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인을 죽음의 이미지로 소비하지 말라
정신장애인을 죽음의 이미지로 소비하지 말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04.17 19: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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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시 아파트 방화 살인 사건 용의자는 '조현병' 당사자
그의 삶의 사회문화적 분석 없이 정신적 질병으로만 몰고가
누구가 걸릴 수 있는 정신질환을 '죄악시'하는 사회가 문제
정신장애인 친화적 인프라가 지역사회에 꾸려져야
고립되지 않고 병을 드러내면서 살아야 건강한 사회

J씨에게

여여(如如)하신지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리고 스마트폰을 봤을 때 저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처럼 괴물로 변해 있는 세상과 마주했습니다. 정신장애인이 사건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본 것입니다.

17일 경남 진주 가좌동의 한 아파트에서 입주민 안모(43) 씨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놀라 뛰쳐나오던 아파트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이 숨지고 최소 13명이 부상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지난해 12월 정신장애인 내담자가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흉기로 살해했을 때, 저는 그 사건 이틀 후 임 교수의 장례식장에 꽃을 놓았습니다. 정신장애 운동을 하는 활동가가 “올해 무슨 일이 더 터질까 두렵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 염려가 현실적 발화가 된 사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안 씨는 2015년 12월부터 이 아파트에 혼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2010년 범죄 혐의로 체포돼 공주치료감호소에 수감됐던 전력이 있습니다. 그때 감호소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는데 ‘편집형 정신분열증(조현병)’ 판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출소 후 2015년 1월부터 2016년 7월까지 진주 시내의 한 정신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알고 있는 정보들입니다. 그는 분명 조현병 환자였습니다. 그리고 치료의 연속성이 훼손된 정신장애인이었습니다. 그가 정신질환으로 몇 번이나 입원했는지 퇴원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가 조현병을 갖고 있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정신장애, 아니 정신질환에 대해 ‘불가촉천민’의 형식으로 거부합니다. 어쩌면 그 거부의 내면에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것을 미지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두려움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정신장애에 걸리기 전에는 비정신장애인들처럼 정신장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가르쳐준 게 미디어였는지, 아니면 우리의 신화 속에서 구성되는 정신질환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마을에 살고 있는, 정신병원에서 갓 퇴원했다는 동네 아저씨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던 건 사실입니다.

그랬던 제가 이제는 정신병원을 다녀온 정신장애인이 돼서 세상 앞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내가 관절염을 갖고 있고 그래서 사고를 쳤다면 언론이 이를 보도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사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조현병을 갖고 있고 슈퍼에서 껌을 한 통 훔쳤다면 이것은 기사가 됩니다.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언론의 일반적 시선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시민은 미디어가 보도하는 어떤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면서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인구의 80%가 그런 채널을 통해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구성하게 됩니다.

정신장애인은 어떨까요. 정신장애인은 사건사고가 나지 않는 한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로 존재합니다. 죽음이 일상 속 또 하나의 삶이 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누군가가 존엄하게 사망하면 그를 애도했고 사람들은 불러 함께 예를 지내는 공동체적 규율에 익숙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서 죽음은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졌으며 죽음의 이미지는 사회에 나올 수 없게 됐습니다.

정신장애인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의 청결성을 위해 ‘오염투성이’인 정신장애인은 사회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정신병원에 있어야 했고 정신요양시설에 가둬져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온 정신장애인이 사고를 치면 이는 하나의 이슈화가 되면서 정신장애인의 배제와 감금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맙니다. 비정신장애인들은 정신장애인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의문을 품습니다.

20세기 초반 칼 빈딩이라는 독일 정치사상가는 수용소와 정신병원에 갇힌 정신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존재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노동자는 노동을 해서 국가의 부를 창출하고 군인은 국가를 지키는 역할을 하지만 정신장애인은 그 어디에도 쓰일 수가 없는 ‘버러지’ 같은 존재가 돼 버린 겁니다. 20세기 중반 나치의 정신장애인 학살도 이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요.

우리 정신장애인은 가치 있는 존재일까요. 우리는 살아가서는 안 되는 미완의 존재들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정치적 요구를 하지 못하고 격리되고 배제된 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두려움과 공포라는 주홍글씨를 남기게 만든 걸까요.

J씨.

사건을 일으킨 안모 씨에 대해서 <마인드포스트>는 결코 그의 죄를 감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했고 사람을 사상시켰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정신장애인들의 일상적 삶이 치료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신적 질병을 두려움 없이 알릴 수 있고 국가체계와 병원, 사회복지체계가 상호 연관돼서 정신질환을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면 저 안씨와 같은 사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인력과 기능을 강화하고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과 전문의, 간호사, 임상심리사, 사회복지사가 다학제팀을 구성해 방문하고 진료했다면 그의 고독감과 괴리감, 망상과 같은 심적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지 않았을까요.

임세원 교수 피습 사건 후 정치권과 사회는 정신장애인을 옭아매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각 병동에 비상벨을 설치하고 비상통로를 배치하는 것 등은 그 사유의 밑바닥에는 정신장애인은 위험하다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왜 국가는 정신장애인이 인간의 존엄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구축하기보다 끊임없는 낙인과 차별 쪽으로 몰아온 걸까요. 그리고 사회는 정신장애인의 존재를 무시하고 외면하다가 사건사고가 나면 정신장애인을 현실로 소환해 집단적 낙인을 찍는 것일까요.

J씨.

이번의 안씨 사건과 관련해 <마인드포스트>는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우리의 동료인 조현병 당사자가 저지른 이 사건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안씨의 사건을 통해 정신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더 강화될 것이고 시민들은 정신장애인에 대해 ‘격리’와 ‘배제’에 기꺼이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왜, 언제나 정신장애가 사회적 혼란과 두려움의 표상이 돼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지금 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난해 7월 경북 영양군에서 정신질환자가 흉기로 경찰을 살해했을 때, 그리고 같은 해 12월 임세원 교수 살해 사건 때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살인사건은 858건. 그 중에 정신장애인이 저지른 살인사건은 3건이었습니다. 하루 3건 정도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지만 언론은 유독 정신장애인이 저지른 사건만 부각시켰습니다.

저는 이제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담론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것인지,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지, 정신장애인의 존엄한 삶을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 자원이 동원돼야 하는지, 왜 강제입원을 정신장애인들이 거부하는지에 대한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시스템을 변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사건은 곧 잊혀질 것이고 그 후 정신장애인은 다시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로 있다가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지면 사회로 소환돼 낙인찍히는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우리 정신장애인을 죽음의 이미지로만 소비되고 말 테니까요.

여여(如如)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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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신행 2019-04-23 17:40:28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점점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노골화 되는 상황에서 이런 글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