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연의 리뷰] 미친 자아의 목소리
[손성연의 리뷰] 미친 자아의 목소리
  • 손성연
  • 승인 2023.07.1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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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 아부일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송승연 유기훈 옮김, 오월의 봄, 2023 리뷰

*미친존재란 호칭은 ‘미쳤다’는 것은 삶이며, 그 삶에 대해 탐구하는 존재란 뜻입니다.

모하메드 아부일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송승연 유기훈 옮김, 오월의 봄, 2023.
모하메드 아부일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송승연 유기훈 옮김, 오월의 봄, 2023.

매드 프라이드는 우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광인인 우리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될 권리(rights to be ourselves)를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매드 프라이드 해밀턴[1]

누가 ‘미친존재’인가?

미친존재는 전문가 집단에 의해 선별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은 미쳤다는 것을 ‘정의’, ‘분류’, ‘선별’, ‘통제’했다.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미친 것의 원인으로 정의하면서 세라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 신경전달물질은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진단명과 진단기준으로 분류하는 과정에서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로 구분되어졌다. 누군가는 정신질환자라고 하고 누군가는 정신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게 익숙해졌다. 선별된 존재들은 약물 중심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증상을 스스로 통제하도록 요구받는다. 정신‘건강’의학의 치료 과정에 대해 ‘의심’하거나 ‘저항’하는 존재는 폐쇄병동에 격리, 감금되어 치료에 순응하도록 엄격히 통제된다.

이 모든 게 익숙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조금씩 미친존재를 위협적인 존재로, 비합리적인 존재로,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 말 그대로 ‘대화’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정신‘건강’의학은 위와 같은 ‘보편적 인식’에 기반 해서 사회적 요구를 대리해서 ‘일’을 한다. 이 책의 서사는 ‘되찾는다.’로부터 시작된다.

미친존재는 미쳤다는 것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서 발견해 나가는 모험을 한다. 이 모험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미쳤다는 것이 정체성이 될 수 없다는 ‘의심’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친존재는 더 이상 선별되는 존재가 아니다. 미친존재는 미친 채로 잘 살아가는 존재이며, ‘미쳤다’를 자기 정의하는 존재이다.

통증 없는 고통에서 깨어나다

“나는 미쳤다.”

이렇게 담백한 자기소개가 있을까. 나 자신을 미쳤다고 호칭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의료적 모델을 통증 없는 고통이라 표현하고 싶다. ADHD와 불안장애란 진단명을 부여받는 순간부터 나는 통증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분명 나는 치료되고 있는 중인데, 나는 성장하고 있는데 왜 고통스러운 걸까. 약물을 복용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아 맞아, 나는 고쳐져야 돼.”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나는 고쳐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을 복용하고 갖은 노력을 해봐도 여전히 나는 미쳤기 때문이다.

미쳤다는 것과 나는 분리될 수가 없다. 나와 미쳤다는 겹쳐져 있으며, 그 경계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다. “나는 미쳤다.” “그래, 나는 살아있다.”는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을 죽이고 있었다. 치료는 나 자신을 죽여야만 끝이 난다. 나는 통증 없는 고통에서 깨어났다.

이 책의 제목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에서부터 출발한다.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나를 죽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미쳤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비인정되는 기준과 가치체계를 회피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마주하며 수정하고 재해석하고 인정의 범주를 확장한다. 이 책의 저자는 미친존재가 현실과 갈등하는 과정 자체를 책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갈등의 과정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면서 정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고,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재구성하고 있다.[2] 미친존재의 책임은 치료가 아니다. 미친존재의 책임은 미쳐있음을 마음껏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다.

미친존재는 대화에서 고립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미쳤다’는 것과 마주 보고 대화하면서 나는 달라졌다. 나의 시간과 사회적 시간의 시차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나의 ‘시차’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있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그곳에 없다. 나는 거기 없는데 사람들은 내가 아직도 그곳에 있다고 착각한다.

나는 그저 다른 삶의 방식을 찾고 싶었다. 이전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삶의 방식을 찾기는커녕 나의 고통을 설득할 객관적인 단어를 찾느라 쩔쩔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서 원인을 성실히 찾아주고 고통을 해결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화에서 고립되었다.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고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결국 설득하는 언어가 아니라 나의 존재 언어를 찾는 것이다. 나의 존재 언어 자체가 삶의 방식이다.

번역 이론가 로렌스 베누티는 좋은 번역이란 ‘스스로 번역된 것임을 보여주는 번역’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저자에게 충실한 어쩌면 독자에게는 너무나도 생경한 문장들을 선택하는 것이 ‘번역의 윤리’라는 것이다.[3] 미친존재의 말을 들을 때 비합리적이고 분열되어 있고 모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쳤다는 것의 모양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미친존재의 말에서 ‘상식적인’ 논리로 사실 여부를 판단하려 할 때, 진실이 가려진다. 진실을 듣는다는 것은 미친존재를 신뢰할 때 나타난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미쳤기 때문이 아니다. 나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미쳤다는 것은 욕이지만, 나에겐 삶이다.

미친 자아의 목소리

미친 자아는 ‘망가졌다’, ‘훼손됐다’. ‘붕괴되었다’ 등의 언어로 해석된다. 미친 자아는 자아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정상적인 자아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경계가 뚜렷하고 의지적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삶을 전제로 한다.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이런 환상 자체가 미친 자아를 망가뜨리고 훼손시키고 붕괴시킨다.

미친 자아와 첫 만남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무섭다. 내가 미쳤다는데 나는 믿겨지지 않는다. 나의 현실과 사회적 현실이 불일치한다. 미쳤다는 것과 직면하는 것은 힘든 순간이다. 이 힘든 순간은 정체성 탐구가 아닌 급성기로 정의됐다. 급성기는 자•타해 위험이 있으며,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다. 병에 대한 인식이 생겨야지만,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병식이란, 미친존재 스스로 미친 자아를 억압하도록 유도하는 폭력적인 방법이다.

‘사회는 광기와 대화를 해야 된다.’[4]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나는 먼저 미친존재가 미친 자아와 대화해야 된다고 말하고 싶다. 미친 자아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친 자아의 목소리 형태는 다층적이며, 단일한 언어로 통일 될 수가 없다. 그 목소리는 모호하다. 심지어 목소리가 잘 안 들릴 때도 있고 듣고 싶지 않을 때도 있으며, 잘못 들을 때도 있다. 이것은 과정이다. 이것은 실수와 실패다. 이것은 목표 설정 자체가 불가능하다. 항상 미완성이다. 삶이라서 그렇다. 미친 자아가 모두 다르다. 미친 자아의 목소리도 다 다르다. 다른데, 혼자가 아니다. 정말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이 책은 혼자가 아니다.

 

필자 손성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야학 연극 선생님

미친존재감 프로젝트에서 미친존재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정자에서 학인들과 함께 연극 공부를 합니다.

 

미주

[1] 모하메드 아부일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송승연 유기훈 옮김, 오월의 봄, 2023, 73쪽

[2] ibid., p.88.

[3] 양근애, 「다른 몸들, 복수의 언어, 감각의 분별 맞,춤 기획 공연(2020)의 배리어 컨셔스」, 드라마터그 전영지의 글 재인용, 상허학보 63집, 2021, 67쪽.

[4] 모하메드 아부일레일 라셰드, op.cit.,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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