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이름이 삶이 된 사람, 배기영을 그리며
[삐삐언니의 책방] 이름이 삶이 된 사람, 배기영을 그리며
  • 이주현
  • 승인 2023.09.12 2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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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20)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
최규진 지음,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4살 때였다. 스멀스멀 찾아온 우울로 두 발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다니는 기분이 계속됐다. 4년 전 이미 한 차례의 깊은 우울증으로 휴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상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고, 또 한편으론 이를 악물고 견디려면 견딜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주말, 축 처진 채 누워 있다가 ‘사랑의 전화’를 떠올렸다.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친절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최규진,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1
최규진,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1

별 기대 없었는데 성심성의껏 소상하게 나의 상태를 물어봤다고 기억한다. 의사를 찾아가보라고 했지만 당시엔 이 병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몇달 동안 괴로워하다 흘려보냈다. 나중에야 그때의 우울은 몇년 뒤 발병할 조울병의 복선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랑의 전화’는 그렇게 나를 스쳐갔다. 정신과 의사이자 인권의학 실천가 배기영(1953~2015). 동료, 선후배,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배기영의 삶을 적은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를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가 마포에서 ‘동교신경정신과’를 개원하자마자 시작한 ‘봉사’가 사랑의 전화였다는 것을. 내가 그날 통화한 의사는 배기영이 아닐 수 있지만 그와 나는 ‘사랑의 전화’로 연결돼 있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평생 간호사 한 명 딸린 자그마한 의원을 운영했던” 평범한 의사를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지 깨닫게 됐다. 그는 전화기 너머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받는 영혼에 ‘긴급구호’를 한 것만이 아니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주축으로서 활동하며 병원에 가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매주 주말 상계진료소를 열었고, 1997년 구제금융기 이후 거리로 내몰린 노숙자들을 진료했다. 

노조활동을 이유로 왕따 등 온갖 괴롭힘을 당하며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청구성심병원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한국에서 처음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최초의 산업재해 인정을 이끌어냈다. 2003년 불법단체로 지목돼 수배중이던 한총련 대학생 200여명의 건강검진을 주도했고, 북한어린이살리기 의약품지원본부, 마포건강의료연대 탄생에 기여했고 정신건강보건법 제정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상이 사그러지지 않았던 시대, 운동의 시대. 배기영은 이 흐름 한가운데 있었지만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뼛속까지 기독교인이었다. 

이쯤되면 ‘명사’로 이름을 날릴 법한데, ‘더 큰 일’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 수도 있었을 텐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그저 ‘평범한 의사’였다. 이 책을 쓴 후배 최규진은 배기영이 행한 그 많은 일들을 밝히고 난 뒤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배기영은 결코 완벽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자료가 그나마 많이 남아 있는 얘기를 쓰다보니 업적들이 주로 언급됐을 뿐 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오로지 ‘평범함’에 있을지 모른다. 

사실 그의 행적들을 곰곰히 들여다보면 인간으로서 누구나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이고, 의사로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그는 그 상황과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았을 따름이며,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했고, 그들을 위해 반발짝 더 다가갔다.”

배기영이 살아있던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 문턱은 훨씬 낮아졌다. ‘마음챙김’은 개인이 수행해야 할 ‘루틴’이 되다시피했다. 하지만 정신질환 환자들에 대한 공격과 공포는 여전하고, 자살률은 더욱 늘어났다. 의대엔 온갖 인재들이 몰리는데, 반드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낮은 곳엔 턱없이 일손이 부족하다.

생전의 배기영을 실제로 만났다면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을지 모른다. 정말 평범해 보였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줄여 빠르게 말하면 ‘배경’이 된다는 농담을 즐겼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일이다.” 최규진은 안도현의 글귀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엔 그런 배경들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가진 아름다운 제 빛깔을 낼 수 있도록 따듯하면서도 그윽하게 존재하는 배경들. 사람들이 빛나는 별과 아름다운 꽃들만 바라볼 때에도 시기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있어준 배경들.”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한 일을 알아봐주지 않을 때, 내가 더 돋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열심히 해도 전혀 티 안 나는 일을 해야 할 때 ‘배기영’ 이름 석자를 빨리 불러봐야겠다. 배경. 배경. 배경…. 마치 주문처럼. 배경 같은 사람이 되길 소망하면서.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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