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서은 “영국 대학은 폭설로 학교 폐쇄해도 정신건강 센터만은 문 열어”
전서은 “영국 대학은 폭설로 학교 폐쇄해도 정신건강 센터만은 문 열어”
  • 전서은
  • 승인 2020.04.22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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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헬스코리아 피어스페셜리스트 전서은 씨가 경험한 영국의 정신건강 서비스
한국에서 만성 우울증...영국 유학 중 극심해져
영국 대학교의 공격적 정신건강 서비스 경험
마음의 아픔도 육체적 아픔과 동일하게 취급
SNS에 올린 글 보고 기숙사로 찾아오기도
“나는 괜찮다”는 말에 학교는 “너는 안 괜찮다”
논문 제출 연장사유에 ‘우울증’...바로 ‘승인’
영국은 지역사회 공조체제로 정신 위기 극복에 협조
한국 코로나19 모범적 대응 모델 정신건강 생태계에 적용해야

2018년 12월 1일 ‘영국의 정신건강서비스 한 장 요약’이라는 캡션(사진 설명)과 함께 페이스북에 제가 올린 이미지입니다.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제 자신에게 영국의 정신건강 서비스가 총을 겨누며 “자살하면 죽여 버리겠어!”라고 외칩니다.

극단적 선택을 몇 번이고 고민하던 위기가 있었지만 1년이 지나 해학적인 밈(Meme·인터넷 이미지나 짧은 글)과 함께 담담하게 묘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저의 우울은 고등학생이던 2008년에 이미 징후를 보였고, 2017년 여름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진단을 받기 전후로 심리상담, 집단 상담, 약 복용, 모바일 앱 상담까지 다양한 처방을 시도해 보았지만 마음의 병은 쉽게 낫지 않았습니다.

트라우마를 계속 유발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에 전념하면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 2018년 8월 영국 유학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를 간다고 해서 우울증은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영국에서 보낸 2019년 여름에는 하루에 수십 차례 자해와 자살 생각을 하는 등 인생에서 가장 극심한 우울 증세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사히 석사 졸업 후, 한국에 돌아온 지금은 좋은 직장도 다니고 정신건강 피어스페셜리스트(Peer Specialist)라는 목표를 추구하며 유튜버나 브런치 작가를 꿈꾸기도 하는 건강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과거 통렬한 마음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제가 속해 있었던 영국 대학교 정신건강 서비스의 공격적인 원조가 있었습니다.

영국 정신건강서비스와의 인연

저는 영국 런던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바스대학교(University of Bath) 경영대학에서 1년 석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영어를 잘 하고 외국 생활도 좋아해서 첫 몇 달은 학교 수업 참여도 과제도 성실히 하면서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 온 지 반 년 만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정신건강에 다시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상처, 누적되는 영국 내 취업 실패 등이 원인이었지요. 그러나 성적이라든지 취업 성공과 같은 성취에 사로잡혀 정신건강을 개선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상태가 위험하다고 인지한 건 제 자신이 아닌 학교 친구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나약해진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스무 번, 서른 번을 참다 결국 참을 수 없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감정을 폭로하는 글을 몇 건 올렸습니다. 주로 독일, 영국, 프랑스 같은 EU(유럽연합)권 친구들이었는데, 이 친구들이 글을 읽고부터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제 감정이 격렬해지기 전 초반 글에는 “차 한 잔 하면서 얘기하지 않을래?” 같이 온건한 형태의 개입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가깝게 지내던 것도 아닌 친구들 몇몇이 나중엔 매우 진지하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힘들었겠다”라든지 “힘내” 같은 말이 아니라 “학교에 이러이러한 정신건강 서비스가 있다. 지금 당장 신청해서 서비스를 받아야 할 것 같다”였습니다.

영국 대학교의 정신건강 소비자로 강제 편입(?)된 것도 주변 친구들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2018년 겨울, 모종의 트리거(trigger·계기)로 인해 한국에서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칼날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고 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다음 날 학생경험관리사(Student Experience Officer, 한국 대학원에는 이런 직함 자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저를 호출했습니다. 이후 제 친한 친구의 고발에 따르면 같은 과 학생 두 명이 제 페이스북 게시글 내용을 선생님께 신고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학교 심리상담센터에 찾아가 상담을 예약하는 걸 지켜보고 나서야 저를 풀어 주셨습니다.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는 저에게 선생님은 “너는 안 괜찮다”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의 정신건강 서비스와는 무엇이 달랐는가

한국에서 마음의 아픔을 겪던 과거 몇 년간 저는 가족, 친구들 또는 SNS상 불특정 다수에 아프다는 고백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이때 돌아오는 반응은 다음과 같이 매우 양극단이었습니다.

  1.  “나도 사실 우울해. 우리 모두 다 우울해.”
  2.  “너는 우울할 이유가 없는데 이해가 가지 않아.”

전자는 우울을 별 것 아닌 감정, 지나가는 감정의 하나로 과소평가합니다. 후자는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계속되는 실패가 있어야 우울이라는 심각한 질병이 발병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좋은 대학에 잘 나가는 사람인 제가 감정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가,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하며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그러셨고,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들께서 그러셨고, 저의 가까운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랬습니다.

영국에서 내가 우울하다고 고백을 하면 다릅니다.

첫째,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요즘은 우울, 불안, 스트레스 등 정신질환이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 증가 등이 예전보다 자주 기사화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라, 사람들이 예전처럼 우울증이라는 병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변에 누군가가 “나 우울하다”는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나랑 같이 멀쩡히 학교생활하고 직장 생활하던 사람이 자해를 하거나 자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시도하는 등 뉴스에 나올 법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짜배기) 우울증 환자일 거라고 믿지 않는 것이죠. 근데 영국에서는 그럴 거라고 (또는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우울하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상생활에서 “리타이어(떠나 있기)”가 가능합니다. 국내 대학원 MBA에서 우울증을 이유로 질병 휴학 신청을 했을 때 돌아왔던 (행정적) 답변은 “국내 종합병원의 진단서가 있어야 인정해 줄 수 있다”였습니다.

영국에서 대학원 막바지, 우울 증세가 극에 달해 한 달 간 아무 생산 활동을 할 수 없자 주변의 권유에 의해 논문 제출일 연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청 서류 사유란에 “우울증”이라고 적은 게 다였고, 그 어떠한 서류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 날 “승인 완료” 메일이 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마음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과 동일하게 취급받았고 학교와 사회에서 기대되는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권리를 당연한 듯이 부여받았습니다.

영국에는 편견이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유럽권 국가로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나라니까 우울한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어서 그런 거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만든 “정밍아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병에 대해 “커밍아웃”한다는 뜻입니다.

영국에서 처음 정밍아웃을 할 때만 해도 한국과 같이 부정적 낙인이 찍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울증이 있다는 게 알려진 후 과 친구들은 저를 어려워하거나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가깝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관심 구걸 그만하라’는 심한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영국도 한국처럼 튀어나온 못은 매를 맞습니다. 직장 내 정신장애에 대한 낙인이 존재하고1)2)언론에서는 정신질환자를 위험한 사람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정신질환자를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기사는 그 비중이 낮아지고 있지만 2017년 기준 여전히 24% 가량을 차지했습니다.3) 영국 의회에서도 공식 웹사이트에 ‘정신건강 낙인(mental health stigma)’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으며 2014년부터 정신건강에 대한 차별을 뿌리 뽑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각종 공약을 공표하며 관련 캠페인 및 법안 제정 등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영국에서도 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호소하는 순간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굳이 없는 문제를 있다고 꾸며내거나 과장할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적을 겁니다. 현재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진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곁에도 안 오려 하고, 격리된 상태로 불편을 감수하며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만에 하나 질병이 악화돼 일상을 아주 잃게 되는 건 더 최악입니다. 그러니 증세가 있으면 숨기지 않는 거죠. 마찬가지 논리로, 아픔을 호소한다면 그건 정말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편견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회가 우울증을 적극적으로 물리치려는 이유

코로나19가 영국을 덮쳤을 때 영국 정부의 초기 대처 방침을 기억하시나요? 바이러스에 천천히 전 인구가 노출돼 자가 면역이 생기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4)

의료 선진국 한국에 계신 여러분이 보기엔 경악할 내용일지 몰라도, 영국은 정말 병 걸리면 자연 치유가 보통인 나라입니다. 심한 감기에 걸려 학교 내 의료센터를 겨우 찾아갔더니 일주일 정도 지나면 낫는다고 얘기하고 돌려보냅니다. 체온 측정도, 약 처방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울 증세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훨씬 적극적인 처방을 합니다.

대학이 폭설로 폐쇄가 되어 모든 시설이 문을 닫아도 도서관 그리고 정신건강 서비스센터는 문을 엽니다. 저의 정신건강에 대해 우려하는 제보가 과사(과사무실)에 들어가면, 30분도 안 되어 학생경험관리책임자가 기숙사 앞까지 찾아옵니다. 환자의 치료 의사가 생기기도 전인데 ‘찾아가는 서비스’인 셈입니다.

우울증을 병으로 인정한다는 점은 그렇다 치고, 왜 신체건강보다도 정신건강 회복에 이렇게 더 적극적인 걸까요?

감기는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면역 체계가 물리치면 낫게 되지만, 우울증은 원인이 딱 하나로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쉽게 치료되지 않습니다. 자연 회복 가능성이 훨씬 낮습니다.

국가·경제적 손실도 어마어마합니다. 영국 고용연금부의 정신건강과 고용주들에 대한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직원들의 정신건강 문제는 기업에 매년 약 5~6조 원, 나라 전체에는 약 11조에서 15조 원의 손실을 초래합니다.5)

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은 악화되고 나면 회복과 치료에 훨씬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조기 개입을 통해 정신병원 입원 등 비싼 치료비용이 절감돼 연간 약 577억 원을 절감할 수 있다는 영국의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6) 이 때문에 영국 정신건강 서비스도 조기에 정신질환을 발견하고 개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7)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편견 때문에 환자들은 대놓고 나 우울하다고 치료를 청하지 못합니다. 또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가 ‘내가 우울하다는 사실을 밝히면 남들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죄책감입니다.

수많은 이유로 정신질환을 지닌 사람들이 아픔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치료받기를 거부합니다. 외부에서 보기엔 더 심해지기 전에 대처해야 하는데 말이죠.

이 때문에 영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서는 정신질환 환자의 강제입원에 대한 법제적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1983년에 제정된 영국 정신보건법(Mental Health Act)은 검증된 정신건강 전문가(Approved mental health professional, AMHP)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환자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라도 정신건강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강제입원(Section)’을 보호자의 동의 없이도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8)

환자의 정신 상태를 외부인이 파악하고 자해, 자살, 외부에 해를 가하거나 외부로부터 해를 입을 가능성 등 ‘위험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본 제도의 필요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만 인권 침해라는 중요한 문제가 불거집니다. 이 이유로 국내에서는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환자가 정작 필요한 치료를 못 받게 되는 일들이 왕왕 벌어지고 있습니다.9)

이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요? 영국은 한국과 무엇이 달라서 우울증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지역사회 기반 지원체계라는 사회적 인프라가 숨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병원 치료 중심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촘촘히 조직된 네트워크를 활용한 빠른 개입과 일차 진료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합니다.10)

지역사회 지원팀이 환자를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죠. 다시 말해 소비자 입장에선 정신건강서비스를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일반인 공급자 입장에서는 봉사활동, 소셜 클럽 등으로 수많은 정신건강 지지활동에 쉽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전문성을 가지고도 누구나 정신위기에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인구 8만8859(2011년 기준)명의 영국 소도시에서도 규모는 작지만 단단한 지역사회의 공조 체제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학교 심리상담은 예약 없이 아무 때나 찾아갈 수 있는 ‘드롭인(drop-in)’ 방식입니다. 시험 기간이나 요즘 같은 장기 도시 봉쇄 등 우울함을 유발할 만한 외부 환경이 발생하면 각종 대면·비대면 정신건강 서비스가 학생들에게 제안됩니다.

명상이나 스포츠 등 육체 활동, 지지 그룹, 비영리 조직, 핫라인 등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활동이 다양하고 널리 홍보되어 있기에 자신이나 타인이 우울함을 느낄 때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학생 정신건강 서비스 페이지에는 자신은 물론 타인이 우울함을 느낄 때의 원칙 가이드라인까지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친구의 상태가 걱정이 될 정도라면, 전문가에게 이를 익명(匿名)으로 얘기하라는 점까지도 명시가 돼 있죠.11)

돌이켜보면 극심한 우울을 겪을 때의 저는 극단적 선택에 대한 위험도 높았고, 무기력함과 패배감에 생산적인 활동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담은 받을 대로 받아보았고 정상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어떤 치료도 거부했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울증은 쉽게 낫지 않습니다. 일단은 질병을 지닌 상태로라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게 중요합니다. 국내 정신건강 비영리기구 멘탈헬스코리아의 장은하 부대표님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우울”이라는 표현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벗으로 삼을 정도로 정신의 일부가 되어 버린 데 우울에 적응해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표현입니다.

제 상태와 치료에 대한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고 보수적 판단을 내린 학교 서비스 내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있었기에 저는 회복을 시작할 수 있었고 조금씩 일상을 찾게 되었습니다.

영국 정신건강 서비스 패러다임이 국내 서비스에 도입된다면

요새 코로나19 사태에서 한국의 대응시스템은 세계적으로도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에 걸릴 수 있지만 적합한 치료를 제때 받을 수 있고 꾸준한 트래킹을 통해 자신에게도 주변에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안전하다는,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뒷받침되기에 감염되었다는 걸 숨길 필요가 없는 거죠.

한국에서 저에게 “우울은 지나가는 감정이야,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라고 말하던 분들은 저를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믿고, 응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매 순간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울한 감정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어차피 내가 우울하다고 말해도 제대로 된 처방을 기대할 수 없기에 나는 괜찮다는 암시를 계속 하게 됩니다. 그러면 저의 경우처럼, 가벼운 재활 프로그램으로도 좋아질 수 있는 가벼운 우울증이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스마트한 대응 시스템이 정신건강 생태계에도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제라도 마음의 아픔이 찾아올 수 있지만 제때 필요한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겁니다.

아프더라도 회복이 이루어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 이것만 있더라도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함을 우울함이라 부르지 못하고 속으로 곪아가는 일이 많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저희가 한 수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감기 걸렸다고 찾아온 환자보다 우울하다고 찾아온 환자가 더 위중하게 여겨지고, 적극적인 관리와 회복의 타겟이 되는 나라로부터요.

 

이 글을 기고한 전서은 씨는 국내 정신건강 소비자 권익향상을 위한 비영리기구 멘탈헬스코리아 대외협력이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한국생산성본부 사회가치혁신센터 컨설턴트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학교에서 벤처경영을 전공하고 2017년 KAIST 사회적 기업가 MBA에 입학했으며 올해 영국 바스 대학교에서 지속가능경영 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 이사는 오랜 기간 경험했던 우울증과 자해, 자살 충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튜브 및 SNS를 통해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지속가능 및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소셜 인플루언서이자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이다.

<각주>

1) “직장인 정신건강: 영국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 동일시하는 법안 만들어라’,” BBC News 코리아, 2018.11.26., https://www.bbc.com/korean/news-46258850

2)“영국, 정신건강 문제로 한해 30만명 일자리 잃어,” 매일경제, 2017.10.26.,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7/10/709792/

3)Matt Bowen & Andy Lovell, Stigma: the representation of mental health in UK newspaper Twitter feeds, Journal of Mental Health, 2019.

4)“영국 브리핑2: 비교 체험 극과 극 - 코로나에 대처하는 자세,” 딴지일보, 2020.03.23., http://www.ddanzi.com/ddanziNews/608759736

5)“영국, 정신건강 문제로 한해 30만명 일자리 잃어,” 매일경제, 2017.10.26.,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7/10/709792/

6)The Cost of Mental Ill Health, The National Mental Health Development Unit, 2010.

7)“영국·미국·호주의 지역사회 기반 정신건강 서비스 정책 현황과 향후 과제는,” 메디게이트뉴스, 2019.08.14., http://medigatenews.com/news/2529931234

8)“영국 정신보건법에 의한 응급상황의 대처방법,” 정신의학신문, 2019.07.02., 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5937

9)ibid

10)“영국·미국·호주의 지역사회 기반 정신건강 서비스 정책 현황과 향후 과제는,” 메디게이트뉴스, 2019.08.14., http://medigatenews.com/news/2529931234

11)Getting support if you or someone else is feeling lonely or isolated, Universtiy of Bath, https://www.bath.ac.uk/guides/getting-support-if-you-or-someone-else-is-feeling-lonely-or-iso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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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경 2020-05-04 13:08:36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영국에는 '외로움을 담당하는 장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선했어요.

우울증이감기보다 자연회복력이 낮다고 판단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구예랑 2020-04-23 10:05:19
글 너무 잘 읽었고,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 입니다. 현 한국의 정신건강 생태계는 개조가 시급합니다. 한국의 심리학과 학생으로서, 임상 심리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동하는 사람을 인터넷으로 만나게 되어 너무 기쁘네요 :) 언젠가 한 번은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응원할게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한국 정신질환 인식 개선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