예 자동차를 탈 수 없었다. 

말년의 할머니는 불가피한 경우엔 거의 실려가다시피해서 자동차를 탔지만 기차도, 비행기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초여름 떙볕 먼지 풀풀 나는 차도를 따라 걸으면서도 그리 힘들었다는 기억은 없다. 가게가 보일 때마다 할머니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꼬마는 걷는 게 좋았다.  

벤 몽고메리, '할머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우진하 옮김, 책세상, 2016.
벤 몽고메리, '할머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우진하 옮김, 책세상, 2016.

내가 걷기와 달리기 같은 단순한 동작을 장시간 반복하는 행동을 좋아하다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러서였다. 서른 살 무렵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했고, 걷기의 매력에 푹 빠졌고, 이후엔 등산도 좋아하게 됐다. 한 달여 간의 도보여행도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 걷기와 달리기는 나의 정체성의 일부를 이룬다. 매일 아침 챙겨 먹는 라믹탈(양극성 장애 치료제)을 어쩌다 잊었을 때 뒤숭숭한 기분을 느끼곤 하는데, 일주일 넘게 바깥에 나가 길을 달리지 않으면 마음이 심란해진다.

지난해 이사온 우리집 뒷산엔 천천히 달리기에 딱 좋은 오솔길이 있다. 주말에 이곳을 가지 않으면 애가 탄다. 기분이 처지면, 하루 종일 산길을 걷고 뛰는 장거리 트레일러닝 대회 정보를 찾아보면서 ‘설렘의 업(up)’을 도모한다. 

밖에서 돌아다니는 일에 관심이 많은 내게 엠마 게이트우드(1887~1973)가 다가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67살에 3300km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완주한 사람(이후에도 2번 더 완주해 총 3번의 완주 기록을 세웠다). 5달 가까이 몸무게가 14kg이나 빠지는 강행군을 하면서 300여개가 넘는 봉우리를 넘은 사람. 어떤 비싼 최신 장비 없이 밑창 얇은 운동화를 신고 배낭 대신 자루 하나 메고 험악한 날씨와 산길을 견딘 사람. 그는 진정 초경량뿐 아니라 초저렴 트레일 기법을 선보인 선구자였다. 

“할머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생스럽게 걷는 거에요?” 호기심 어린 질문들이 쏟아질 때마다 엠마는 수줍어했다. 길이 남을 만한 근사한 대답은 없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성장해서 자유를 얻었으니까요.” “아직까지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다 걸은 여성은 없었잖아요.” “세상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늘 궁금했거든요.”

예순이 넘어 도보 여행의 대가로 유명해지기 전까지, 엠마의 인생은 비참했다. 27살에서 47살까지 아이들을 11명이나 낳았고, 생계를 위해 억척스럽게 농장을 꾸려가야 했다. 무엇보다도 최악은 무지막지하게 두들겨패고 성적으로 착취하는 남편이었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치는 엠마에게 숲은 가장 소중한 피난처이자 위로였다. 그는 그런 사연을 구체적으로 입에 올리진 않았다. 하지만 절망에 빠질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워준 숲을 끝없이 끝없이 걸어보고 싶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어떤 존재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와 연관된 모든 것이 알고 싶어지는 것처럼, 소중한 숲을 이어주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그  길을 몽땅 알아보고 싶었을 거 같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왜 그를 사랑하는 거지? 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그를 사랑하니까요”라는 답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엠마의 여러가지 답변 중 가장 정확한 건 이 말 아니었을까.  “그냥 걷고 싶으니까요.”

의지가 나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씩 세상은 우리의 뜻 ‘밖’에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유 없이, 그냥 아프기도 한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그냥 울고 그냥 슬퍼한다. 그냥, 미칠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것, 끌리는 것, 하고 싶은 것. 이 모두에 대해서도 굳이 이유를 붙일 필요는 없다. “그냥, 좋아서요.” 그걸로 충분하다. 

※지난해부터 매달 연재된 ‘삐삐언니의 책방’이 이번달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저자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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