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묻는다…정신병원을 나가는 ‘일탈 행위’가 왜 ‘탈출’인가
언론에 묻는다…정신병원을 나가는 ‘일탈 행위’가 왜 ‘탈출’인가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01.07 19: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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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 나간 당사자, 경찰 수배령에 하룻만 검거
언론은 이를 ‘탈출’로 상황 묘사…‘수용소’ 시각으로 접근
사회방위적인 집단 시선이 정신장애인의 행위를 왜곡해

지난해 12월 30일, 언론들은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보기에 불편한 기사를 일제히 쏟아냈다.

내용은 이렇다. 부산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한 A씨(40대)는 12월 26일 병원 내 공중전화를 이용해 아내가 자신을 강제입원시켰다며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A씨는 같은 달 28일 자정에 병원 입원실 쇠창살 2개를 뜯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경찰은 부산 전역에 A씨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고 A씨의 동선을 추적해 서울에서 ‘검거’했다. A씨는 경찰 조사 후 다시 정신병원에 재입원당했다.

우선 묻고 싶은 건 이것이다. 정신병원은 감옥일까. 아니면 수용소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공간으로 해석되는 것일까. 만약 A씨가 감옥에 있었다면 그의 ‘탈출’은 분명히 공적 형법제도를 위반한 것이기에 ‘탈출’이 맞다. 만약 군대라면 어떨까. 군 생활에 적응을 못했거나, 고참의 괴롭힘, 혹은 개인적 사정으로 부대 밖으로 허가 없이 나갔다면 이는 ‘탈영’이 된다.

수용소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수용소라고 불리는 곳은 없다. 그렇지만 수용소가 있고 어떤 사람이 그곳을 당국 허가 없이 나갔다면 그것 역시 ‘탈출’이 된다.

기자는 가끔 멕시코나 브라질 등에서 감옥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켜 이들이 감옥 문을 부수고 집단 탈출했다는 뉴스를 접하곤 한다. 이들 죄수들은 법의 허용 없이, 형벌 제도에 반해 감옥 문을 넘어가 버린 것이므로 이들의 행위는 ‘탈출’이 맞다.

국어사전의 '탈출'의 정의는 ‘어떤 상황이나 구속 따위에서 빠져나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탈출이라는 행위는 ‘부정적인 상황’이나 ‘부조리한 제도’ 등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실제 행위로 이어졌을 때 탈출이라고 부른다.

초등학생이 수업을 빼먹고 학교를 벗어나는 행위를 탈출이라고 부르지 않고 강의를 듣지 않고 교정을 거니는 학생을 향해 탈출했다고 하지 않는다. 대학 기숙사에 사는 학생이 그날 밤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애인과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면 그를 ‘탈출’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가정불화로 집을 떠나버린 청소년에게 우리는 ‘가출’했다고 하지 ‘탈출’했다고 부르지 않는다. 일반 외과 병동에 입원한 사람이 잠시 병원을 비웠다고 해서 그가 병원을 불법적으로 ‘탈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병원을 나서는 순간, 그것도 의료진의 허가 없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정신장애인은 ‘탈출범’이 되어 버린다. 이 어감은 너무나 부정적이어서 정신장애인은 어떤 식으로든 범죄를 저지른 인간으로 바라보게 해 버린다.

확실히 정신병원은 사회방위적 측면에서 비이성적이고 위험한 존재인 정신장애인들이 선량한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고스란히 민낯으로 작동하는 곳이다. 이는 정신병원에 있다는 자체로 예비적 ‘범죄인’으로 낙인찍혀 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범죄자로서의 표상은 정신병원 내부에서도 작동한다. 정신장애인은 의료권력의 시선에 순종하지 않으면 격리실에 갇히고 침대에 손발이 묶인 채 며칠을 보내게 된다. 이 같은 전근대적인 치료 시스템이 아직도 작동한다는 건 정신병원이 치료보다는 규율과 응징의 상징으로 오랜 기간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이때 정신장애인은 의료권력이 지배하는 병원 내에서 순응하고 조용히 있어야 하며 이때의 순응은 어떤 부당함이 있어도 정신병원 내부에 머물러야 한다는 권력의 무언(無言)에 따르는 것 외에 저항적 태도를 보일 수 없다. 저항할 경우 권력은 그를 ‘묶어버린다’.

병원 내 정신장애인은 내부 권력에 감시당하고 병원을 벗어난 곳에 있는 경찰 등 외부권력에 갇혀 버린다. 달아날 곳이 없다는 말이다.

정신병원을 ‘탈출’하게 되면 경찰이 그 ‘탈주범’을 추적하게 되며 그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이해보다 ‘위험한 사회적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진술할 수 있는 자유를 거세해 버린다.

이렇게 본다면 정신병원은 원하지 않아도 ‘범죄자’가 되도록 훈육해 버린다. 훈육에 따르지 않고 권력에 저항할 경우 정신장애인의 권리는 모조리 부정당하고 병원은 정신장애인을 권력 감시망 안에 포섭하고 대외적으로 존재 의미 자체를 배제해 버린다.

따라서 정신병원은 병원의 기능과 동시에 수용소의 권한을 가진다. 자유는 세상으로 나갈 때까지 보류된다.

12월 30일 보도된 관련 기사들의 공통점은 모두 제목에 ‘정신병원 탈출’이라는 점을 내걸었다는 사실이다. 딱 한 군데 부산 지역신문인 국제신문이 ‘정신병원 입원 중 부인 살해 협박한 40대 경찰에 붙잡혀’라는 ‘탈출’이 빠진 제목을 썼을 뿐이다.

포털에 나온 관련 기사 17개에는 모두 제목에 ‘탈출’이라고 적고 있었다. 탈출은 분명히 부정적 상황에서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탈출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기존 공간은 부조리하고 부도덕해야 하며 부당한 권력이 활개치는 곳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신병원은 그 부당한 공간인가.

의료권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정신병원이 치료의 공간이지 부당한 권력이 횡포를 부리는 공간은 아니라고 말이다(이건 그들의 소망 사항이니 다음에 토론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언론은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를 향해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언론이 정신병원을 사회방위적이고 시민보호적인 수용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일반병원에서 내과 치료를 받는 이가 의료진 모르게 식당으로 가 밥과 소주를 시켜먹는다면 그를 붙잡으려고 경찰이 수배령을 내리고 동선을 추적해 검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물을 수도 있다. 정신병원을 걸어나간 것이 ‘탈출’이 아니라면 어떻게 기사를 작성해야 하냐고. 그것까지 내가 알려줄 필요는 없다. 나는 언론이 집단적으로 낙인찍는 정신병원과 정신장애인, 그리고 ‘탈출’의 어감이 주는 부정성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을 뿐이다. 어떻게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지,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는 언론 스스로가 성찰하면 될 문제다.

대신 ‘탈출’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정신장애인은 마음이 아파 입원한 이들이다. 이들의 일탈적 행위를 왜 ‘탈출’로 규정해야 하는가. 정신장애인이 어떤 사유가 있어 병원 바깥으로 나간 것을 마치 형법을 어긴 이처럼 왜곡하는 기사 작성은 정신장애인을 이중으로 왜곡해 버리는 결과를 만들 뿐이다.

더 황당한 건 저 정신병원의 폭력성이다. 어떻게 정신병원 병실의 창을 쇠창살로 막아두고 있는지, 아직도 저 전근대적 치료 시스템이 힘을 발휘하고 있고 아무런 반성 없이 폭력적 규제를 이어가고 있는지, 참담한 기분까지 든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 ‘탈출’ 사건을 보도한 언론들 중 연합뉴스와 MBC, 중앙일보는 삽화에 두 손이 수갑에 채우진 똑같은 그림을 내보냈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정체성의 정신장애인을 두려워하는지, 형벌적 시스템 안에서 정신장애를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자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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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탁 2020-01-07 22:56:48
모두들 아는 것이지만 강남역 사건과 안인득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의 추세와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국가 차원의 시스템을 갖추고, 일빈인에 대한 계몽(?)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