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희 “정신장애인과의 결혼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이설희 “정신장애인과의 결혼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01.18 2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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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인터뷰
비정신장애인과의 결혼, 흔하지는 않지만 나는 ‘사명감’으로 결혼해
20대 초반 꾼 꿈에 보인 얼굴…20년 후에 만난 남편의 얼굴과 똑같아
남편의 치료를 영적 싸움으로 생각해…약물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오류 있어
농약 먹고 극단 선택 시도한 남편, 가족도 포기했지만 기도로 3일 후 깨어나
남편은 사명감으로 책임졌지만 만약 아들이었다면 마음 무너져내렸을 것
하나님 만나지 않았다면 결혼도 안 하고 화가로 자유롭게 살았을 것
사랑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남편의 불쌍한 영혼을 사랑했기에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 편했겠지만 내 마음은 기쁘지 않았을 것
노동과 노동의 대가는 자존감 회복시켜…재활은 곧 회복의 여정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스무 살 무렵, 이설희(63) 씨는 꿈을 꾸었다. 온통 잔디밭으로 된 언덕에 앉아 있었다. 들판 저쪽에서 이쪽까지는 작은 흙길이 쭉 뻗어 있는데 멀리서 그 길을 따라 남자들이 마차를 앞세우고 걸어오고 있었다.

마차는 그가 앉아 있는 언덕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들이 힘을 다했지만 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남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말갈기를 쓰다듬자 말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 뒤에 있던 남자들이 그 틈을 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그 말이 남자 얼굴로 변하는 걸 놀라서 바라보다가 꿈에서 깼다.

삼십대 후반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는 정신장애인 아들을 둔 부모가 있었다. 아들은 집에 왔다가 떠났다가 또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기도원에 있던 그 남자는 정신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며 포기했던 사람이었다.

교회 교구장이 천안에서 같이 살겠다며 부모를 설득해 데리고 내려갔다. 천안은 포도밭이 넓게 형성돼 있었다. 어느 날, 교구장을 돕기 위해 차를 몰고 천안에 들른 설희 씨는 천지가 포도밭인 그곳에서 작은 길이 뻗어있는 것을 봤다.

“어디서 봤더라?” 20대 초반 꾸었던 그 장면이었다. 그리고 사람 얼굴로 변하던 그 말의 얼굴은 바로 남편이 된 김현욱(가명·60)이었다.

삶이란 많은 우연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필연성이 내재돼 있다. 우연은 곧 필연이다.

설희 씨는 남편을 위해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바쳤다. 사랑 때문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사명감이었다”고 말했다. 사명감이라. 세상을 살아가며 명예와 돈보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는 아는 것이었을까.

걸핏하면 집을 나가서 노숙인이 돼 오던 그를, 산속에서 며칠을 모기에 뜯기며 퉁퉁 부은 몸으로 집을 찾는 그를, 농약을 마신 그를, 섬마을에 팔려갈 뻔한 그를 보면서 아내 설희 씨는 아팠고 그래서 지켰고 견뎠다. 그는 “신앙이 아니었다면 남편과의 연결고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십대 초반, 미국에 있는 친언니가 초청을 했을 때, 그는 미국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 미대 교수가 될 꿈을 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 생활 2년 만에 한국의 어머니가 아프다며 그를 소환했다. 그는 돌아왔고 이후 교회를 선택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 신앙의 처음과 끝에 남편 현욱 씨를 만났고 이후 지켰다. 마흔 살에 결혼한 후 일 년 후 아들을 낳았다. 외아들은 지금 군 복무 중이다.

기자는 이번 인터뷰에서 개신교 이론을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설희 씨는 삶의 많은 견딤의 힘을 신앙에서 찾고 있었다. 그의 존재론적 믿음의 가치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종교적 용어를 그대로 옮겼다.

정신질환을 가진 이들은 종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개신교로 가톨릭으로 불교로 가지만 그 신앙은 단순히 복을 받는 통로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견뎌나가는 데 하나의 나침반이며 화염에 의해 타오르는 생의 모순을 이겨내는 힘으로 작동한다.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는 것을 초월적 존재를 호명하며 견디는 것이다. 따라서 삶이란 온전히 ‘견디는’ 먼 여정이다.

신(神)의 사랑은 그때 비로소 작동한다. 현재 설희 씨는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신도림역 인근의 15층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이 비정신장애인과 결혼하는 건 그렇게 흔하지는 않습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하겠죠. 저도 신앙인으로서 사명감에 의해 결혼했어요. 교회에 전도된 첫날 인생의 고민거리가 풀리고 지병이 낫는 체험을 했어요. 그날 교회에 전화가 왔는데 평택에서 농사짓는 집사님이 자기 아들 김현욱(가명)을 집에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도 부탁을 했어요.

저는 청소년인줄 알았죠. 제가 구역장이 되면서 그분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러 갔죠. 1년 정도. 김현욱 씨는 기도원에 있었고.”

-당시 남편은 기도원과 집을 전전하고 있었다구요.

“기도원에서 좋아지면 집으로 오고 며칠 지나면 획 끌려서 집을 나가요. 농사짓는 부모님이 통제할 수 없었던 거예요. 하루는 기도원에 심방(개신교에서 신자들의 거처를 방문하는 의식)을 갔다가 거기서 김현욱 씨를 처음 만났어요. 청소년이 아니라 키 크고 나이든 어른이었어요. 눈동자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고.

이후 기도원에서 돌아왔다가 3일 만에 다시 집을 나갔대요. 기도를 요청해서 차를 몰고 갔는데 그날 저녁에 김현욱 씨가 집에 돌아왔어요. 얼굴은 새까맣고 공포에 질린 눈동자에 모기가 피를 빨아먹었는지 다리가 부어서 터지기 전이에요. 너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어요.

나중에는 통제가 안 되니까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죠. 몇 개월 지나고 병원에서 전화가 와요. 김현욱 씨가 살 가망성이 없다고. 병원에서도 포기했는데 교회 교구장님이 부모님께 ’하나님께 맡겨보세요, 도와줄게요‘라고 했답니다.”

-스무 살 초반에 말이 사람으로 변하는 꿈을 꿨는데 그 꿈에서 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20대 초반에 절을 다녔는데 신기한 꿈을 꾸었어요. 나는 잔디밭으로 된 언덕 위에 앉아 있고 저 끝에서부터 내가 있는 곳까지 길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저 끝에서 말이 마차를 끌고 오고 사람들이 한 명씩 줄지어 따라와요. 그런데 내가 있는 곳까지 와서 마차가 멈추니까 뒤에 사람들이 앞으로 나가질 못해요.

남자들이 말을 들어 옮기려고 하는데 말이 움직이지를 않죠. 그래서 제가 도와드리겠다고 하니까 말 고삐를 주면서 그러래요. 말갈기를 쓰다듬으면서 내가 도와줄까 하니 말이 고개를 끄덕끄덕해요. 그래서 말고삐를 잡고 이랴하니까 말이 옆으로 움직여요. 사람들이 와 하면서 다 빠져나갔죠.

내가 말에게 잘했다고 하려는데 말 얼굴이 사람 얼굴로 변하는 거예요. 말이 남자 얼굴로 서서히 변하는 거야. 놀라며 꿈을 깼어요. 스님한테 해몽을 부탁했는데 혀를 차듯이 싫어해서 아무 말도 안 해줬어요. 그 이후로 절에 가지 않게 됐어요.”

-말이 사람 얼굴로 변했는데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 된 김현욱 씨였다고.

“그 꿈을 잊고 살았어요. 남편 퇴원하고 천안에 사는 교구장님 내외가 남편을 당신들 집으로 데려가서 보호하기로 했어요. 천안에 포도밭이 많은데 교구장님이 포도 주스를 만든다고 해서 차를 몰고 포도를 사러 나갔어요.

찾아가는데 길이 하나만 있고 온통 포도밭이야. 끝도 없는 포도밭에 길이 딱 하나. 어디서 많이 본 거 같다고 생각하다가 그 꿈이 떠오르는 거예요. 어디서 많이 봤다, 아 이 사람 김현욱 씨네.”

-혹시 자기 운명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기억 조작은 아닐까요.

“기억을 일부러 조작할 일이 없죠. 꿈속에서 봤던 남자 얼굴이 남편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아, 이건 하나님이 나한테 준 사명이 아닌가. 예술가들은 몰입하는 경향이 강해요. 저도 뭔가 꽂히면 고집이 세서 목숨을 걸어도 그걸 하는 스타일이니까. 그게 아니었으면 저는 못 했을 거예요.”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그 꿈을 통해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결심했다고요.

“그 십자가를 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남편의 부모님께 전화해서 꿈 이야기를 하고 꿈속의 남편이 김현욱 씨 같다고 말했어요. 어리석었다고 할까. 세상을 너무 몰랐다고 할까. 부모님이 허락을 안 하시죠. 어떻게 그런 꿈 하나 믿고 결혼을 시킬 수 있겠어요.”

-결혼한다는 건 종교적 사명보다는 현실적인 의미로 접근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그런 결혼도 있어요. 아들은 엄마가 아빠와 결혼한 게 이해가 안 된대요.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신앙 안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있어요.”

-결혼은 전투였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저는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영적으로 싸운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날마다 기도를 전투처럼 한 거예요. 날마다 교회 가서 기도하고 집에 오면 또 기도하고 말씀 보고 기도하고. 그렇게 살았어요.”

-결혼 후에도 남편은 자주 입원했습니까?

“입원은 안 했어요. 병원에서 죽게 된 사람을 다시 병원에 입원시킬 수는 없죠. 그런데 남편이 어느 시점부터 또 끌려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애를 낳고 한 달 동안 미역국을 끓여주더니 어느 날부터 끌려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해요.”

-끌려다닌다는 말이 무슨 의미죠.

“자신은 나가고 싶지 않지만 어떤 힘에 의해 끌려나가는 거예요. 이유 없이 나갔다가 며칠 후에 들어오고. 평택 시부모댁에 내려가면 시골집 유리창을 다 부수고 난장판을 쳤어요.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도 제가 시댁에 가면 제 말은 듣고 따라와요. 누구 말도 안 듣는데 제가 가면 제 말은 들어요. 그럼 이걸 사명이라고 하지 뭐라고 할까요.”

-남편의 망상과 환청도 심했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그때는 환청·망상 없이 끌려다니기만 했대요. 제가 남편에게 끌려다니는 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엄마를 왜 때렸겠느냐. 자기 손이 그냥 엄마를 때렸다’라고. 완전히 다른 힘에 의해 살았던 거죠.

집을 나가면 지하철 노숙자가 돼서 쓰레기통 뒤져서 먹고 옷도 다 뺏기고 시계 뺏기고 결혼반지도 다 뺏기고. 집에 돌아올 때는 다 떨어진 남의 옷을 입고 와요. 저는 기도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기도만 열심히 한 거죠. 제가 정말 무지했던 거예요.”

-어떤 무지인가요.

“약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랐으니까요. 정신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퇴원한 사람이니까 약을 쓸 생각을 못 하고 기도만 했던 거예요. 그렇게 끌려다니다가 남편이 시댁에 내려가서 창고에 있는 농약을 먹었어요.”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사흘 만에 깨어났다고요.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가망이 없대요. 심장도 멎고 항문도 벌어지고 동공이 열리고 했으니 뇌사 상태였죠. 가족이 다 모여서 화장할지, 매장할지를 논의하는데 제가 남편을 포기 못 한다고 했어요. 남편 호흡기 빼는 걸 거부하고 중환자실에서 남편을 지켰어요. 기적같이 3일 만에 남편이 깨어났어요. 한 달 뒤에 퇴원하고.”

-산에서 손발이 묶인 채 며칠을 있다가 등산객에게 발견돼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서울에서 살 때인데 병원에서 퇴원하고 더 길게 집을 나가요. 한번은 열흘 동안 연락이 없어서 기도를 했어요. 어디에 묶여 있는 모습이 꿈에 보이더라구요.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경기도 성남의 산에서 등산객이 사람 살리라는 소리를 듣고 가 보니 남편이 손과 발이 꽁꽁 묶여져 있었대요. 얼마 있었냐고 하니 이삼일 있었다고. 다행히 날씨는 춥지 않은 계절이었어요.”

-누가 묶은 겁니까.

“경찰이 저한테 오히려 물어요. 남편이 자기 다리를 가리키면서 ‘예네들이 그랬다’고 말한다면서 무슨 뜻이냐고. 남편이 늘 귀신이 자기를 끌고 다닌다고 하는데 그 말 같다고 했죠.

또 한번은 집 나가고 보름 뒤에 전라도 해변가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이를 업고 찾아갔어요. 남편을 보호하고 있던 집주인이 남편이 길거리를 배회하기에 택시기사가 자기 집으로 데려다줬다고 그래요. 제 생각에는 섬이나 배에 팔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좀 회복이 되면 팔아먹으려고 했는데 밥만 먹고 일을 못 시킬 것 같으니까 집으로 전화를 한 거죠. 신고하는 게 당연한데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알 것 같았어요.”

-이런 극단적인 경험은 인간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저는 그냥 그것도 감사함으로 받았어요. 트라우마보다는 신앙으로 극복했어요.”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조현병 딸을 23년간 돌보다가 딸을 살해한 노모(老母)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가가 돌봄을 가족에게만 전가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분석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감합니다. 저는 사명감을 갖고 결혼했으니 남편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참고 오늘까지 왔어요. 하지만 내 아들이라면 생각이 달라졌을 거예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사랑하는 자식을 그렇게 했을까요(눈물).

남편이기에 제가 더 담대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아들이라면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거예요. 엄마의 마음과 형제의 마음, 아내의 마음은 달라요. 엄마의 마음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요. 정신질환의 영역은 국가에서 책임져야 해요. 정신건강 위험 신호가 어릴 때부터 나타나고 있어요.”

-결혼은 배우자에게 서로 의지하면서 힘을 얻는 게 아닐까 싶어요. 선생님은 어디에 의지하십니까.

“저는 하나님에게 의지했어요.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살아왔어요.”

-정신장애인 남편을 둔다는 건 남편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남편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되는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살리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저는 세상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포기하고 버린 이 사람도 누군가는 살릴 수 있다고. 하나님이 살릴 수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던 거죠. 거기에 큰 가치를 두고 오늘까지 달려왔던 것 같아요.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눈물).”

-부모는 정신장애인 자식이 자신보다 하루 일찍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편도 자신이 나보다 하루 일찍 죽어야 된대요. 내가 먼저 죽으면 자기는 어떡하냐고. 제가 없다면 누가 또 책임집니까. 형제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 못 해요. 그들은 그들의 가정을 지켜야 하니까요. 아들이 짐을 질 건데 그러면 엄마로서 힘들잖아요. 그런 마음이죠.”

이설희 作 '봄봄' canvas on Acrylic, korean paper.
이설희 作 '봄봄' canvas on Acrylic, korean paper.

-당사자를 돌보다가 가족이 전부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도 어떤 때 너무 우울해요. 지치고 힘들 때 쉴 곳이 없어요. 누가 나를 위로해 줄까요. 그림을 그리면서 숨통을 틔워요.”

-남편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강화도에 있는 정신장애직업재활시설 희망일터에 다니고 있어요. 쌀 도정하고 포장하는 일이에요.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어려운 일은 아닌데 약을 먹기에 힘들어하더라구요.”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고 있습니까.

“제가 사회복지사 상담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사회복지사 급여가 적은 거 다 알잖아요. 그래서 아침에 청소 알바, 마트 알바 하면서 모자란 부분을 채웠어요. 지금은 힘에 부치고 건강이 나빠져서 못하고 있어요.”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선생님의 삶은 어땠을까요.

“친정 가족이 모두 미국에 있으니까 미국에 갔을 테고 원하는 그림을 그렸을 거예요. 공부 마치고 교수를 하고 싶었으니까 교수가 됐겠죠.”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운명이라는 건 정말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아요. 그런데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하나님을 만난 건 잘했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결혼 안 했을 거예요. 저는 비혼주의자였어요. 그림과 결혼을 했을 거예요. 화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제 운명을 하나님이 이끄신 거예요.”

-남편이 아닌 나를 위해서 뭔가를 선물하고 싶지 않나요.

“여행을 가고 싶어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일주일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 마시고 산과 들을 보면서 편안히 있다가 오고 싶어요. 그리고 생계비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친구들과 어울려 맛있는 것도 먹고, 차 마시고 싶어요. (웃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든다는 세속적 명제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제가 사랑이 없으면 이렇게까지 못 했을 거에요. 남편의 영혼을 사랑한 거죠. 육체가 아닌 그 사람의 영혼을요. 그건 가능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죠. 저는 불쌍한 영혼, 인간으로서 한 영혼을 사랑한 거예요. 사랑이 제일 큰 거에요.”

-천 년을 맹세한 사랑도 살다 보면 환멸을 느끼고 헤어지는 게 사람 인생입니다. 선생님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웃음) 저를 견디게 한 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가치’예요. 신앙을 떠나서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 그것이 이렇게 버텨오게 했던 거 같아요.”

-그 가치가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있지만 이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한 건 나에게 한 약속이잖아요. 결혼 서약할 때 힘들 때나 아플 때나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기로 약속하죠. 약속은 지켜야 되는 거잖아요. ”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선생님을 견디게 한 건 예배 속의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기도 중에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게 맞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장애인이라 결혼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습니까.

“제가 남편을 선택하기 전에 교회에서 어떤 사람하고 선을 보기로 약속돼 있었어요. 그런데 남편의 꿈을 꾸고 깨달았다고 했잖아요. 내가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했어요.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게 뭔가. 자기를 다 내려놓고 가식 없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요. 네가 바라는 게 뭔가.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가. 이 사람하고 결혼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서 자기가 선택해야 돼요. 저는 남편 대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편안한 환경에서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겠지만 제 마음은 기쁘지 않았을 거 같아요.”

-왜일까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거든요. 물 흐르듯 남들과 똑같이 결혼해서 편안하게 사는 것도 좋아. 그런데 어차피 이 땅에 한 번 왔다가 가는 게 정한 이치인데 내가 누군가는 살리고 가야 하지 않겠나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것이 내게 가치였어요.

정신장애인과의 결혼에 확신이 서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어요. 진짜로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이 사람하고 결혼해서 당신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과연 할 수 있을지를요. 저는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치로 뒀어요.”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는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상담하는 회원을 통해서 어떤 세미나에 갔는데 거기서 가족협회 임원이었던 분을 만나서 그분 통해 활동하게 되었어요.”

-언제였습니까.

“2년 전이죠. 가족협회가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진작 알았더라면 도움을 받았을 거예요. 그만큼 가족협회가 숨어 있어요.”

-정신건강복지센터는 다녀봤습니까.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제가 사회복지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됐고 가족협회 알면서 정신재활센터도 알게 됐거든요.”

-혼자 케어하면서 도움받을 데가 아무 곳도 없었겠어요.

“교회와 집, 기도밖에 몰랐어요. 알았더라면 혼자서 힘들게 살지 않았을 거예요.

-가족협회를 통해 어떤 정보를 얻었습니까.

“진작 알았다면 남편이 정신없이 돌아다닐 때 협회에 조언을 구했을 거예요. 다시 병원을 찾았을 거고 멀리 돌아오지 않았겠죠. 남편이 퇴원하면서 병원에서 소개해준 사회복귀시설(현 정신재활시설)에 일 년 정도 보냈어요.

점점 좋아지니까 다음에는 교회 마당을 쓸게 했어요. 회복은 재활이 중요해요. 일 년을 교회 마당을 쓸었어요. 그러면서 힘이 생기고 칭찬해주니 자존감도 올라갔고요. 저하고 아침마다 치과 건물 청소 알바를 꽤 오래 같이했어요. 남편이 서서히 회복하게 된 거죠.”

-사회복귀시설은 꼭 알아 둬라?

“사회복귀시설은 알아두는 게 좋아요. 제가 다른 분들도 소개해 줬는데 도움이 돼요. 본인들은 인정하지 않는데 제가 볼 때 많은 도움을 받더라고요. 저는 남편에게 은행 업무, 핸드폰, 밥솥, 세탁기 돌리기 등 기본적 일상생활에 재양육을 했어요.”

-남편이 어떤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남편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면 장애인활동지원 자격증을 따서 남편과 같이 일하고 싶어요. 가장으로서 남편으로 당당하게 살기 바라요.”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노동이 인간을 회복시키는 건가요.

“정말 그래요. 노동하고 노동의 대가를 받으면 자존감이 회복돼요. 그동안은 제가 억지로 끌어서 노동을 시켰죠. 그것도 회복의 여정이에요. 재활은 딴 게 없어요. 남편이 역할분담 해서 빨래하고 밥만 치는 걸 담당해요. 저는 반찬 만들고 청소하고요. 밥솥에 밥 안치는 거 어렵지 않잖아요. 그것도 재활이에요.”

-약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에는 저는 약물에 대해 몰랐어요. 약이 증세를 눌러주잖아요. 남편은 만성이라 환청을 없앨 정도로 처방하면 아무 일도 못 해요. 그런데 딱 맞는 약을 먹으면 일상생활도 가능하고 환청도 잡히겠죠. 그런 약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그런 약을 찾기가 쉽지가 않아요. 약은 꼭 먹어야 하고 적정량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에서 기도만 하라는 거는요.

“병원에서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렸지만, 남편이 끌려다니는 사건을 보면서 다시 병원에 입원시켰죠. 그런데 약을 먹으니 통제가 돼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고 일상생활도 가능해졌어요.”

-일부 교회에서는 약 먹지 말고 기도만 하라고 하지요.

“잘못된 거예요. 제가 경험자예요. 정신질환자들은 말 한마디에 달라져요. 말 한마디 잘 해 주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요.

사실 초발 때 약을 확실히 쓰면 더 나빠지지 않아요. 약을 먹지 않아서 재발할 때마다 뇌 기능이 저하돼요. 남편을 다시 끌어올리려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남편이 궁금한 걸 물어보면 저는 열 번, 백 번을 똑같은 대답을 해 줘요. 남편은 똑같은 질문을 계속 물어요. 대부분 사람은 그걸 못 견디죠. 6개월에서 1년 정도 되니까 하나씩 이해해요. 조금씩 나아지는 거죠.”

-사랑이 뭘까요.

“사랑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담당하는 거예요.”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랑이죠. 결혼이 깨지는 이유가 상대를 긍휼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에요. 남편에게 당신 왜 안 해, 왜 못해라고 권리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내 의무를 다하고 그 사람이 하지 못했으면 왜 못했을까 고민하고 왜 안 될까,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죠.

부모는 모델이란 말이에요.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을 자식들도 배워서 그대로 살 거란 말이에요. 가정 하나가 성공하면 사회가 성공하는 거예요. 저도 그 누구보다 상처 입은 사람인데 그 상처로 내가 또 누구에게 상처를 주더라고요. 내 상처가 크니까 방어 기제로 상대방을 공격해 찌르잖아요.

사회복지사 공부하면서 부모교육을 받고 많이 변했어요. 부모든지 신혼이든지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다 부모교육을 받아야 해요. 부모교육을 받으면, 내가 내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라고 깨닫게 되죠. 잘못 양육 받았고, 자식을 잘못 양육하고 그래서 자식이 상처를 받아요.”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이설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을 돌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정신장애인들은 마음이 연약해서 상처를 쉬 입고 이해를 못 하니까 왕따를 당하고 가족에게서도 무시를 당해요. 이들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다뤄야 해요. 틀릴 수 있고 잘못할 수도 있는데 그때는 힘들구나 다독거려 주고 다시 갈 수 있게 도와줘야 돼요. 옆에 기둥처럼 받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넘어지지 않고 갈 수 있는 거예요.”

그에게 미처 못한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남편을 선택하고 살아오면서 후회는 없지만 사회의 도움이 너무 없었다”며 “국가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가족이 당사자를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기자는 안다, 그 말이 어떤 뜨거운 화염의 고통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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