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지극히 정치적인 정신질환
정치적인, 지극히 정치적인 정신질환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1.25 2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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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 비판 판사에 ‘조울증’ 진단명 문의
정신과의사, 직접 대면 없이 ‘조울증’ 진단
이호진 태양회장 ‘우울증’ 진단 내린 의사와 술 마셔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정신질환 이미지와 포개져
정신질환은 질병 아닌 고도의 정치적 행위

한 사건이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사법부에 비판적인 법관에 대해 정신질환 진료기록을 허위로 조작해 재임용을 막으려 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 사건이다.

23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에 따르면 2016년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은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문건을 작성했고 당시 김동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에 대해 조울증 등 정신건강상 문제가 있다고 적시했다.

김 부장판사는 수원지법 성남지원 재직 중이던 2014년 9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1심 판결을 두고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라며 비판 글을 법원 내부망에 올려 정직 2개월의 중징계 처벌을 받은 바 있다.

법원행정처는 정신과 전문의에게 김 부장판사가 과거 불안장애로 치료를 받은 병력이 있고 지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이메일을 보낸 점 등을 알리고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리튬을 복용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신과 전문의는 ‘(편집증과 피해망상 등으로)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는 취지로 진단했고 법원행정처는 이 내용을 김 부장판사의 상사인 인천지법원장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검찰이 최근 김 부장판사를 비공개 조사한 결과 김 부장판사는 불안장애 치료와 리튬을 복용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또 해당 정신과 전문의와 이에 대한 자문을 구한 당시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이 검찰에 거짓 진단이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사건이 있다. ‘황제 병보석’으로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이호진 전 태광 회장의 행위들이다. 그는 병보석 규정을 어기고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하루 두 갑씩 태웠다. 그와 친분이 두텁다던 한 대형병원 정신증진센터 소장 A씨와 정신과 담당 여의사는 이 전 회장과 술자리도 같이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이 전 회장이 우울증 치료 중이며 전문 의료진의 집중 관리와 지속적 관찰, 절대적 안정 가료가 필요하다는 정신과적 소견을 써 준 인물이다.

통상 정신과의사는 내담자와 친분이 생겨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이자 권력관계에서 하부에 위치한 이와 무슨 좋은 일이라고 술을 마시겠는가.

그런데 그게 권력과 자본이 결합되면 정신질환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 권력과 자본은 정신과의사와 술도 마실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만약 내가 대기업 회장이라면 나는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정신과의사에게 ‘우울증’ 소견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권력과 자본은 인간의 본질적 질병마저도 왜곡해 버린다. 힘 있는 자는 저 소견서라는 ‘상품’을 통해 법적 무죄를 추정받을 수 있게 된다.

반면 권력과 자본에 대해 손쉬운 ‘진단서’를 쥐어주는 의료권력은 힘없고 나약하고 정신적으로 비정상적인 ‘병자’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미치지 않았어도 너는 미친 것이며 병이 없어도 의사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너는 끝까지 병이 있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 그 많은 정신병원 강제입원의 피해자들은 이 같은 프레임으로 끌려들어가 나오지 못했다.

만약 이 내담자들과 입원환자들이 동시적으로 퇴원하게 된다면 의료권력은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면 이들이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의료권력은 자신의 서 있는 토대가 근본적으로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카데믹한 권위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 그 희생양은 지금 병원에 있는 모든 ‘정신질환자’들이다.

분명히 진단서는 정치적 행위다. 그 서류를 없는 병도 지어낼 수 있으며 있는 질환도 없다고 해명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나는 김동진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망에 올린 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의미를 해석하게 된다. 사슴이지만 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주장이 근거를 얻기 위해서는 권력과 자본이 개입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나 손쉬운 이미지의 변형이다.

황제 보석의 장본인 이호진 전 회장은 ‘돈’으로 자신의 없는 병을 샀다. 반면 가난한 정신질환자는 없는 병도 있는 것으로 진단된다. 자본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구 소비에트 권력자들은 소비에트의 비(非) 사회주의를 공격했던 지식인들을 정신병원으로 집어넣었다. 일단 그 공간으로 존재가 이전되면 더 이상 이 반체제 인사들의 발언은 정치적 의미를 획득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비이성이 이성을 향해 중얼거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정신병원은 고도의 정치수용소가 되어 버린다. 독일 나치는 정신병원 환자들을 존재 가치가 없는 존재자로 규정해 가스실에서 ‘제거’해 버린다. 8만 명이 그렇게 죽었다. 스탈린 체제를 비롯한 모든 전체주의 권력은 정신병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김동진 부장판사를 향해 ‘조울증’ 병력이 있다는, 없던 질병도 만들어 내는 게 권력이다. 그런데 조울증이 있으면 판사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일까. 법은 해당 판사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판사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정신질환이 있어도 상원의원직까지 수행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조울증 병력 하나로 직업선택의 자유를 훼손해버리는 행위는 타당할까.

우울증 진단을 받은 판사가 있다는 걸 언젠가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고부 갈등 문제로 중증 우울증을 앓았으며 그로 인해 병가를 내고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울증은 감기 같은 것이니 초기에 치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우울증과 조울증, 조현병은 정신장애에 속하는 질병이다. 많은 지자체 조례에는 정신질환자가 공공도서관이나 문화예술관을 출입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그것은 어떤 논리적 근거가 없는 지독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울증도 어떤 편견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허구적 질병 코드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해버린 것은 아닐까. 조울증을 갖고 있을 경우 왜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지를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게다가 김동진 부장판사에게 정신병 ‘진단’을 내린 정신과의사는 김 부장판사를 직접 대면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법원행정처 지인의 말만 듣고 ‘조울증’ 진단서를 썼다. 정신과의사는 직접 대면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무작위로 진단을 내리는 것을 의료윤리 위반으로 보고 있다. 저 의사는 의료윤리 위반자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라면 저 진단서를 써 준 의사는 정치적으로 권력과 자본에 복종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런 정신과 의사에게 일반 정신장애인은 어떤 의미로 표상될까. 힘 없고 가난하고 게다가 비(非) 이성의 존재자에게 의료권력이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애초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편람(DSM)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있는지 묻고 싶다.

저 위의 권력자와 자본가와 결탁한 정신과 의료권력이 있다면 우리는 정신과에 대한 근본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의 질서가 과연 타당한가라는 질문도 함께 던져봐야 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정신질환에도 개입한다. 그리고 자본과 권력은 정신질환 진단이라는 근본적 상식마저 뒤틀리게 해버렸다. 정신과의사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보라. 당신들이 내리는 정신병적 진단이 진실로 옳은 것인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저 권력과 자본에 복종하는 정신의료도 권력이라면 당신들은 이성에 기반한 비정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진단내리는 하나의 ‘허상(虛像)’과 ‘허구(虛構)’에 기반한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그 허상이 있기에 당신들은 자신이 우울증으로 진단내린 환자(권력자·자본가)와 죄의식 없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질환에 대한 담론은 질병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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