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미쳤다는 것으로 밖에 나의 정체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리뷰] 미쳤다는 것으로 밖에 나의 정체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 위은솔
  • 승인 2023.08.1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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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2023. 송승연․유기훈 역, 오월의 봄) 리뷰
위은솔(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모하메드 아부일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송승연 유기훈 옮김, 오월의 봄, 2023.
모하메드 아부일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송승연 유기훈 옮김, 오월의 봄, 2023.

수많은 ‘부정’들 가운데에서 ‘인정’으로 가고자 하는 우리의 투쟁

우리들의 존재는 늘 ‘부정되어진’ 존재이다. 부정되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올바르지 아니하거나 옳지 못한(不正) 존재이자,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되는(否定) 존재이기도 하며, 때때로 깨끗하지 못하거나 더러운 혹은 불길한(不淨) 것으로 존재 지어졌다.

이 책에서는 인정이라는 단어와 관련 개념이 다수 등장한다. 왜 구태여 인정에 대해 여러 철학과 담론, 학자들의 말을 인용해가며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실은 이미 책의 제목에서부터 인정은 빠질 수 없는 대목이었다. ‘미쳤다는 것이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책의 제목은 이미 해당 정체성이 인정받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정이 무엇이기에 이리도 많은 물음과 고민들을, 수많은 논쟁거리를 낳는 것일까. 책에서는 매드와 유사성의 예시로 흑인, 소수민족, 성소수자 등이 인정을 쟁취하고자 하는 문화와 역사를 소개한다. 이들 모두 인정받지 못했던, 혹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구성원의 절대다수는 주류가 되었고, 소수는 철저하게 비주류가 되어 주류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여러 소수 집단 중 우리는 광인으로서 부정(不正, 不淨)한 존재이자, 늘상 부정(否定)당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주류가 내세우는 생의학적 담론과 의료적 관점은 우리를 지배해왔고 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우리는 계속해서 비주류화 되었다. 얼핏 서로의 각 진영은 쟁투의 대상으로 볼 수 있으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우리는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왜 언어적 공동체 형성이 어려웠을까

책에서 광인들은 언어적 공동체 형성이 어렵다고 소개된다. 더불어 언어적 공동체 형성이 가능해야 진정한 문화 공동체로서 인식할 수 있으며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나는 앞서 작성한 글에서 의도를 갖고 말장난과 같이 느껴질 수 있도록 단어들을 사용했다. 언어가 주는 힘을 표현하고 싶었다. 저자도 언어의 힘이 대단함을 이미 알고 있었고, 언어는 곧 문화로 인정받느냐 아니냐의 주요 잣대가 되었다. 저자의 전제는 매드 문화는 그 안에서 공유된 언어가 존재하지 않음이다. 그렇기에 언어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 우리는 문화 공동체로 간주하기 어려울 수 있음을 내비친다.

이 때의 ‘언어’는 체계적인 의사소통 매체가 아닌 서로 오랜 기간 알고 지내온 친구들 사이에서 발전된 것과 같은 사적인 언어를 뜻하는데, 광인들은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기에 단일한 언어나 공유된 역사 같은 것이 존재하기 어려워 해당 언어를 형성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서술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언어적 공동체라고 전제하고 있는 농인들은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위 의구심에 대해 스스로 내린 답은 이것이다. 우리 광인들은 언어적 공동체 형성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또다시 인정이 아닌 부정의 경험을 당하고 있음이며, 그 어떤 소수 집단들보다도 많은 억압과 폭력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음이다. 우리를 설명할 때 유난히도 수동태 구문이 많다. 그렇기에 더욱이 우리의 언어는 부정의 대상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체계적인 의사소통 매체는 아니지만 친구와 같은 사적인 ‘언어’를 우리는 이미 동료라는 이름 하에 주고 받아 왔다. 동료지원이 전문가 지원과는 별개로 고유한 역할과 특성, 효과가 인정되는 것은 광인들끼리의 특수한 경험이 문화적 맥락으로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료지원가의 발전은 서구로부터 시작되어 국내에서도 계속 제도권에 안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가 다름에도 동료지원의 개념은 광인들의 공통 개념이자 언어이고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결국 광인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우리를 능동태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행하는 존재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또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매드 운동의 과정을 통해 언어적 공동체로서의 영역도 궤를 같이 할 것이라 생각한다.

미쳤다는 것으로 밖에 나의 정체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때때로 나의 자아가 여럿으로 나뉘고, 그 자아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이때 작가가 된 나는 말 그대로 전지적이어서, 여러 자아들 중 밉거나 못된 자아들을 조금 더 바르고 적절한 자아가 대화에서 우세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이런 나를 사회에서는 ‘미쳤다’고 한다.

‘미치다’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다’이다. 이 의미를 곱씹으며 생각해보았다. 내가 경험하는 여러 자아의 대화가 진정 이상한 것인가? 보통과 다르고 상식적이지 않은 것인가?

여기서의 보통 사람과 상식은 아무래도 주류 집단을 뜻할 것이다. 또한 이 주류 집단은 정신질환을 진단 받지 않았거나 정신장애 등록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주류 집단에 있는 자들 중 내면에서 들려오는 여러 목소리를 느껴보지 않은 자가 몇이나 있을지 궁금하다. 대중 매체에서 흔하게 혼란스럽거나 고민하는 사람들을 선과 악, 천사와 악마와 같은 대비를 통해 표현해내기도 한다. 모두가 살면서 경험하고 있는 ‘할 것인지, 말 것인지’와 같은 고민에서도 그에 대한 선택은 내면의 목소리의 귀 기울인 결과일 것이다.

이렇듯 광기와 무관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대중적인, 주류의 문화에서는, 책 속의 표현과 같이 ‘문화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미쳤다는 것을 그들끼리 정의했고 우리를 표현하는 그들의 언어로 소비해왔다. 그래서 나는 미쳤다는 것으로 밖에 나의 정체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광기와 정체성, 인정과 문화를 둘러싼 많은 고민을 촘촘하게 해온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어적 맥락에 대해 작성한 바와 같이 광인들이 문화적으로 모든 권리를 기본재처럼 누리는 것에 대하여 때때로 회의적인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광기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실패한 정체성이 될 수도 있다는 논쟁거리를 인정한 대목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는 광기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의 언어로 정의하는 것이, 되찾아 오는 것이 숙제임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지점이다.

설령 우리가 광기의 의미를 되찾는대도, 기존의 사회에서 만들어낸 미쳤다는 것을 대체하는 또 다른 언어가 생겨날 수 있으며 그 언어에 속박당할지 모를 일이다. 광기가 곧 나의 정체성이듯이, 새로이 생겨날지 모르는 광기를 대체하는 그 언어 또한 나의 정체성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나와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실존적인 이유로,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주체적인 정체성의 표현과 인정을 위해, 또 다른 이름의 매드로서의 운동과 문화적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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