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세상이 나를 후려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삐삐언니의 책방] 세상이 나를 후려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10.10 1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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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21) 따귀 맞은 영혼
베르벨 바르데츠키 지음·장현숙 옮김, 궁리
배르벨 바르데츠키, 따귀 맞은 영혼, 장현숙 옮김, 궁리, 2002.
배르벨 바르데츠키, 따귀 맞은 영혼, 장현숙 옮김, 궁리, 2002.

20여년 동안 조울병과 함께 살아오면서 병원을 다닌 햇수가 17년이다. 그 중 심리상담을 받은 시간을 합쳐보면 1년 가량이니, 꽤 오랫동안 의사와 상담사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현재 주치의 선생님은 2007년 2월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반년 정도는 진료실에서 입만 열면 눈물을 쏟았다. 의사 선생님은 조용히 휴지를 내밀었고 나는 눈물을 닦고 코도 힝 풀고, 그리고 또 울었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자 눈물이 좀 잦아들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계절이 바뀌면 철 지난 옷을 서랍 속에 넣어 정리하듯 나쁜 기억도 착착 개서 서랍에 넣을 때가 됐다고. 

물론 그뒤에도 울긴 했지만, 집중적으로 울었던 2007년이 눈물의 변곡점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지난 일이 서러워서, 내가 불쌍해서, 운명이 얄궂어서, 조울병이 기막혀서… 더이상 이런 ‘과거지사’ 때문에 울진 않았으니까. 솔직한 고백, 감정의 발산, 의사의 경청과 조언은 마음의 상처에 연고처럼 도포돼 새살을 돋게 했다. 흉터는 남았겠으나 이마저도 잊고 지낼 정도로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의 심리학자 베르벨 바르데츠키가 쓴 ‘따귀 맞은 영혼’을 읽는데 목안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나를 마비시켰던, 스스로 가치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우울의 늪으로 밀어넣었던 상처들이 기억났다. 책을 읽다가 몇차례씩 고개를 들어 가만히 눈을 감고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어느새 베르벨 바르데츠키의 내담자가 되어 예전에 받았던 상처를 복기하고 있었다.

바르데츠키는 ‘마음상함’이란 열쇳말에 풍부한 상담 사례를 엮어 상처에서 회복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차근차근 일러준다.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마음상함, 즉 마음을 다친다는 것은 “마음에 따귀를 맞는다는 것”이다. “마음에 따귀를 맞으면 분노와 무력감·분노·경멸·실망 같은 반응이 잇따른다. 이런 즉자적 반응 뒤엔 고통·불안·수치심 같은 감정이 숨겨져 있지만 정작 본인은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한다. 어떤 이는 상처를 준 상대방을 ‘가해자’로 지목해 폭력적인 형태로 공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화살을 내부로 돌린다. ”

나도 그랬다. 어떤 언질도 남기지 않은 채 야반도주하듯 무작정 연락을 끊고 떠나버린 남자친구,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수시로 쏟아졌던 성희롱과 폭언들. 신뢰했던 사람으로부터 급작스럽게 당한 물리적 폭력….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젊은 여자’들에겐 비일비재한 일들이었고 나 역시 비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겪은 것이 너무 수치스러웠기 때문에 오히려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행동하며 무절제한 폭음을 일삼곤 했다. 

지은이는 이런 상처들은 ‘미해결 과제’가 되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버림받거나 무시를 당하면 다시 되살아나 또다시 마음상함을 일으키게 한다고 말한다. 정확했다. 나 역시 심리적·물리적 폭력의 경험을 수치심의 울타리 안에 분노의 형태로 가둬놓곤,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나는 본래 사랑(인정)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곤 했다. 

이런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마음상함의 실체를 인지하고, 이를 상처를 입힌 상황 또는 상대방(어떤 경우엔 자신이기도 하다)과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고 바르데츠키는 말한다. 여기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하거나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감정을 적당한 수준으로 축소하는” 일이다. 이처럼 한발 물러남으로써 우리는 무작정 마음상함으로 고통받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온전한 자신’과 화해할 가능성이 열린다. 

단언하건대, ‘따괴 맞은 영혼’은 여러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곁에 두고 마음이 따귀를 맞을 때마다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읽어도 좋다. 세상은 언제나 나를 후려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무너져내릴지 본연의 나를 지켜낼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이 책 끄트머리에 나와 있는 우화(267~268쪽)를 읽어보자. 언젠가는 나를 파괴하는 것들, 마음상함을 일으키는 것, 즉 ‘구멍 뚫린 길’을 우회하는 지혜를 소망해보자.   

1.

길을 걷는다.

보도에 깊은 구멍 하나,

구멍에 빠진다.

끝장이다, 희망이라곤 없다.

내 탓은 아니야.

구멍에서 다시 나올 때까지, 시간이 한없이 걸린다.

2.

같은 길을 걷는다. 보도에 깊은 구멍 하나.

구멍을 못본 체한다.

또 구멍에 빠진다.

믿기지가 않는다, 같은 데 또 빠지다니.

하지만 내 탓은 아니다.

다시 나올 때까지 여전히 한참 걸린다.

3.

같은 길을 걷는다.

보도에 깊은 구멍 하나.

구멍을 본다.

여전히 구멍에 빠진다... 습관적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본다.

나는 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당장 구멍에서 나온다.

4.

같은 길을 걷는다.

보도에 깊은 구멍 하나.

구멍을 피해 돌아간다.

5. 다른 길로 간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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