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언어로 덧칠된 거울을 헝겊으로 닦으니...비로소 드러나는 그대의 '고운 얼굴'이여
부정적 언어로 덧칠된 거울을 헝겊으로 닦으니...비로소 드러나는 그대의 '고운 얼굴'이여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3.06.29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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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정신건강통합센터, 제2회 정신건강문화예술 공모전 시상식 성료
김재남 현대미술학 교수 “작품으로 치유되는 건 예술의 사회적 기능”
“여행을 떠나듯이 자주 미술 전시관을 가고 느끼라”
제2회 정신건강문화예술 작품 공모전 수상자들. (c)마인드포스트.
제2회 정신건강문화예술 작품 공모전 수상자들. (c)마인드포스트.

29일 서울 중구 시청 시민청갤러리 내부에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그리고 입선 이상의 수상을 한 이들의 작품이 넓게 전시돼 있었다.

서울시정신건강통합센터가 주최한 제2회 정신건강문화예술 작품 공모전 수상작 시상식 자리였다. 제1회 공모전에서는 모두 다섯 작품이 수상을 했다. 올해는 수상 범주를 넓혀 입선, 장려상, 우수상, 최우수상, 대상 등 모두 43점이 선정됐다. 참가자들의 예술 형식을 좀 더 품어안으려는 주최 측의 의지가 엿보였다.

올해 대상은 정유연 씨의 ‘도움을 요청해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선정됐다. 유연 씨는 2개의 캔버스를 위아래로 붙인 듯 위쪽에는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해’, ‘내가 잘못된 걸까’ 등 부정적 의미의 사유들을 두툼한 선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아래 캔버스에는 그 부정적 언어의 분포들을 마른 헝겊으로 닦아내고 있다. 그러자 그 가운데로 당사자 유연 씨의 얼굴이 드러난다. 뽀얗게 드러나는 주인공의 얼굴. 거울 안에 녹슨 패배감과 열등감, 모멸감, 자기 학대의 언어들이 난무한다. 주인공은 이를 자신의 얼굴로 안다. 그런데 그 먼지가 켜켜이 쌓인 거울을 닦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자신의 얼굴.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는 지하의 동굴에 죄수들이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머리를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환한 장작불이 타오르고 죄수들은 그 불빛에 의해 드러나는 벽의 그림자를 자신의 이데아로 생각한다.

그런데 죄수 한 명이 그 폭력적 장치에서 어떤 우연에 의해 풀리게 된다. 그는 동굴을 벗어나 바깥 세상을 보고 돌아온다. 그 세상은 진리의 세계다. 그는 자신의 동료 죄수들에게 진리를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쇠사슬을 풀고 지상으로 나갈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차라리 그림자를 실제 세계로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고 만다.

대상 작품. 정유연 씨. (c)마인드포스트.
대상 작품. 정유연 씨. (c)마인드포스트.

만약 이 죄수가 바깥 세계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탈출을 권유한다며 그는 다른 죄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렇다. 진리의 선포자는 ‘진리’를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계급 세계의 가난한 자들이 진리를 이야기하면 권력은 그들을 탄압한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프레임 안에서만 세상을 해석하고 바라보도록 강제한다.

정신장애인도 그렇다. 사회의 계급적 약자의 최하위에 위치한 정신장애인은 자신들이 겪는 체험과 기억들을 세계에 알리지만 아무도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미친 사람이다. 이성이 없는,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된 정신질환자, 즉 매드(Mad)의 한 인간이다. 따라서 정신장애인의 집단 기억들이 우리 세계의 풍경을 더 환하게 밝힐 수 있고 인식의 지평을 더 멀리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세계는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왜? 미쳤기 때문에.

정신장애인의 삶은 계급적 하위 범주에 있으면서 개별적으로는 극심한 환청과 정신적 어려움에 놓여 있는 존재들이다. 이 세계가 이야기를 건네는 정신장애인의 서사를 주목하지 않을 때 당사자는 소외와 고립을 느끼고 극단적으로는 자신을 죽음의 강으로 떠나보낸다.

유연 씨의 그림이 그렇다. 자신을 향한 극단의 부정적 언어들을 마른 수건으로 지웠을 때 드러나는 얼굴. 자신이 응당 오랜 시간 대면해야 했을 그 얼굴을 긴 시간을 보낸 후에야 아주 우연히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동굴 속 죄수가 ‘우연히’ 목의 쇠사슬이 풀려난 것처럼.

유연 씨는 그 깨달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는 그래서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지켜낼 수 있도록”이라는 소망을 담은 글을 남긴다.

사실 예술은 어렵다. 기자는 예술을 뭐라고 생각하냐 물으면 대답할 게 궁하다. 노동자계급의 예술을 최고의 미로 바라보던 지난 시절의 그 터널에서 벗어나 이제야 기자는 미술과 예술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김재남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교수. (c)마인드포스트.
김재남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교수. (c)마인드포스트.

시상식이 끝난 후 김재남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교수가 ‘미술로 보는 정신건강 이야기’를 특강했다.

그는 “우리가 작품을 제작한다는 게 작업실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며 “여러분이 보고 느낀 것들을 수집하고 그려내고 소리를 만들어내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전시장 가서 보는 게 예술품이라고 알고 있지만 여행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여행지의 어떤 장소들하고 그 느낌은 같다”며 “여행지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예술활동이다. 그래서 전시장을 많이 찾아가라”고 요청했다.

특히 그는 현대미술의 난해함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아티스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면 어려운 게 절대 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라며 “내가 라면 먹고 싶은 것처럼 그림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낙서처럼 내 언어를 구사한다고 생각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예술가의 한 전형으로 일본 출신의 여성 미술가 야요이 쿠사마(94)를 언급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쿠사마 씨는 동양이라는 주변부 인종, 여성이라는 이유로 초반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 그는 평생 동안 강박, 신경증, 불안증세를 겪었다. 그리고 46세 때인 1977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이후 퇴원 후에도 입원했던 병원 근처에 작업실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990년대 들면서 세계는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게 됐다.

김 교수는 “쿠사마가 그림을 진짜 못 그렸다. 뉴욕에서 활동을 하면서 강박과 정신적 어려움까지 겪었다”라며 “나는 못 그린 그림이냐, 잘 그린 그림이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내 이야기를 그림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구조들이 있다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라며 “쿠사마는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한국 작가들 몇 명을 소환했다, 그중 최선 씨는 긴 시간 우울증을 겪었다. 그 시간들이 온전히 지난 후, 그는 주변의 많은 사물들과 소통했고 그를 통해 치유의 시간들을 건너게 된다. 특히 최선 작가는 김칫국물로 직사각형의 이미지를 그렸다.

김 교수는 “김칫국물을 포함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분이 작품을 보고 치유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즐거움을 가진다는 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며 “그래서 고수들은 여행보다 미술관에 많이 온다. 여러분도 보러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세기 추상화가 파울 클레의 명제를 소개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보이게 한다.”

김 교수는 “못 그리고 선만 그려놓은 것들마저도 여러분의 언어다. 귀하게 생각하라”라며 “무엇을 표현하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귀한 메시지나 이야기들이 된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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