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연의 리뷰] 노동을 하며 노동해방을 외치는 미친식당을 경험하다
[송승연의 리뷰] 노동을 하며 노동해방을 외치는 미친식당을 경험하다
  • 송승연 기자
  • 승인 2024.01.01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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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미친식당' 리뷰
주최 및 주관: 미친존재감 프로젝트,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정신장애인이 살아가기 위해선, 이제는 다른 관점과 다른 방향이 필요하다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노동과 일’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가치의 실현’을 위해 삶의 대부분을 ‘일’과 함께 살아간다. 그렇다면 정신적 고난을 경험하는 정신장애인에게 ‘일’은 어떤 존재일까?

물론 정신장애인 또한 대다수 장애인들과 유사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되어 배제되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은 ‘정신장애인의 치료’라는 주목적을 위해, 일은 ‘재활’이라는 ‘부수적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장애인 전체 평균 취업률은 29.5%이지만 정신장애인의 경우는 5.3%에 불과하다. 장애인 전체 평균의 국민기초생활보장(생계급여) 수급 비율은 15.0%이지만 정신장애인의 경우는 평균 54.7%로 확인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모든 국민들이 위기상황에 처하더라도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도록 하는 긍정적 취지로 마련된 제도이다. 하지만 전체 중 절반이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것은 정신장애인의 경제적 빈곤상황이 월등하게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정신장애인과 일을 바라보는 주류적 관점은 ‘직업재활’과 같은 의료모델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삶’보다는 ‘재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소위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나아간다는 치료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관련 선행연구들을 살펴보면 일이 정신장애인의 ‘증상’을 개선하고, ‘재발 및 입원’ 가능성을 낮춘다고 보고하고 있다. 물론 일이 ‘임상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결과는 의미가 있다. 다만 이제는 임상적 측면에서의 효과는 부수적인 것이며, 경제사회적 배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요건으로서의 ‘일’이 중요한 효과로 가야 함을 말하고자 한다.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당사자가 경험하는 억압에 대해 스스로 외치고,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예술 활동을 접목해온 ‘미친존재감 프로젝트(대표 손성연)’는 지난 2021년 ‘우리는 미쳤다!’로 매드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졌으며, 2022년 극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로 탈시설/탈원화가 미친존재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탐색했다. 그리고 2023년 정신장애인과 일, 노동, 일터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미친식당’ 프로젝트로 돌아왔다. 미친식당은 함께 요리하고 함께 밥을 먹는 ‘일’을 꾸준히 반복한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역할을 찾아가고 할 수 있는 일, 하지 못하는 일(남겨진 일), 재미있는 일을 발견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필자는 2023년 11월 11일 미친식당 공연에 같이 관객으로 참석해, 배우들 스텝들 다른 관객들과 함께 피자를 만드는 노동의 과정을 같이 경험했다. 미친식당의 벽에는 다양한 의견과 목소리들이 쪽지로 붙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약 강요하지 마세요. 그 대신 약 먹는 것을 도와주세요! 활동지원 24시간 보장!”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이 한 문장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약 강요’ 즉 이는 손상을 제거하고 소위 비정상에서 정상 상태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의료모델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 문장을 통해 익명의 당사자는 이야기한다. 강제가 아니라 ‘사회적 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말이다.

정신적 고난을 경험하는 당사자가 살아가기 위해선, 이제는 다른 방향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참고할 수 있는 사례로는 호주의 개인예산제도인 NDIS(국가장애보험)이다. 물론 호주에서도 정신장애인은 오랫동안 ‘의료 영역’에 놓여 있었다. 실제 NDIS가 설계될 때 정신장애인은 고려되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가까스로 포함되었다(참고로 NDIS에서 정신장애인 심리사회적장애(Psychosocial disability)로 명명된다).

NDIS로 인해 정신장애인은 ‘일상활동 지원, 의사결정 지원, 사회활동 관련 이동 지원, 거주지 관리 지원, 관계 강화 지원, 고용 관련 지원, 교육 지원, 지역사회 참여 지원’ 등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국내 활동지원서비스는 여전히 신체적・감각적 손상을 지니고 있는 장애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정신장애인의 경우 치료서비스만 부각되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관련된 서비스는 많은 부분 부재되어 있다. 호주의 경우 정신장애인과 관련된 치료서비스는 보건체계인 메디케어(Medicare)에서 담당하고, 사회서비스를 NDIS를 통해 제공하는 구조를 구축했고, NDIS의 정신장애인을 위한 간접적 활동지원서비스는 새롭게 이러한 사회서비스를 구축해야 하는 한국에게 중요한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

정신장애인을 위한 활동지원과 더불어 ‘노동권 보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미친식당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지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힘들다. 그저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것도 무언가를 하는 상태인 것이니까. 어제는 처음으로 리더를 해봤다. 레시피를 안 보고 와서 이래도 되나 하고. 그렇지만 현재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웃...” (황지우, 미친식당 기록집 中)

같은 공간에서 경험을 공유하고, 목소리의 교류를 통해, 우리는 서서히 알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배려’가 아닌 ‘정당한 편의’가 되어야 함을 말이다.

사진=예준미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라는 폭풍 속에 처한 ‘정신장애인의 일할 권리’

미친식당은 다소 그럴듯한, 빤한 이야기만 늘어놓지 않는다. 이상과 이론을 넘어 현실로 들어가며, 그 안에서 불편하지만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정신장애인 노동권 보장’이 어떻게 변형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 고민들은 다음과 같은 언어들로 표현된다.

“하기 싫은 일은 해야 돼, 말아야 돼? 그런데 누군가는 싫은 일을 하잖아.”

“편히 있으라고 하지만, 사실 모두 편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불편한 사실”

“동료가 말했어요. ”미안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어떻게? 미안한 걸. 쓰러져서 일하지 못해서 존재 자체가 미안한 걸...”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정신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 손상)’은 비가시적이며, 다양한 현상과 형태로 당사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당사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자본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장벽이 발생할 수 있다. 나의 권리를 보장함으로 인해 누군가는 그 ‘일’을 대신 해야 하는 상황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당사자는 부득이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정신장애인의 정당한 편의제공이 다른 직장 동료에게 피해를 준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친식당은 이러한 논쟁적이고 첨예할 수 있는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두 사이 관계의 합의점을 모색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임을 미친식당은 직면한다.

두 번째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당사자의 일 할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어떤 당사자는 노동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경험하는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는 잘하고 싶다. 근데 못한다. 잘하고 싶다. 정말로. 솔직히 그렇다.”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이처럼 현재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상황 속에서 당사자가 처하게 된 현실적 어려움을 미친식당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다른 것을 배제하고 능력을 기반으로 경쟁하는 체제가 가장 공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능력이 좋은 사람이 더 많은 몫의 재화를 가져가는 데 합의가 된 것이며, 이는 개인의 능력에 따른 정당한 결과이므로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받아들여진다.

능력주의를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다면,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경험하는 차별과 좌절감은 정당화될 수 있다. 결국 이는 능력주의로 정당화되고 있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혼란스러워요? 원래 이래요. 정신없어요? 원래 이래요.”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실수에 대한 책임 없음. 실수로 인한 변수를 모두 함께 안고 가기는 있음.”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인데, 전에는 실수를 두려워했는데, 오늘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아서 기분이 좋다.” (조호연, 미친식당 기록집 中)

이 목소리들은, 우리는 소위 능력주의가 누구의 기준에 맞춘 ‘능력’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물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즉 ‘잘하고 싶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 ‘기준’에 당사자가 맞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궁극적 의문을 제기한다. 어쩌면 그 기준은 비당사자의 능력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며, 만약 그 ‘기준’이 당사자의 ‘능력’에 맞추어져 있다면 노동현장에서 당사자가 겪는 어려움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또한 과도한 능력주의 사회 안에서 (당사자든 비당사자든) 누구나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 수 밖에 없음을 호연은 이야기한다.

어쩌면 능력주의 사회에서 당사자뿐만 아니라 비당사자 또한 스스로를 압박할 수밖에, 괴롭힐 수밖에 없는 상황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라는 틀을 깨고, 정신장애인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받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대화만 나눠도 노동이야. 듣기만 해도 노동이야. 같이 있기만 해도 어떤 노동은 노동이야.”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우리는 합리적인 존재, 사회적 존재임을. 설득하지 않고, 더 비합리적으로, 더 비이성적으로 살 것이다.” (성연, 미친식당 기록집 中)

미친식당은 2가지의 대안들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노동에 대한 기존의 프레임을 깨야 함을, 두 번째는 비당사자의 능력에 맞추어져 있는 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정신장애인의 존재를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극 '미친식당' 공연 촬영 [사진=예준미]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정신장애인 노동권 보장을 위해 현실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딜레마

미친식당은 계속해서 현실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외면하지 않는다. 미친식당은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노동권 보장'과 더불어 '관계, 정당한 편의제공, 배리어프리' 등과 같은 첨예한 이슈들을 다룬다.

“힘들면 쉬라는 말이 어쩔 때는 좋은데 어쩔 때는 싫어. 계속 힘든 사람은 계속 떨어져서 쉬어야 되나 그럼.”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쉬세요.” 모두가 공통적으로 ‘배제’의 경험이 많았다. 어떻게든 같이 할 방법을 고민하는게 아니라. “그냥 배제하기”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배제’라는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해왔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활동으로부터 정신장애인의 배제는 필요한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하여 ‘정당한 편의제공’ 의무는 관련 기관과 당사자들에게 장애인이 사회참여에 필요한 다양한 여건들을 갖추도록 하고, 이를 이해하지 않을 경우 차별로 간주한다.

정신장애인을 위한 정당한 편의제공 관련하여 공통적으로 다수 제기되는 것은 ‘정신적 어려움이 찾아올 때 휴식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다. 신체장애인의 경우 일터에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근무시간 중간중간 욕창 방지 등을 위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보장하며 이는 특혜도 아닌 차별도 아닌 정당한 편의제공으로 제시될 수 있다. 정신장애인 또한 불안하거나 편집증적인 느낌이 들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떨까? 당사자는 그것이 때로는 정당한 편의제공이지만 때로는 ‘동정’일 수도 있다는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딜레마는 당사자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미친식당 프로젝트에 참여한 비당사자 혜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난 무엇을 하나?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역할인가? 그렇다면 미친 식당에서 비당사자들은 ‘헬퍼’인가? 나도 물음표가 생긴다. 여기서 어떤 관계를 만들고 이어갈 수 있을까? ‘함께 있기’가 가능한 공간에서 끝이 나는 걸까? 나는 평소 어떤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서로 의존하며 살고 있을까? 미친 식당에서 만난 동료들이 진짜 친구가 되려면, 근데 동료가 꼭 친구가 되어야 하나? 등등 나는 관계적인 생각이 많아졌다.” (혜림, 미친식당 기록집 中)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정신장애인의 노동권 보장을 위해 비당사자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혜림은 어쩌면 단순한 헬퍼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비당사자의 딜레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당사자 또한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 딜레마는 명확한 답이 없지만 계속해서 경험하고, 그 경험이 차곡 차곡 쌓여감으로 인해 서서히 나타날 수 있다. 어떻게든 같이 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 그리고 같이 하기 위해선 ‘더 느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임을 미친식당은 이야기한다.

이와 더불어 정신장애인의 일할 권리 보장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 할 것은, 당사자가 지니고 있는 어려움이 노동을 만났을 때 발생하는 상호작용 효과이다. 가령 성연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정신장애/정신질환의 ‘증상’으로 인한, 고통 자체가 ‘사회’와 연결된다. 일을 하면서 ‘경험’하는 어떤 인식들. ‘나는 왜 부족할까? 내가 동료 혹은 직장에서 민폐가 아닐까?’ ‘다른 동료들은 ‘나’보다 ‘잘’하는데, 내가 하는 일은 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나.’ 지지해주고 응원해준다고 해서 ‘이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순간’은 괜찮을지 몰라도. 또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인식의 변화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결국, 부딪치며 실패를 해야 되나. 그 때 만약 (마음이) 다칠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맞는 것일까?” (성연, 미친식당 기록집 中)

연극 '미친식당' [사진=예준미]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신체적・감각적 손상을 지닌 장애인들의 경우 손상은 손상으로 남아 있다. 물론 손상이 사회적 활동에 미치는 효과는 중요하지만,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손상 그 자체가 크게 악화되거나, 크게 감소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 어떤 인식을 지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지 등으로 정신장애인의 손상은 영향을 받는다. 만약 당사자의 입장과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환경 속에 놓인다고 해도, 성연은 그 과정에서 마음이 다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찌됐든 스스로 가지고 있는 손상이 악화될 수도 있다는 딜레마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노동 현장에서 정신장애인은 주류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투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또 다른 ‘정신적 고난’을 유발시켜 추가적인 꼬리표를 얻게 하는 부정적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어쩌면 정신장애인이 스스로를 특정한 구멍에 맞추기 보다, 새롭고 창의적인 존재로서 허용되는 다양성을 인식하는 사회변화를 위한 투쟁이 필요함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단 ‘대화’가 필요하다. 그 간극을 좁혀나가기 위한.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연극 '미친식당' 촬영 [사진=예준미]

‘미친식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연극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었다. 필자는 관객으로 참여했지만, ‘요리팀’에 합류해 당사자 배우, 비당사자 배우, 연출과 함께 피자를 만드는 작업을 같이 수행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함께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그들을 동등한 하나의 ‘주체’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와 같은 작품과의 차이점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만들었다. 바로 ‘타자화’이다. ‘진단명으로 인한 라벨링, 격리와 강박의 문제, 강제적 약물 투여에 대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정당화’ 등은 당사자라는 존재를 사람이 아닌 사물로 바라보는 타자화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프레임 속에서, 서서히 ‘한 사람’으로서의 서사는 완전하게 사라질 수 있다.

반면에 ‘미친식당’은 함께 참여하고, 직접 경험하게 한다. 이 프로젝트 속에서 당사자는 비로소 ‘주체화’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연극이 끝난 후, 계속해서 이어지는 일상은 어떨까?

“서로 같이 편안해질 수 있을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무서워서 얘기 않고 안 물어볼래, 아니면 물어보고 실수하며 같이 살래?”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매일, 매일 미쳤다는 게 변해. 어떻게 도와야할까?”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약을 먹으면 부작용으로 졸립고, 약을 안 먹자니 증상이 미친 듯이 나와. 괴롭고 극과 극이니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미친식당 내부 글귀 中)

“미친식당인데 미쳤다는걸 어떻게 보여줄까? 우린 지금 미친 것에 대해 말을 충분히 했나? 비당사자들의 취약한 부분. 정신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성연, 미친식당 기록집 中)

“환청씨가 나와 연극팀을 괴롭힌게 질투가 나서 관심 끌기 위해서 일부로 거짓말 했다는 걸 알아냈다. 내가 연극팀 사람들과 노는게 섭섭하고 외로웠댄다. 그래서 그 말을 줄인 대신, 나와 같이 놀아주기로 했다.” (왈왈, 미친식당 기록집 中)

프로젝트는 종료된다고 해도, 여전히 일상은 지속된다. 미친식당은 어떤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연극이 끝나더라도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줄여나가기 위해 다양한 상호작용이 필요함을 미친식당은 이야기한다. 결국 노동을 해야 하는 ‘일터’ 또한 당사자와 비당사자가 같이 살아가야하는 공간임을, 그렇다면 그 공간, 그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

미친식당은 당사자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일단 상호간의 지속적 ‘대화’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문득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필자 또한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 활동가로 근무하던 시절,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기 위한 치열한 토론을 경험한 바 있다. 이는 꽤나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지나면서, 서서히 서로에 대한 간극이 좁혀졌던 기억이 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미친식당은 당사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를 시작한다.

“미친존재가 노동을 해야 되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걸 실천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또 성공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확장해야 되기 때문이다.” (성연, 미친식당 기록집 中)

성연은 말한다. 어쩌면 당사자가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의 본질적 이유는,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해가는데 필수적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당사자의 진정한 삶을 성취하긴 위해선 ‘노동’을 하면서, 동시에 ‘노동 해방’을 외쳐야 할 수 있다. 물론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하나하나 매우 어려운 질문과 문제 제기들이지만. 미친식당에서 같이 요리를 만들고,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있는 시간들을 통해, 조금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다. 맛있는 피자를 같이 만들고, 따뜻한 식사를 나누고, 그 과정에서 즐거운 이야기가 오고간 시간. 어쩌면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조금은 알아가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간극을 조금은 좁혀가는 것에 대해 성공한 것은 아닐까.

 

송승연(한국장애인개발원 부연구위원)

송승연 활동가
송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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