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격에 맞는 지역 정신보건 인프라를 위한 조건들
대한민국 국격에 맞는 지역 정신보건 인프라를 위한 조건들
  • 오현성 교수
  • 승인 2023.08.25 1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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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성 미 애리조나주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지역사회 서비스 1천억 vs. 정신병원 2조2000억...장기입원의 폐해
애리조나주, 한해 8800억 원 정신건강에 지출...한국 중앙정부의 15.7배
조현병 환자 입원기간 미국 8일인데 우리는 250일...지역사회 서비스 투자의 차이
오현성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c)마인드포스트.
오현성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c)마인드포스트.

지난 2016년 5월 29일 정신건강복지법 전부 개정 당시, 가족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동안은 치료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가족의 동의만으로 자녀, 배우자, 형제자매를 정신병원에 장기입원 시킬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소수의 교수, 인권운동가, 장애인, 법률가, 정신과 의사들만이 이 법의 개정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고민했다. 대다수의 권력자들과 언론은 이 법률개정을 매년 수백 건씩 발생하는 법률개정의 하나로 치부했으며, 언론은 정신보건법 전부개정을 단신으로 처리했다.

정신건강복지법이 통과되기 전 당사자가 환각이나 망상 증상으로 인해 치료가 필요하다고 가족과 담당 정신의학전문의가 판단할 경우 전직 격투기 선수들로 구성된 사설 이송대가 경찰의 개입 없이 완력으로 당사자를 제압하고 정신병원으로 이송했다. 공공의 감독 없이 입원한 정신병원에서 2014년 입원했던 환자들은 평균 310일이란 긴 시간을 정신병원에서 살아야 했다.

2017년에 연구를 하며 만났던 가족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장기입원을 하면 정신병이 치료돼 예전의 나의 딸로 돌아올 거라 믿었어요.” 하지만 사회로부터 단절된 공간에 머물면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한 기능을 오히려 상실해버렸다. 지역사회에서 최대한 일상생활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치료가 최고의 치료라고 현대 정신의학의 임상 가이드라인에 적혀 있다.

7년이 지난 2023년 여름, 정신건강복지법에 영향을 받는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가들은 정부에서 발표하는 모든 보도자료와 언론 기사 및 사설에 주목하고 있다. 7년 전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으로 인해 목소리를 내는 당사자 운동가들이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당사자 운동가들은 자신의 신체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가족들도 큰 변화를 겪었다. 7년 전에는 자유롭게 자녀를 장기입원 시킬 수 있는 권한을 잃게 됐다는 분노가 컸지만, 이제는 자녀를 장기입원 시키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지역사회 정신재활 서비스와 정신응급 서비스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역사회 정신재활기관과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운영비 등은 2016년 대비 2021년에 1천804억 원 늘어나는 동안 건강보험과 의료급여에 의해 운영되는 정신의료기관의 매출은 동기간인 2016년부터 2021년까지 2조2천384억 원이 증가했고, 상당한 지출은 지속적인 장기입원에 사용됐다. 이를 보면, 7년 전의 소위 ‘인권친화적’ 법 개정의 실상은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가족들은 이제 말이 아닌 지역사회 정신보건 인프라 운영을 위한 ‘예산 증가’로 표현되는 실질적인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2016년 5월 29일에 법이 개정된 이후 지역 정신보건 서비스 예산을 7% 감소시키는 황당한 중앙정부 및 국회의 결정은 더이상 이해관계자들의 시선을 회피할 수 없다.

정신의학전문의들도 큰 인식의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제는 지역사회 내 재활서비스를 만들자고 사법입원의 추진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정신의학전문의들의 변화는 당사자들과 가족들의 변화로 인해 더 가속화되고 있다.

지난 1월 13일,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 삶을 옹호하는 정신장애인탈원화추진연대 발족식 및 기자회견이 여의도 일대에서 열렸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지난 1월 13일,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 삶을 옹호하는 정신장애인탈원화추진연대 발족식 및 기자회견이 여의도 일대에서 열렸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당사자들과 가족들은 진료실에서 이야기한다. 지역사회에는 재활서비스가 없지만, 그렇다고 병원에서 장기입원은 하고 싶지 않다고. 의사들은 지역사회 정신재활 서비스의 확충 없이는 더 이상 환자를 치료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됐다.

정신장애인들이 병원 밖에서 살기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에서 갖추고 있는 지역 정신건강 인프라가 필요조건이다. 미국 애리조나주에서는 2021~2022 회계연도에 750만 명 주민을 대상으로 6억7000만 달러(약 8710억 원)를 투입해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지역사회 기반 정신과 치료 및 재활 서비스에 제공하는데, 이 금액인 1인당 인구대비로 보면 한국의 중앙정부가 지출하는 금액의 약 15.7배에 달하고 있다.

이런 격차는 입원한 조현병 환자들이 한국의 경우 현재 1년 동안 250일을 입원하는 반해 미국은 8일에 불과한 차이를 만든다. 조현병을 가지고 살지만 납세자가 될 수 있는 비밀은 정신장애인이 병원 밖에서 살 수 있는데 필요한 지역 정신보건 서비스들을 운영하는데 세금을 지출하기 때문이다.

이해당사자들이 자각하기 시작했고, 권력자들이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7년 전 국무총리는 “지역사회 정신보건서비스의 확충”과 같은 내용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앞으로 지속적인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절대 빠르지 않을 것이다. 인내가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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