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4)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4)을 마치고
[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4)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4)을 마치고
  • 박지니
  • 승인 2024.03.22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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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 자격을 주장할 수 있는 협회도 위임받은 권한도 없이 - 즉, 언제라도 어떤 단체에서 ‘한국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우리가 주최하겠다’고 주장해 오면 우리에겐 반대하고 나설 이유도 근거도 없다 - 거의 개인 수준에서 자발적으로 착수한 올해 섭식장애 인식주간도 감사하게도 뜻깊은 일주일로 잘 마무리되었다. 기업이었다면 분별없다는 평을 들었을 만큼, 우리가 기획한 바를 전부 실행할 수 있을 재정적 지원을 확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작년 11월부터 거의 무모하게, 때때로 막막함과 불안을 억지로 눌러가며 준비했던 일주일 간의 세션은, 너무나 다행히도, 참여한 모두에게 풍성한 고민거리를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그 모두는 온라인 독서모임 ‘들불’, 글쓰기 모임 ‘그레이방’, 밤의서점, 그리고 많은 자발적 후원자들의 지원 덕분에야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 첫 날이었던 2월 28일 ‘당사자 세션’에 패널로 참석했던 8명의 친구들의 기념사진. 왼쪽 끝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이선민, 이진솔, 김윤아, 이은아, 양석영, 곽예인, 박지니, 박채영.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 첫 날이었던 2월 28일 ‘당사자 세션’에 패널로 참석했던 8명의 친구들의 기념사진. 왼쪽 끝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이선민, 이진솔, 김윤아, 이은아, 양석영, 곽예인, 박지니, 박채영. [사진=박지니 제공]

행사가 끝나고 두 주가 지난 지금, 나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친구들 모두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2월 한 달 동안 휴직 상태에서 행사 준비에만 매달렸던 나는 새로운 회사에 출근을 시작했고, 진솔과 채영은 우리가 ‘모의작당'이라 통칭하는 자발적 프로젝트들을 꾸리고 있으며, 공간 이전한 서점 운영으로 다시 바빠진 밤의서점 폭풍의점장님은 감사하게도 이번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도와준 몇몇 분들께 서점에서 제작한 다이어리를 일일이 선물로 부쳐주셨다.

이번 행사에서 새롭게 내 마음을 괴롭히고 다급한 화두가 된 질문들에 대해, 이 다급함이 휘발되기 전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까지 두 주나 걸린 건, 그 질문들 모두가 미묘하고 난해하며 - 똑같은 이유로 그만큼 중대하고 의미 있는 것들인 탓이었다.

1. 회복서사와 멜랑콜리한 반항심 사이

‘과거의 나 역시 힘들었지만, 당시의 나는 유아적이고 근시안적인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러이러한 삶의 과제들을 달성하고 난 지금, 다른 누구도 내가 그랬듯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식의 회복과 극복 서사가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억압적으로 들릴 수 있는 까닭은, 그 서사에서 현재진행형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기 전의 열등한 위치에 놓이는 때문이다. 이 같은 회복서사는 특히 아픈 이를 돌보거나 ‘책임져야’ 하는 (부담에 직면하는) 가족에게 희망을 혹은, ‘후련함’을 안긴다. 동시에 가까운 이들에게 스스로가 부담이 되고 있음을 모르지 않으며 이를 계속 윤리적으로 자인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는 당사자들은 ‘그렇다면 내 몸은/내 존재는/내 회복과 건강은 누구의/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에 빠진다.

그러나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 당사자 세션에서 ‘민’이 자신은 “‘운’으로 나아졌던 것 같다”는 표현을 선택했던 것처럼, 증상이 악화되거나 진정 혹은 소멸되고, 삶의 괴로움이 대처 불가능할 정도로 격해지거나 범상한 수준으로 다스려지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 자체이며 실패도, 범죄도, 인간실격도, 무책임도, 방종도, 배은망덕도, 세상의 종말도 아니다. 첫 회 인식주간을 준비하며 함께 언론 인터뷰에 응했을 때, 나는 섭식장애 임상가인 모 선생님이 20여 년 전 나의 입원병동 생활을 추억하며 내가 “잘 지내다가” 불현듯 돌발적으로 자해 시도를 한 것에 대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는지 배신감이 느껴졌다"고 말해 화가 난 적이 있다. 환자의 모든 행동이 치료자에 대한 수동공격적 의사표현이라고 받아들이는 건 거의 편집증이 아닐까?

그러나 섭식장애 인식주간 이틀쨋날 있었던 당사자 가족 세션에서 관객으로 참석한 당사자 가족이 ‘치료에 의지를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가족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치부하는’ 언니가 원망스럽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 그리고 객석 1열에 앉아있던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친구들은 - 그의 심경을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4일 자기서사와 ‘자기이론(auto-theory)’ 세션에서 평론가 리타와 박지니.
3월 4일 자기서사와 ‘자기이론(auto-theory)’ 세션에서 평론가 리타와 박지니 [사진=박지니 제공]

‘자해할 자유'에 대한 논쟁은 또 다른 문제였다. 섭식장애 같은 ‘자처하는 불행'으로 보이는,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환의 경우 당사자가 ‘치료'를 거부할 경우 그 판단을 존중할 것인가에 관한, 전혀 쉽지 않은 윤리적 질문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실제 근 몇 년 사이 유럽에서는 십대 거식증 환자의 치료 거부 의사가 (영국의 경우) 법정에서, 혹은 가족들로부터 받아들여진 일이 있었다.

지난 2019년, 노아 포토반(Noa Pothoven)의 사인이 안락사가 아니었다는 정정보도와 함께 밝혀진 것은, <성취 혹은 교훈(Winnen of leren)>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간해 성폭력 트라우마와 거식증,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정신적 고통을 독자들에게 공명시켰던 이 맹렬하고 독창적인 십대 소녀가 결국 “더 이상 싸워 나갈 의욕을 잃”고 식음을 전폐했으며 이제껏 그의 투쟁을 지켜봐 왔던 가족들도 연명치료를 시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 그렇게 그 아이는 자신의 뜻대로(?) 존재를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십년 넘게 - 그러니까 거의 일평생을 - 거식증으로 고통받고 당시로서는 3년째 입원병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십대 소녀 - 언론에는 ‘BG’라는 이니셜로만 알려졌다 - 가 “인위적 영양액 주입과 수분 공급을 중단해 달라”고 법원에 청원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법원은 BG의 “자기 몸에 대한 자주권과 치료 결정을 스스로 내릴 권리”에 손을 들어주었고, BG는 판결이 있은 지 두 달 뒤에 목숨을 잃었다. 한 기사에는 판사가 BG의 일기장을 읽었고, 그 기록들로 BG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는 얘기도 언급됐다. 여론은 들끓었다. 섭식장애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파행적 운영으로 비난받아온 영국 국가보건의료서비스(NHS)가 결국엔 공급부족 문제를 이렇게 무책임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노아 포토반
노아 포토반

최근 섭식장애 학계에서는 ‘말기/불치의 거식증(terminal anorexia)'이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것이 옳은가에 관한 논쟁이 격렬하기도 했다. 며칠 전 마무리된 국제섭식장애학회(International Conference on Eating Disorders, ICED 2024)에서는 아예 최근 이 논쟁에 불을 지핀 미국의 의사가 모두발표를 하고 그에 뒤이어 영국의 유명한 남성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활동가인 제임스 다운스(James Downs)가 기립박수를 받으며 반론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모든 난해하고 미묘한 논제가 그렇듯이,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그러나 피할 도리는 없을 한계는 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 자체의 불능,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질문 문장을 던지느냐에 따라 진실 자체가 모습을 변화한다는 본질적 문제일 것이다.

만약 소설 속 십대 주인공이 그의 삶의 맥락에서 ‘나는 내 몸을 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공감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또다른 현실의 겹겹의 차원에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면, 그리고 정말로 우리에겐 그 겹겹의 질문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어쩌면 엄청난 인내와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과 실패 속에 고민하고 글쓰는 힘이 우리에겐 엄청난 강도와 절박성으로 요구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이진솔과 박지니 [사진=박지니 제공]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이진솔과 박지니 [사진=박지니 제공]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열린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 브릭스에서 토끼 인형을 들고 있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박채영과 이진솔 [사진=박지니 제공]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열린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 브릭스에서 토끼 인형을 들고 있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박채영과 이진솔 [사진=박지니 제공]

2. 여성성의 거부, 그리고 여성을 상품화하는 신자본주의에서의 주체적 탈출 서사를 비판하는 것 사이

가시가 단단히 박힌 장미 줄기를 꺾는 것 같던 또 하나의 화두는 ‘아름다워지기 위한 거식증적 행위는 비난받아야 하는가?’라고 지금 나 역시 필연적으로 잘못 환언(paraphrasing)하게 되는, 역시 언어와 질문 방식에 깊이 관여된 문제제기였다. ‘아름다워지기 위함'이라는 말이 사실상 실체 없는 묘사인 탓으로, 가령 임상가들이 종종 폭식증 환자는 거식증 환자와는 달리 극도로 마르기를 원하지는 않는 편이라 묘사하고 해들리 프리먼이 자신의 책 <먹지 못하는 여자들(Good Girls)>에서 프리먼 자신이 거북하게 느끼는 잡지 속 모델의 ‘건강해 보이는’(?) 배와 허리를 보고 동료 폭식증 환자가 동경하는 표정으로 “아니야, 그건 복근이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처럼 환자들 간의 ‘마른 몸'에 대한 개인적 기준 자체가 다른 탓에 결론 나지 않는 논쟁이 되는 것일 수 있다. 혹은, 어떤 여성이 사회가 지정한 여성성을 극도로 혐오한 나머지 생명에 위험이 올 지경으로 스스로에 영양을 차단하고 있다면, 그런데 또 다른 여성의 눈에는 그 죽어가는 여성이 더없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면 - 그리고 실제 케이팝을 위시한 여혐적 현대문화에서는 ‘지나치게 말랐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Never skinny enough)'는 강박이 통념화되고 있기도 하는 상황에서 - ‘섭식장애는 아름다워지기 위한 다이어트 그 이상의 것’이라는 주장이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반격은, 그리고 ‘십대 시절 내 거식증은 아름다워지기 위한 다이어트로 시작된 게 아니었다’는 이의 제기는 중언부언 외에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 외에도, 내가 이 원고에 차례로 적어 놓은 논제들은 열 개나 된다. 이 열 가지 질문들도 모두 이번 섭식장애 인식주간 동안 끓어오른 것들이다.

1. (병에 관한 한, 혹은 ‘치료’에 관한 한) 누가 ‘전문가’인가에 관한 질문

2. 누구의 ‘인식’ 개선인가?

3. 피해자 정체성은 적출성(legitimacy)이 아님에 대해

4. 젊은 엘리트 여성의 ‘정병러’ 정체성의 함의에 대해

5. ‘정치적으로 옳은’ 구호와 그에 대한 무비판적 신뢰에 대해

6. “병원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사업체이기 때문에 영리성을 추구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체념적 주장에 대해

7. “그래서, 수가 인정을 받아 보셨어요?”라는 반박에 대해

8. ‘기특하고 장한’ ‘당사자’ 활동을 무보수 혹은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것에 대해

9. 의사의 수가 논쟁과 가령 번역가가 고질적으로 처해 있는 저임금 상태에 대해

10. 약자가 ‘자유롭게 표출하는’ 목소리를 지향하는 순진성에 대해

이 나머지 질문들에 대해서도, 너무 늦지 않게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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