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류원용의 일기장] 앗, 내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다(5)
[당사자 류원용의 일기장] 앗, 내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다(5)
  • 류원용
  • 승인 2020.01.08 19:0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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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측은 약물 투약을 멈춘 후 3개월 동안, 내게 아무런 투약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퇴원할 때에도 아무런 약물 처방도 없이 나를 퇴원시켰다. 의료 권력이 생각하기에 나는 그만큼 천덕꾸러기였으며,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간호사나 의사 선생님에게 “선생님! 왜 저는 약도 안주고 퇴원도 안 시켜주시고 이렇게 보리 차대기 취급하시는지요?”라고 물어보면 모두가 얼굴만 빨개질 뿐 아무 말이라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1996년 3월 어느 날, 뜬금없이 주치의 선생님이 내게 오더니 “원용님. 원용님은 틀림없이 재발할 것입니다. 재발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재발했을 때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과 함께 아무런 약물 처방도 없이 나를 퇴원시켰다.

그때 나는 퇴원이라는 두 글자 말고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또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직 이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아, 드디어 내게 해방의 날이 왔다. 대한민국 만세다.’

나는 모든 것을 망각했다. 관계망상에 사로잡혀 내가 그렇게나 아연실색했던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당장 죽을 것 같던 두려움은 황당무계한 만화책 같은 이야기였으며, 환청, 환시, 환후는 잠시 스친 착각거리도 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늘도 열심히 남의 이야기들을 뉴스로 보내고 있었다.

정작 내 기억과 의식을 주도하고 있는 이야기는, 지난 가을에 있었다. 내가 굉장히 부끄럽고 낯 뜨겁게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횡설수설 이상한 짓을 한, 창피하고도 창피한 과거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외출을 할 때면 혹시나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생소한 곳만을 골라서 다녔다. 간혹 옛 추억에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라도 할라치면 모교 도서관은 피해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대학을 골라 구석진 자리에 앉아 추억을 더듬었다.

용돈이 부족하면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고, 친형들을 만나고 싶으면 서울 친형들의 자취방에도 찾아가고, 서울 구경을 하고 싶으면 목적지 없이 2호선 전철을 타고 앉아 서울 구경을 했다.

나는 저 헤르만 헤세의 크루우프처럼 불청객이자 이방인이 되어 정류장이나 종착지 없이 부유(浮游)하는 나그네로 떠돌았다.

서쪽으로 해가 지면 어느새 동쪽에서 해가 뜨듯이 꿈을 잃어버린 내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다시 9월. 즉, 대학에 복학할 시기가 왔다.

나는 꿈에서도 내가 다시 학교를 다닌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내게 학교는 부끄러움이었고, 좌절이었으며, 실낙원이었다. 그만큼 나의 본성은 소심했고, 수줍음 많았으며, 우유부단했다.

아버지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원용아. 복학할 시기가 됐는데, 아버지 생각에는 네가 복학해서 다시 학교를 다녔으면 좋겠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버지. 저 도저히 부끄러워서 학교에 복학 못합니다. 그냥 노가다(막노동)나 뛰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도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네 뜻대로 해라. 네가 노가다를 뛰겠다면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냐?”

나는 아버지의 진심을 모르고 이렇게 말했다. “도와주실 것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근로자 대기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누나에게 나를 좀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용아. 너 노가다 뛰기로 했다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누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너 근디 잉~ 노가다 뛰면서 사는 인생보다 대학을 나와서 넥타이 메고 사는 인생이 낫지 않겠냐?”

마지막으로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한 번 생각해 볼게.”

또 시계는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듯 했던 누나의 말이 생각할수록 그럴 듯해 보였다.

며칠 후 내 마음은 완전히 기울었다. ‘까짓것 뭐 일 년 전 이야기로 내가 그렇게 위축될 필요 어디 있어? 이제 생각하니 인생에서 이런 실수 저런 실수 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래! 나에게는 대학이라는 대안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지난 일 년여를 나를 사로잡던 부끄러움의 거울이 치워졌다.

아~ 지난 3월. 5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조현병 환자를 왜 아무런 투약 처방도 없이 퇴원시켰단 말인가? 그 무책임함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한 번 조현병이 발병하면 비록 소량이라도 평생 약을 먹으면서 증세 관리를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은가 말이다. 왜 그는 무책임하게 조현병 환자를 아무런 투약 처방 없이 그냥 퇴원시켜 다시 재발하게 했단 말인가?

나는 그때는 몰랐다. 갑작스런 기분의 상승이 내가 앓고 있는 조현병의 패턴에 엄청난 독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또 몰랐다. 1995년 집 앞 임XX신경정신과에 강제입원 됐던 상처. 국립 나주병원에서 멀쩡한 내가 죽을 고생을 해야만 했던 상처. 그 상처들이 나의 잠재의식에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됐고, 이 트라우마를 잘못 건들면 나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시한폭탄이 되어 태초의 빅뱅 같은 에너지로 폭발한다는 것을 말이다.

학교에 복학하기로 확실하게 선택한 나는 급격히 기분이 상승했고, 이 상승 에너지는 곧바로 ‘왜 나는 나의 꿈과 야망을 짓밟혀야 했는가? 이는 어떤 놈 책임인가?’에 집중된 것이다.

지난 8개월 동안 투약을 하지 않고도 아무런 이상 증세가 없던 나는 단 며칠만에 당장 입원해야 할 조현병 환자로 바뀌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기분의 상승과 분노가 조현병 재발의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급격히 끓어오른 내 화산 폭발의 표적지 과녁은 바로 자신만의 이윤극대화를 노리고, 즉 남의 돈 교활하게 뺏어먹는데 혈안이 되어, 교묘하게 진화 발전한 트루먼쇼로 무장한 연극배우 임XX신경정신과 원장이 되었다.

나는 새벽 0시가 넘긴 시간에 임XX신경정신과를 찾아가 도로 건너편에서 혼자 짝다리로 서서 동네가 떠나가도록 원장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야. 이 임XX이 호로XX야! 너 이리 나와!” “니가 그러고도 의사냐 이 개 떡칠노무 XX야!” “니 까징 것이 머신디 내 인생을 파토내냐? 이 상렬의 베라질 씨불노무 XX야!” “너!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디?” “나 너한테 강제입원 당하고서 꿈과 희망이 망가지고 정신질환자 되어 내 인생 파토났다” “너 어찌 책임질 거시여? 이 호로XX야!” “니가 전남대학교 의대 나왔으니까 다른 사람은 니 발가락의 때만도 못하게 보이디? 이 거지 XX야!”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이 날벼락 맞아 뒈질 놈의 XX야!”

참고로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 전국 대학생 연극제에 출전해 금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연극 동아리에서 한 학기 동안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어떤 선배님은 나더러 기차화통이라고 웃는 소리 할 정도로 내 목소리는 우렁차다.

나의 고함소리는 온 동네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주무시다가 깜짝 놀란 아버지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오셨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 앞에서, 대놓고 담배를 꼬나물고 불을 붙이고는, 맛있게 피우면서, 계속해서 직성이 풀릴 때까지 악을 써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버지는 나를 국립XX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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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우유 2020-05-26 19:42:42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네요..ㅠㅠ

권진영 2020-01-11 18:29:30
ㅠㅡ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