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내 곁에서, 괜찮지 않았던 너에게
[삐삐언니의 책방] 내 곁에서, 괜찮지 않았던 너에게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11.07 2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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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22)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비장애형제 자조모임 ‘나는’ 글, 한울림스페셜

10대에 난치병에 걸린 소녀를 알고 있다. 그에겐 여섯 살 어린 막내 남동생이 있다. 동생이 어느날 ‘진심’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나는 누나가 아픈 게 싫다.” 소녀의 병명이 밝혀진 이후 온 가족은 그의 몸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먹고 있는지, 제대로 자고 있는지, 아니 제대로 숨쉬고 있는지…. 누나가 아프고 나자, 막내는 더이상 자신이 떼를 쓰거나 응석을 부릴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옛 시절이 그리웠다. 그래서 죄책감 같은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누나가 아픈 게 싫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나는 막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누나야, 나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서운함과 답답함을 삭히는 게 아닐까, 마음이 쓰였다. 

비장애형제 자조모임,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한울림스페셜, 2021.
비장애형제 자조모임,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한울림스페셜, 2021.

지난 2016년 비장애형제 자조모임 ‘나는’이 생겨난 배경엔 이처럼 아픈 누나를 둔 막내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아파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아파도 말 못하고, 나까지 부모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어 늘 의연한 척해야 하는 존재. 이 운명이 특히 버거웠던 이유는 ‘나는’ 소속 회원들의 형제자매들이 정신적 장애(발달장애와 정신장애를 포괄하는 개념)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빠가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을, 동생이 자폐아라는 사실을 이웃과 친구와 연인에게 숨겨야 했다. 정신장애 가족을 뒀다는 것은 일상의 평온이 수시로 위협받게 된다는 의미였고, 유전적 문제가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했다. 

하지만 평생 보살핌을 받아야 할 동생이 있어서, 그 동생을 평생 돌봐야 하는 엄마의 여윈 뺨이 가여워서 그래서 ‘나는’ 늘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안으로 곪고 있었다.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에 등장하는 비장애형제 6명도 마찬가지다.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또는 의젓한 아이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사실은 나도 괜찮지 않다’고 털어놓을 기회를 잃어버렸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엄마의 말 “너를 믿어. 너만이라도 잘해야 해”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른 채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요구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는 짙은 우울로 이어졌다. “너는 멀쩡한 애가 왜 그러니?”라는 비난은 비수로 꽂혀 ‘나는 왜 이럴까?’라는 원망과 자책으로 굴절되기 일쑤였다. ‘나는’ 회원들은 이런 경험들을 서로 털어놓으면서 수십년 간 쌓여온 단단한 껍질을 깨는 해방감을 맛본다. 

물론, 이 책에 나온 인물들이 ‘나는’을 통해 모두 행복의 열쇠를 찾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고 가족과 적절한 거리를 설정하고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들은 비틀거리며 나아간다. 그럼 나는(What about me)?에서 나는(It’s about me)!로 나아가는 길. 타인에 대한 불만과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찬 물음표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느낌표로 나아가는 길. 꾸불꾸불하지만 함께한다면 꿋꿋이 걸어갈 수 있을 터이다. 

‘나는’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조울증을 앓는 나를 언니와 동생으로 둔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한 가지에 꽂히면 너무나 몰입하던 나의 어릴 적 모습, 과도한 비난과 억측, 망상으로 이어졌던 조증기, 비관에 젖어 움츠러들었던 울증기를 지켜보면서 자매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언니와 동생은 조증 시기 자신감에 차서 마구 떠들어대던 모습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졌는지, 세상의 온갖 어둠을 지고 있는 듯한 어두운 표정에 얼마나 놀랐었는지를 들려줬다. 울증기에 나를 자주 안아주며 스킨십을 쌓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됐다. 가장 놀라운 일은 조증 재발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동생이 신혼 준비는 뒷전으로 미루고 나의 일상을 지켜주려 애썼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온전히 나의 노력으로 그 시기를 견뎌왔다고 생각해왔는데 말이다.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는 자매들 뿐 아니라 그간 내 곁에서 함께 해온 이들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감사함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속삭여주고 싶었다. “괜찮지 않을 때 내게 꼭 말해줘. 나는 괜찮지 않은 너도 괜찮아.”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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