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사라지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파도는 사라지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 박목우 작가
  • 승인 2023.12.27 2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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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박목우 작가 에세이
비는 홀로 소리를 낼 수 없어 파도를 만나 저만의 소리로 울어
당신이 밝히신 빛은 물결처럼 철썩이고 사람들, 깊은 안식에 듭니다
노래는 하나의 물결이어서 이렇게 물결지는 것들로 젖어 있어
픽사베이.
픽사베이.

파도가 자신을 밀어내며 물러날 때 그래서 다른 파도를 오게 할 때 그 기쁨이 포말로 부서집니다. 무수한 전언을 찰나인 듯 전하고 사라지는 이 세상의 모든 파도들. 욕심도 잊은 채 깨끗이 순명합니다. 그 맑은 자세가 끝없는 움직임을 가져와 파도는 자신 안에 생명들을 기릅니다.

살아있는 바다에서 파도처럼 부드러운 지느러미들이 바다의 속살을 어루만집니다. 유년의 당신 뺨에 입 맞추시던 아버지처럼. 봄의 바다에는 환하게 간지러운 것들이 빛을 받고서 아이 같이 웃습니다. 그 소리 젖은 파도에 실려 가벼운 미풍으로 불어옵니다.

생에는 이렇게 밝은 시간이 있어 긴 어둠의 시간의 등을 쓸어줍니다. 봄비가 파도 속으로 스밉니다. 비는 홀로 소리를 낼 수 없어 파도를 만나 저만의 소리로 웁니다. 수없이 떨어져내린 꽃잎처럼 웁니다. 바다는 또 한번 반짝입니다. 깊고 흐린 하늘 아래에서 비의 조용한 울음이 배어 나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빛과 소리가 바다의 노래입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것이 바다를 아름답게 합니다. 비밀은 봉인되고 해안의 등대가 켜집니다. 인간의 불빛이 항로를 가리킵니다.

빗속에서는 누구나 길을 잃습니다. 파도만이 깨어 말합니다. 파도에 배인 것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알립니다. 그 바다에 서 계신 당신, 무한처럼 작아지십니다. 파도에 배인 몸으로 주름살 깊어가십니다. 해안의 절벽처럼 층을 이룬 깊이가 되어 표류하는 것들의 가슴에 깎아지른 진실을 고지하십니다. 파도가 칩니다. 파도가 그 절벽으로 닿습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밤이 낮을 밀어내며 오는 모습을 봅니다. 두 개의 몸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며 고요히 자리를 바꾸는 모습이 지극한 구애의 몸짓 같습니다. 당신은 비목들 무수히 세워진 곳에 서늘한 슬픔으로 계셨고, 쨍한 한낮 같던 숨 있는 것들의 열병이 저녁으로 오는 당신으로 하여 평온해집니다. 이제 당신의 하늘에 빛이 번집니다. 은은하고 나즈막한 당신의 어둠이 달빛을 머금고 세상을 뼈아프게 적시고 계십니다. 늦은 밤 홀로 돌아가는 이의 발 밑으로 흐릅니다.

당신이 밝히신 빛은 물결처럼 철썩이고 그 위를 걷는 사람들, 위로 받은 듯 깊은 안식에 듭니다. 사람의 아픔을 잊지 않는 마음이 당신의 빛이어서 외로운 눈빛에 불빛 되어 고입니다. 아름다운 물의 등燈. 당신을 딛고 자신의 현재로부터 홀연히 일어서는 걸음들이 느슨히 서로를 알아봅니다. 이야기를 짓고 잊었던 기억을 무르춤히 꺼내어 그리움에 빠져 듭니다. 여린 봄잎처럼 삶의 가지에 매달리는 것들은 안타까워지고 당신은 그 꿈들을 보며 또 앓으시겠지요. 기도의 저 먼 끝으로 가셔서 시원의 빛으로 전하시겠지요. 이 세계의 눈물겨운 희망을.

죽음보다 깊은 기도가 거듭나게 할 세계가 문 밖에 있습니다. 끝없는 파도 소리가 되살리는 신생이 당신의 문 안으로 밀물져 들어옵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어떤 역사를 품고 당신은 이곳에 계십니다. 시간의 지층이 새겨진 저 절벽처럼 서 계십니다. 해안의 절벽은 깊고 당신의 눈동자는 무엇을 말할 듯 하지 않으십니다. 파도가 칩니다. 물결이 밀려듭니다. 세상을 빚던 빛이 포말이 되어 당신 발 앞에 부서집니다. 가도 가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봉인된 마음이 시간을 끝없이 가게 하십니다. 저 먼 바다의 눈시린 영원을 애태워 그리워하게 하십니다. 그곳에서부터 생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제 당신은 깊어진 눈길로 돌아올 이들을 위해 배를 띄우십니다. 누군가의 절벽으로 서서 발 밑을 치며 세차게 살아냈던 존재들의 여로에 함께 하십니다. 그 걸음으로 바다 위를 덮는 해무처럼 연약하게 스러지던 것들 속의 무한하던 드넓음이 어떻게 해변을 펼쳤는지 말씀 하십니다. 그 해변에 깃든 생명들이 어떤 흐린 노래를 불렀는지를.

노래는 하나의 물결이어서 이렇게 물결지는 것들로 젖어 있습니다. 노래를 머금는 당신도 파도에 깊이 젖어 파도와 한 가지로 울고 계십니다. 소리없이 울며 아파하는 이에게만 미소 지으십니다. 손목을 긋듯 서 있는 절벽이 되어 깎아지른 높이로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 해안에 도착하던 이들의 시린 눈물을, 그 눈물을 이루었던 역사를.

픽사베이.
픽사베이.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 속에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지우는 바람은 바람 속에 선 사람에게 일깨우려 합니다. 그 바닷가의 비린 내음이 흘려듣던 것을. 바다에 헌신하는 이들의 어린 물살이 같던 연약한 생을.

해안으로도 들꽃은 피어나 정교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습니다. 비와 바람에 상하며 꽃이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물결에 실리는 꽃빛,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은 꽃들도 바다로 와 제 모습을 비춰봅니다. 목을 꺾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시작되기도 전에 져 버렸던 어떤 생을. 바다는 긴 울음으로 화답합니다.

철썩이는 눈물이 영원하지 못한 사람의 연약함을 품어 안습니다. 파도가 흘려듣는 생은 어디에나 있어 당신은 그 고독에 듭니다. 바다조차 담지 못한 흐느낌이 해변가의 작은 집어등에 고입니다. 사소하고 작았던 숨결들이 그 불빛 아래 숨을 놓습니다. 정성되이 당신은 그 숨결들을 묻습니다. 달빛에, 반딧불이의 춤에, 저 먼 별빛에 띄웁니다. 흘러가는 해변의 부음은 검은 잉크로 쓰여지고 당신 홀로 앓으십니다.

누군가의 어깨가 다른 이의 어깨에 가만히 닿을 때. 기대어 오며 부딪는 어깨뼈가 고스란히 느껴질 때. 타악기처럼 몸이 울릴 때. 당신의 바다에는 죽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으로 긴 노래를 부르고 잇대어 있다는 따뜻한 확인으로 깨지 않는 잠에 듭니다. 바다는 빛으로 밝고 그 어둠마저 밝아옵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파도는 사라지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희고 어둡게 펼쳐져 있는 모래가 아니었다면 파도가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파도 속에서 열린 눈처럼 파도의 포말이 물마루까지 오르다 스러집니다. 수없이 무너지며 깊은 전언을 품고 파도는 물결쳐 오고 그곳에 모래의 몸이 있어 그 부드러운 다가옴과 떠남을 전합니다.

다시 시원으로 향해 떠나는 파도의 무수한 밀려듬이 쉽게 닿지 못하는 당신 같아 목이 마릅니다. 당신이 아직 연한 물결로 봄의 바다에 머물렀을 때 나는 한줌의 빛을 모아 당신의 주위에 흩뿌렸습니다. 나의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해변에 말씀을 품고 도착하셨을 때 그 말씀을 작은 모래 한 알로 머무는 내게 처음으로 들려주셨습니다. 가난하고 아픈 이들 곁으로 저를 밀어가셨습니다. 그 부름을 들으며 해변의 모래들도 뒤척였습니다. 희디희게 자신의 몸을 비웠습니다.

파도치는 빛이 되어 그 작고 낮은 몸을 채우던 당신. 닿을 수 없는 푸른 해원은 파도가 칠 때마다 더욱 깊어지고 당신은 죽음조차 줄 수 없었던 언어로 세계를 양각하십니다. 멀어지는 것은 아득히 꿈을 품고 하늘빛은 연해집니다. 당신이 나를 안으실 때 당신은 나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나를 안으시고는 저 멀리로 사라지십니다.

파도는 치고 당신은 잡히지 않은 채 내 안에 이슬을 품게 하십니다. 향기가 뼈아파서 이 봄의 하늘은 부드럽습니다. 향유 같은 눈물로 검은 하늘 아래 잎들을 매답니다. 노래 같은 언어로 지나가는 것들이 덧없이 맺힙니다. 영원이 철썩이는 그 모습 처연히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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