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나의 인생…‘사람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음악인이 될 수 있도록
음악, 나의 인생…‘사람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음악인이 될 수 있도록
  • 최효진
  • 승인 2023.10.13 2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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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시정신건강복지센터 인식개선 활동가 최효진 씨 에세이
양극성정동장애로 입·퇴원 반복...이제는 음악가로서 꿈을 밀고 가
동료들과 ‘푸른창공’ 밴드 결성해 음원 발매

음악, 무한궤도

이미지. 픽사베이.
이미지. 픽사베이.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마이마이 카세트는 항상 나와 함께 했고, 집과 학교에서도 이어폰을 끼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혜성처럼 나타난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는 밴드 음악의 불씨를 지폈다. 짜릿한 전주와 박수를 부르는 리듬, 매력적인 보컬까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언젠가 꼭 밴드를 결성해 대학가요제에 나가겠다”라고 결심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에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015B의 콘서트를 보러 갔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몇몇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투박하지만 자작곡을 만들었고, 수많은 학생 앞에서 공연하는 기회도 얻었다. 음악을 듣고 만드는 것은 영감을 얻고 다루는 것이었고, 노래를 부르는 건 열정을 토해내는 과정 같았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바라던 밴드 음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지만, 아쉽게도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밴드부 멤버 중 한 친구가 내게 5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친구를 믿고 2학기 납부금으로 갖고 있던 돈에서 5만 원을 빌려줬지만, 친구는 시간이 지나도 돈을 갚지 않았다. 내부 갈등으로 밴드부는 해체되었고 밴드 활동이 끝났다는 상실감, 관계에 대한 실망,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복합적으로 밀려왔다.

혼자 끙끙거리던 나는 우울증에 걸렸다. 너무 힘들어 극단적인 시도를 했으나 어머니의 발견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았다. 퇴원 후에는 학교에 복학했지만, 예전처럼 학교에 다닐 수 없어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검정고시와 대학입시를 준비했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다.

검정고시는 합격했지만,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재수, 삼수에 이어 오수까지 했지만, 성적은 점점 떨어졌고, 우울증은 조울증으로 바뀌었다. 실패의 무한궤도였다. 어쩌면 대학에 대한 큰 뜻이 없었기에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 모른다. 지적 성찰과 배움보다는, 좋은 학교 타이틀로 대학가요제에 나가 인기를 얻고 싶었던 게 다였으니.

20대 중반이 지나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음악이라는 신기루에 빠져 술에 심취했고, 약과 술기운으로 멍한 상태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술에 취한 날이 취하지 않은 날보다 많았다.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

10대 시절 경험한 한 번의 입원은, 성인이 되어 여러 차례 반복됐다.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삶을 되찾기 위해, 가장 먼저 술을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숱한 유혹이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고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삶을 지내려 이를 악물고 단주했다.

꾸준한 약물 치료는 물론, 내가 믿고 있는 종교 활동에 전념하며 오랜 시간을 사색했다. 과거를 벗어나 ‘지금이 인생의 새 출발점’이라는 마음으로 하나둘씩 도전을 이어갔다. 정신건강복지센터에 등록해 상담,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며 내가 가진 고충을 하나둘씩 풀어나갔고 술 대신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법도 익혔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접하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좋은 대학교 타이틀이 없어도, 대학가요제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잘 즐길 방법을 고민했다. 그런 중 2018년, 뜻이 맞는 동료들과 ‘푸른창공’이라는 록 밴드를 결성하게 됐다. 나는 세컨드 기타리스트로서 작사, 작곡을 맡게 됐고 동료들도 나의 창작을 지지해줬다.

이미지. 픽사베이.
이미지. 픽사베이.

2019년, 1집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가 음원으로 발매됐고 한국음악저작권협회(KOMCA)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듬해인 2020년에는 2집 ‘그대의 미소’를 연이어 발매해 대중에게 선보였다. 크고 작은 공연에 참여해 음악을 선보였고, 직접 붙인 가사와 음들을 관객들과 나눴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그토록 원하던 ‘음악인’이 됐다는 성취감도 있었다.

꿈이란, 꾸기는 쉬워도 참 이루기 어려운 것 같다. 나 또한 쉽게 갈 줄 알았던 길이 40대에 와서 다다랐지만,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꿈이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바뀌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 모른다. 지금 나의 꿈은 ‘대학가요제 출전’이나, ‘밴드 가수’가 아니라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때론 흔들리고 고되겠지만, 내가 정의 내린 꿈은 변하지 않는다. 주위에서 나를 흔든다면, 나 또한 같이 움직이면 된다. 지금은 장애인 일자리에 참여해 번 돈으로 실용음악 학원에 등록해 작곡 레슨을 받고, 컴퓨터 미디 음악을 배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언젠가는 꿈이 또 다른 이름으로 정의되리라 믿는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음악인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멈추지 않고, 꿈을 꾸며 나아간다.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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