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적합한 인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는 전언을 읽습니다”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적합한 인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는 전언을 읽습니다”
  • 박목우
  • 승인 2023.12.06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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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박목우 작가의 에세이
광대하고 쓸쓸히 아름다운 허공이 핏빛의 작약을 틔워내
이제 길의 초입에 서 있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
성난 파도가 되기보다 가난한 해변가 마을의 고기잡이 배를 띄우는 물결이 되기를
사랑이 우리 모두를 이어줄 필연임을 말하는 글을 쓰고 싶어
픽사베이.
픽사베이.

 

주님, 새벽의 어둠은 적막합니다. 우리 서로가 적막할 때, 붉은 작약이 피어납니다. 멀고 먼 그리움이, 가로놓인 허공의 깊이로 인해 닿을 수 없이 간절해집니다. 어쩌면 그것은 길 떠나는 마음이라 당신 수난의 역사처럼 마음까지 닿았을까요. 우리가 당신께 받은 그 적막함이 둘 사이에 놓인다면 말입니다.

그 텅 비고 광대하고 쓸쓸히 아름다운 허공이 핏빛의 작약을 틔워냅니다. 사랑은 가까이 보아야 하는 풀꽃과도 같지만 실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공허를 마주할 때야 비로소 작약 같은 그리움으로 탄생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지평선에서부터 떠오르는 별빛들이 어두운 밤으로 밀려들어 세상을 밝게 비춥니다. 해변에서 저는 매일 물결무늬를 노래하고, 사랑하는 이는 고독 가운데 생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요. 소통되고 흐르는 마음이 우리를 묽고 투명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요. 너와 나의 경계가 지워지고 공통의 것을 어느덧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라, 그래요, 사랑할 수 있을 거라 꿈꾸었습니다.

이제 길의 초입에 서 있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제 가난한 언어로는 기도할 수 없었겠지만, 주님은 곁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제가 마땅히 이야기해 줘야 할 맑고 밝은 기운을 전하게 하십니다. 투명한 어둠을, 소란스럽기만 한 세상에서 조용히 울다 사라지는 풀벌레처럼요. 세상의 너무 많은 슬픔은 오늘도 여전하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너무 조용한 저의 방에 모빌을 걸어둡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름다운 화음을 내라고요. 지금 슬픔에 빠진 이들의 가슴에 투명한 그 소리 들려주라 하십니다.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하라 하십니다. 푸른빛의 단소처럼 더 단단한 악기가 되어 간절한 기도문에 리듬과 화음을 넣습니다. 주님, 당신이 품으셨던 적막함이 온 산야를 깨웁니다. 그것은 긴 악보를 가진 노래, 세상이라는 꿈을 넘어설 수 있는 맑은 노래를 듣습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새로운 샘을 팝니다. 어떤 언어들이 있는, 샘솟아 나오는 샘. 물의 길을 따라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먼 곳에 이르기까지 여정에서 물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큰 바다에서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주님, 기도합니다. 성난 파도가 되어 해변을 삼키기보다 가난한 해변가 마을의 고기잡이 배를 띄우는 물결이 되기를. 어린 파도를 설득하지 않고 놓아주기를. 알아야 할 것이 많은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를. 가두지 않기를. 가두어도 염전의 흰 소금으로 환하게 남기기를.

빛과 물이 만나 서로에게 스민 기척을 짜디짜게 깨달으며 가장 불행한 이의 국밥에 따스하게 풀어지기를

픽사베이.
픽사베이.

 

주님, 얕은 물이 발을 적십니다. 물결과 물결 사이에 제가 있습니다. 누군가 갈라놓은 홍해의 바닷길에 와 있습니다. 꿈은 엷고 빛나고 투명합니다. 절박한 아픔이 저를 삼키려 하지만 당신께서는 평온히 걸으라 하십니다. 저만이 간직한 발자국을 당신의 영토에 새기라 하십니다. 길의 양편에서 끊임없이 저를 위협하는 파도에 대해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저의 발자국이, 남겨진 그 길을, 누군가의 마음이 걸을 것이라 그때 저에게 스며 있던 이 깊은 평온을 새겨두라 하십니다.

누구일까요. 제가 가는 길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가만히 맞추어 볼 사람. 그에게 남겨질 것을 헤아려봅니다. 저는 알겠습니다. 이 길의 끝까지 걸어 삶을 남기는 것은 책임이자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이라 우열과 승패를 가를 수 없지만 삶은 누구나에게 사무치는 슬픔이라서 우리는 기쁨을 발명하기도 한다고요.

발바닥을 모래바닥에 대고 걷습니다. 슬어가는 걸음이 비록 변변찮아도 발을 적시는 물결은 맑고 누군가 단독자로 이 길을 또 걸어가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이 바람과 이 빛과 이 땅거미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도 그만의 힘으로 새겨넣을 영혼의 춤. 보이지 않지만 주님처럼 살고 싶은 어린 짐승들이 한없이 꿈을 꾸게 하는 춤. 주님을 모르는 이도 구원을 이루는 곳. 당신과 나처럼, 아주 모르는 이처럼, 주님께서는 열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침이 옵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수면 아래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들 가운데 몇몇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저는 허리를 굽혀 그 소리를 줍습니다. 긴 장대로 매어 놓은 빨랫줄에 색색가지 빨래집게로 집어 놓은 것은 주님의 은총이었는지 모릅니다. 햇빛과 바람 속에 젖는 말들이 힘껏 돌려세우는 당신의 등. 빛에 젖은 등자락.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빛나고 아무 위로가 없어도 견뎌내었던 당신의 어떤 나날이 길었습니다.

빨래집게로 그 시절의 사진을 걸어놓습니다. 폴라노이드 사진 속에서 당신의 깊은 일들이 배어나오듯 틀을 갖춘 것을 봅니다. 번져가는 빛, 사진의 사방으로 따뜻이 열려 있는 통로. 그 사진들을 가지기 위해 당신이 포즈를 잡았던 건 아니었지요. 다만 당신이 계신 곳에는 늘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가능성들이 아름답게 번져 있었습니다. 당신의 주님이 열어놓으신 그 길에서 당신의 가슴이 따뜻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마치 깊은 물에 닿았던 것들이 허공이 되듯. 비어 있음 속에서 당신의 하루가 밝습니다.

그 너른 지평을 채울 빛은 몹시도 지독했을 당신의 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빛은 뼈아프고 수면은 평온하여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침묵들만이 언어처럼 채워진 공간. 당신의 호수에 수련이 핍니다. 그 모습 다시 아름답게 봅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찬 바람이 부는 초겨울의 밤, 전등을 밝히고 글을 읽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갖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는 전언을 읽습니다. 연민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거나 기만하기 쉬운 감정이므로 당신을 연민이 아닌 사랑으로 만나려 합니다.

사랑이 우리 모두를 이어줄 필연임을 말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 뒤에야 당신의 이마에 손을 얹고 싶습니다. 오늘 아팠던 당신의 하루가 밝아지도록 긴긴 기도문을 읊고 싶습니다. 곁에서 지키고 싶습니다. 커다란 우산을 함께 쓰고 걷는 연인들의 걸음걸이로 당신의 잠을 보살피고 싶습니다.

가난한 우리는 매서운 바람 앞에서 춥고 외롭지만 여기 불빛이 있어 이곳으로 모여듭니다. 모여든 누구나에게 온기 어린 말을 건넬 수 있기를, 그들의 잠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의 이웃이 되면서 필연이 됩니다. 쉽지 않은 길을, 우리는 걸어갑니다. 세상을 들어올리며 설산을 넘습니다.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을 것들에 깊이 젖어듭니다. 어둠과 추위도 우리의 만남을 어쩔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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