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우울증 환자가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일 뿐이다
그는 우울증 환자가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일 뿐이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0.19 2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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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우울증’ 주장
우울증은 자신을 죽이는 병, 잔인하지 않아
심신미약에 대한 국민적 합의 필요
법은 ‘질병’을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해야

21살의 청년이 죽었다. 그것도 참혹하게. 그리고 그를 살해한 피의자는 자신이 10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아왔다고 주장했다.

지난 14일 오전 8시 13분경.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의 한 PC방을 찾은 김모(30) 씨는 손님이 남긴 음식물을 치워달라고 요구했다. 아르바이트생인 신모(21) 씨는 김씨의 말에 따라 그 테이블을 치웠다.

김씨는 게임을 하던 도중 무슨 이유에서인지 환불을 요구했다. 옆에는 김씨의 동생(28)도 같이 있었다. 김씨는 환불을 안 해주면 칼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신씨는 매니저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고 매니저는 경찰을 부르라고 지시했다. 경찰이 출동했고 이들은 15분 정도 머물다가 돌아갔다.

몇 분 후 신씨가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PC방으로 들어가자 김씨가 이를 뒤쫓아가 신씨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동생은 신씨의 양팔을 잡고 있었다. 모두 32차례. 담당의는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고 했다. 시신의 훼손이 심해 의사는 신씨 부모의 참관까지 말렸다고 한다.

신씨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사건 세 시간 후인 오전 11시 숨졌다.

그리고 피의자 김씨는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해 2범의 전과자였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김씨가 주장한 우울증을 통해 심신미약으로 감형받는 걸 반대한다는 청원글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조현병 당사자다. 조현병 당사자는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로 머물러 있다가 사건사고가 터지면 공동체로 소환돼 낙인을 받는다. 우울증도 그럴까. 만약 우울증을 가진 이가 사고를 치면 공동체는 우울증 환자를 다 예비 범죄자로 보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현병이 주는 어감과 우울증이 주는 의미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같아서 누구나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조현병은 아니다. 조현병은 특정 인구 집단이 가지는 한센병 같은 질병이다. 고쳐질 수 없으며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고 사회생태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영원히 ‘이해받을 수 없는’ 병명이자 그 존재자인 것이다.

내겐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다. 가게나 식당에서 식품을 사고 음식을 먹은 후 나갈 때 손님에게 주인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옷을 수선하러 갔는데 이 세탁소 여주인이 오히려 화를 낼 때 나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그녀와 싸웠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석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교회에서 점심식사를 하려 할 때 식당 담당자 여성이 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을 때도 그녀와 목소리를 최대한 높여 싸웠다.

어떤 때는 식당에서 다른 손님에게는 파김치를 주면서 나에게는 주지 않았을 때 화가 나서 주인에게 따진 적도 있다. 그리고 식당 종업원을 불렀는데 그녀가 모른 척했을 때 큰소리로 항의하기도 했다. 병적 증상은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는 어마어마한 분노가 잠재해 있었다. 그건 삶에 좌절한 이가 표출하는 고통이었다. 나는 그 분노를 제거하기 위해 음악치료와 미술치료를 해야 했다. 마음에 있는 분노의 곪은 피고름을 뽑아내기 위해서 나는 그 치료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나는 분노조절장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세계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어쩌면 이 같은 행위를 하도록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는 세계를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려움은 자기 방어를 낳고 자기 방어는 곧바로 노여움으로 터져나와 나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내가 왜 그토록 노여워했는지, 왜 분노 속에서 괴로워했는지를 알게 됐다. 그건,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내면의 붉은 다짐 때문이었다.

무시당하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노조절장애는 자아가 무시의 표적이 될 경우 길길이 날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다. 그 무시당함을 당했을 때 분노를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게 철천지 원수로 그 대상을 보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웃어넘기기도 하고 때로는 정신건강을 위해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돌아설 뿐이다.

어느 날은 내가 사는 한 동네에서 알코올중독 예방 및 상담에 관한 행사가 열린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는데 한 노인이 운영진들을 향해 큰소리로 항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코올중독자이며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는데 사람들이 무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운영팀이 그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그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그 이유로 운영부스의 테이블을 마구 두드리고 엎어버리려고 했다.

분노조절장애는 이렇게 무시에 대한 감정적 대응으로 표출된다. 그 노인이 화가 났다고 해서 그가 집에 가서 흉기를 들고 와 휘두르거나 건물에 불을 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알코올의존이 심한 사람의 경우 분노조절장애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다는 걸 내 경험상 알고 있다. 나 역시 알코올의존증 환자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내가 화가 난다고 해서 나를 무시한다고 해서 내가 흉기를 드는 것은 아니다. 만약 무시당해서 사람을 흉기로 살해한다면 사회는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무시를 당했을 때 정당하게 항의할 수 있고 그 항의가 존중받지 못했을 때 경찰에 신고해 이 부당한 부분을 판단해 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복잡한 국가 체계 안에서 내 존재를 확인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울증은 어떨까. 나 역시 조현병과 함께 우울증이 찾아왔다. 세상에 대한 환멸이 나를 엄습했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휘청이게 했다. 그 두려움을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나는 더 깊은 우울증을 겪어야 했다. 두려움이었다. 우울은 두려움의 가면을 쓰고 나를 엄습했다. 그런데 내가 그 우울이 두려워서 흉기나 총을 들지는 않는다. 대신 나는 술로 그 두려움을 회피하려 했다. 어떤 이는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집밖의 일상적 생활이 그에게는 두려운 것이다. 삶의 무의미성을 자신만의 공간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기가 다 빠져나간 허한 감정, 허한 육체, 그것이 우울증의 모습이다.

PC방 사건의 피의자 김씨는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진술을 했다. 만약 우울증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할 수 있는 질병이라면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는 모든 이들은 잠재적 범죄자들이다. 우울증은 사회가 가지는 억압적 모순과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많이 발병한다. 그런 그들이 저 김씨처럼 흉기를 들 수 있을까. 어쩌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죽이는 것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말이다.

김씨의 우울증과 내가 생각하는 우울증은 다른 것일까. 30대의 우울증을 앓는 이가 아침부터 PC방에 와서 게임을 하고 직원이 조금 불친절했다고 욕설로 위협하고 흉기까지 준비하는 것이 과연 우울증 걸린 이의 태도인지를 묻고 싶다.

피해자 신씨를 담당했다는 의사 남궁 씨가 올린 글이 있다. 그는 “(신씨의) 상처는 목과 얼굴, 칼을 막기 위했던 손에 있었다”며 “하나하나가 형태를 파괴할 정도로 깊었다”고 적었다.

이어 “피범벅을 닦아 내자 얼굴에만 칼자국이 삼십 개 정도였다”며 “가해자는 이 칼을 정말 (육체의) 끝까지 넣을 각오로 찔렀다”고 덧붙였다. 모든 상처에는 칼이 뼈에 닿고서야 멈췄다는 말이다.

그는 피해자의 훼손을 육신을 보며 이건 ‘극력한 원한’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평생을 둔 뿌리 깊은 원한 없이 이런 짓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적었다.

“얼굴과 손의 출혈만으로 젊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려면 정말 많은, 의도적이고 악독한 자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많은 자상을 어떻게 낸단 말인가.”

담당의 남궁 씨는 피의자 김씨에 대해 “그가 우울증에 걸렸던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닐 수 있다”며 “하지만 우울증은 그에게 칼을 쥐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 개인의 손이 집어든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럴까. 우울증에 걸린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닐 수 있다. 누구든 살아가면 많은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고 어떤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관절염에 걸린 사람이 저지르는 죄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죄가 그 형량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울증은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은 된다. 법은 인간의 심신미약 상태에 대해 죄의 감형에 대한 유효한 항변으로 인정한다. 우울증에 거린 게 그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우울증에 의한 사건은 그가 저지른 것이다. 담당의 남씨의 말대로 손이 흉기를 집어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피의자 김씨는 감형받아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법의 엄중한 처벌을 원한다. 그는 어쩌면 우울증 환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목에 문신을 한 사이코패스였다고 나는 믿고 싶다. 어떤 분노가 한 인간을 이토록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흉기를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건강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건 병적이고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하나도 없는 한 인간이 저지른 범죄였을 뿐이다. 우울증은 자기 자신을 찌르는 병이다. 괴로움이 한계를 넘으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하는 병이다. 피의자 김씨처럼 타인을 향해 흉기를 휘두를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우울증 여부에 대해 정신과전문의가 판단하겠지만 나는 그가 ‘진짜’ 우울증 환자라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신뢰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존중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의 엄벌(嚴罰)을 바란다.

添言: 글을 마치는데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심신미약 피의자에 의해 죽게 된 우리 딸 억울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자 A씨는 자신의 딸이 남자친구에 의해 목졸려 숨졌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체포된 후 경찰에 자신의 ‘조현병 환자’라고 주장했다. 조현병 환자였으므로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를 법원에서 진술할 예정이다. 그렇다. 조현병은 이렇게 유령처럼 떠다닌다. 누구에게는 실질적인 고통이 되지만 누군가에는 법의 형량을 완화하기 위한 하나의 악한 수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 이제 조현병에 의한 살인이 났으니 공동체는 다시 조현병 당사자들을 공동체로 소환할 것이다. 격리와 배제는 다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저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남자친구에게도 법의 엄벌이 내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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