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연구] “우리의 해방은 멀고도 험하겠지만…서로가 서로의 해방에 초대해 전진할 수 있기를”
[해방연구] “우리의 해방은 멀고도 험하겠지만…서로가 서로의 해방에 초대해 전진할 수 있기를”
  • 배진영
  • 승인 2023.11.21 2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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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신보건연구회 배진영 회장 기고
가톨릭대 동문들의 정신보건 고전 읽기에서 시작된 모임
정신보건의 대안적 프로그램 필요성…오픈다이얼로그 연구
올해 첫 추계학술대회서 정신약물’에 대한 해방적 토론 진행
당사자, 가족, 현장전문가들의 날것으로의 토론…연민과 연대의 동력 찾기

해방정신보건연구회가 탄생한 것은 2021년 10월 어느 작은 방에서 가톨릭대학교 동문들이 모여 정신보건에 대한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대니언 리더의 ‘광기’라는 책을 시작으로,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 로널드 랭의 ‘분열된 자기’와 같은 고전들을 그저 우리끼리 어렵사리,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 후보군 중에서도 7080스러운 ‘해방정신보건연구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당시 모여있던 사람들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이들도 ‘무언가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 주체임을 인식하고 있던 학자, 실천가, 활동가들이었으니까요. 또 그 ‘무언가’는 2023년에 이르러서도 7080의 해방 정신으로 대해야 할 암벽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해방정신보건연구회의 이름이 정해졌던 순간. 화이트보드에 적힌 여러 후보군 중에 최종 선정됐다. 2021년 10월 23일. [사진=배진영]
해방정신보건연구회의 이름이 정해졌던 순간. 화이트보드에 적힌 여러 후보군 중에 최종 선정됐다. 2021년 10월 23일. [사진=배진영]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조금 더 확장된 활동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 2022년 겨울 즈음이었을 겁니다. 당시 연구회는 정신보건 영역에서 대안적 프로그램으로 관심이 조금씩 집중되던 ‘오픈다이얼로그’의 철학적 기반이 되는 저서들을 함께 읽고 있었고, 이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도 상호 교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월례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오픈다이얼로그에 관한 강연이나 정신보건 정책에 관한 토론들, 광기와의 대화를 위한 북콘서트 등을 공개 개최하였습니다.

2023년 11월 18일, 지난 토요일 해방연구회는 첫 추계학술대회가 시작을 알렸습니다. 먼저 오픈다이얼로그가 점차 현장에도 전파되면서 이를 실천하고 있는 기관들이 늘고 있으니 그 경험과 이론을 정리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동안 연구회 구성원들이 연구해왔던 영역, 또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영역, 그러나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전혀 이야기된 적 없었던 영역인 ‘정신약물’에 대해서 처음으로 해방적 토론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1부는 ‘오픈다이얼로그의 이론 및 실천에 대하여’, 2부는 ‘정신약물과 대안적 접근법’이라는 제목으로 구성이 되었고, 첫 학술대회인만큼 연구회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주제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18일 진행된 제 1부 ‘오픈 다이얼로그의 이론 및 실천에 대하여’ 종합토론 현장. [사진=배진영]
지난 18일 진행된 추계학술대회. 제 1부 ‘오픈 다이얼로그의 이론 및 실천에 대하여’ 종합토론 현장. [사진=배진영]

1부 ‘오픈다이얼로그의 이론 및 실천에 대하여’는 오픈다이얼로그의 철학에 관한 유기훈 선생님(서울대의대 인문의학교실)의 정성스러운 발제로 시작했습니다. 바흐친, 부버, 가다머의 철학이 어떻게 오픈다이얼로그의 기반이 되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고찰이었습니다.

이어 류세나 아름다운세상 사무국장님과 이영수 청주정신건강센터 팀장님께서는 주간재활시설에서 오픈다이얼로그를 실시한 구체적인 사례들의 과정과 결과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천가로서의 소중한 반성과 고민들도 나눠주심에 따라 의미 있는 물음표를 남겨주셨습니다.

이은미 관악동료지원쉼터 팀장님은 당사자 주도 동료지원쉼터에서의 실천 경험을 통해 오픈다이얼로그의 생생한 위기 적용 사례를 전해주셨습니다. 주간재활시설의 경우에는 평소 실천가와 참여 당사자 간에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오픈다이얼로그를 실천했지만, 동료지원쉼터에서는 실제 위기에 직면한 당사자들과 낯선 실천가들이 오픈다이얼로그를 매개로 만남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차이나는 경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추계학술대회. 제2부 ‘정신약물과 대안적 접근법’ 종합토론 현장. [사진=배진영]
추계학술대회. 제2부 ‘정신약물과 대안적 접근법’ 종합토론 현장. [사진=배진영]

2부 ‘정신약물과 대안적 접근법’에서 현장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최근 <약이 병이 되는 시대>를 번역하신 장창현 선생님(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부드럽지만 강한 발제가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포함한 서로 다른 병·의원에서 환자에게 쉽게 정신약물과 칵테일 약물들이 처방되는 사례와 함께, 그에 대한 대안으로 직접 실천하고 계신 접근법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배진영)는 약이 병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관한 제도적, 담론적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동안 실제 당사자의 약물 경험들을 연구했던 결과와 약물을 둘러싼 사회적 힘과 장벽을 발표하였습니다. 위은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님은 실제 약물을 복용하고 중단했던 지난하면서도 역동적인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더불어 국내 현장에서 활용되는 약물복용 매뉴얼을 찬찬히 뜯어 주시며 웃픈(?) 현실을 직면하게 해주셨습니다.

추계학술대회 자리를 가득 메운 청중들. [사진=배진영]
추계학술대회 자리를 가득 메운 청중들. [사진=배진영]

무엇보다 당사자, 가족, 현장전문가 등 다양한 위치에 계신 청중들께서 여러 가지 물음과 실제 경험들, 의견들을 나눠주셨습니다. “저는 15년 동안 약물을 복용했지만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고, 이렇게는 살 수 없었기에 약을 서서히 줄여가는 도박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 아들도 클로자핀을 수년간 복용하고 있지만 일상생활이 어렵습니다. 더이상 우리는 이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투쟁 전략은 어떤 게 있을까요?”, “제 스스로 약물에 대해 실험을 해나가 보고 싶습니다.”

이따금씩 우리는 동시에 웃음이 터지기도 하였지만, 각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였던 고통의 순간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아마 우리는 연민과 연대라는 공동으로 나아가고픈 동력을 찾게 된 것이 아닐까요.

자리를 가득 채운 참여자들, 청중들의 열띤 토론, 끝나는 시간까지도 느껴지는 집중과 열의. 첫 학술대회는 해방 그 자체였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이제껏 일반적인 학술대회나 공론장에서는 이야기되지 못했던 억압된 이야기들이 처음으로 해방되고 분출되었으니까요.

토요일 오후 5시 30분, 해가 슬며시 지기 시작할 때 즈음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다음 해방을 향해 같이 나아갈 것을 기약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아마도 조금씩은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기존의 담론장에서 ‘해방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자리에서는 그들이 정하고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시스템에 ‘소속’된 채 그들과 타협 아닌 타협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해방연구회는 누구도 만들어주지 않은 자리를 우리들 스스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리고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해방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의지로 이렇게 조금씩 나아온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해방은 멀고도 험하겠지만, 학술대회에서 같은 의지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해방에 초대하여 거친 길도 함께 춤추며 전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해방정신보건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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